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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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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독촉한 모과… 이 거목은 알까

경남 창녕 모과나무의 흉고둘레 4.3m, ‘최고령’ 충북 청주 연제리 모과수 능가
평가받지 못했던 과실수 수령과 역사… 굵게 자란 밑동이 노거수를 증명할 뿐
등록 2022-12-10 12:46 수정 2022-12-12 03:27
2022년 12월1일 경남 창녕군 남지읍 신전리 관광농원에 있는 모과나무. 가슴높이 나무 둘레가 4.3m에 이른다.

2022년 12월1일 경남 창녕군 남지읍 신전리 관광농원에 있는 모과나무. 가슴높이 나무 둘레가 4.3m에 이른다.

젊은 나무엔 없고 노거수(老巨樹·크고 나이 많은 나무)에만 있는,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 물결치듯 굽이굽이 굴곡진 밑동이다. 어린나무의 줄기는 매끈하게 둥글다. 세월이 흐른다. 떡잎 아래에서 원뿌리 외에 수많은 곁뿌리가 물과 양분을 찾아 뻗어나가고 굵어진다. 이런 곁뿌리를 판자를 모로 세운 모양 같다고 해서 판근(板根)이라고 부른다. 물과 양분이 오가는 길인 줄기가 비대해진 곁뿌리를 따라 굵게 발달한다. 이런 노거수의 밑동은 비바람에도 노거수를 지탱해주는 지지대가 되는 동시에 살아온 역사를 증명해준다. 바라보는 사람은 숙연해진다.

2022년 12월1일 오후 경남 창녕군 남지읍 신전리 신전늪 인근 ㄱ관광농원(펜션)에서 모과나무 노거수와 마주했다. 이날도 철새들이 근처 습지에서 목을 축이며 쉬어갔다. 영하에 가까운 추운 날씨였지만 아낌없이 풍기는 달콤한 향에 몸이 누그러졌다. 이틀 전 갑자기 찾아온 한파에 잎과 열매가 일부 떨어졌지만 여전히 환하게 팔팔한 거목이었다.

키는 보통 다 자란 모과나무와 비슷한 10m가량이지만 밑동 둘레는 6m가 넘는다. ‘나무 크기 가늠자’인 흉고둘레(어른 가슴 높이의 둘레)는 4.3m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모과나무 가운데 유일한 문화재이자 가장 크고 수령이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청주 연제리 모과나무’(천연기념물 제522호)의 흉고둘레는 3.3m다.

유일한 문화재 모과나무보다 굵어

열매도 큼지막하다. ‘나무 참외’(木瓜·목과)라는 이름처럼 큰 참외만 했다. 표면에 기름(정유)이 끈끈하게 묻은 낙과를 하나 주워들고 재보니 길이 15㎝에 지름 11㎝였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어물전 꼴뚜기에 빗대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속담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너무 시고 과육에 까슬까슬한 돌세포가 많은 탓에 바로 먹기 어려워서일까.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역시 굴곡을 그리며 사방으로 뻗어나간, 모과나무 특유의 얼룩덜룩 껍질(수피)을 두른 밑동이었다. 촘촘하게 형성된 굴곡은 커튼 주름 같았다. 주름이 크게 진 쪽은 코끼리 다리 근육처럼 튼튼하고 듬직했다. 특히 남쪽으로 굵게 발달한 줄기가 선명했다.

“원래 살았던 곳에 남쪽으로 작은 옹달샘이 있었어요. 모과나무는 물을 좋아합니다. 물을 먹으려고 뿌리가 뻗다가 시간이 오래 지나 이렇게 굵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옮겨오면서 방향을 맞췄어요.” 농원 주인 박평진(61)씨가 이렇게 설명했다.

이 모과나무는 원래 차로 30여 분 거리의 경남 의령군 한 작은 마을에 살았다. 그러다 2012년 12월26일 이곳 신전리로 옮겨왔다. 이식에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최대한 뿌리를 살리려고 둘레 5m가량분을 충분히 크게 떴더니 흙 무게까지 총 32t이 나갔다. 대형 건설장비를 옮기는 로베드트레일러를 이용해 전깃줄 등 시골길 장애물을 피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한다.

“부산에서 하던 사업이 실패하고 26년 전 고향에 돌아왔어요. 그러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모과나무를 찾아다녔어요. 2010년이었어요. 알고 지내던 분이 의령 어디 마을에 가보라고 했어요. 마을 뒷산 기슭 대밭에 (이 모과나무가) 있었거든요. 처음 딱 봤는데, 어두컴컴한 게 무섭더라고요. 압도당했죠. 귀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큰 나무를 안 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자세히 보니 나무 속 구멍에까지 대나무 8그루가 자랄 정도로 관리가 잘 안돼 있었어요. 자주 갈 땐 일주일에 한두 번씩 찾아가서 2년간 살폈지요. 구매하려고 보니 소유자가 한 종중이었어요. 처음에는 ‘조상님들 아끼시던 나무’라 안 된다고 했지만 나중에 ‘다들 늙고 관리할 힘도 없다’며 모셔가라 하더라고요. 제사를 올리고 ‘할배(모과나무)요, 세상 구경 가입시다’ 하고 모셔왔습니다. 진짜 우리 할배 모시듯, 거름을 써도 제일 좋은 거로, 매일매일 상태를 살피면서 예를 갖춰 모십니다.” 박평진씨에게 어느 마을인지, 어디 종중인지, 나무 구매비가 얼마인지를 물었으나 “할배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며 손사래를 쳤다.

2022년 11월3일 창녕 모과나무 옆에 ‘노거수를 찾는 사람들’ 활동가들이 서 있다. 박정기 제공

2022년 11월3일 창녕 모과나무 옆에 ‘노거수를 찾는 사람들’ 활동가들이 서 있다. 박정기 제공

“다른 노거수 모과나무와 달리 팔팔한 장년”

이날 함께 방문한 박정기 ‘노거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대표와 이 모과나무의 생육상태를 살폈다. △잎이 넓고 많다 △열매가 많고 크다 △도장지(새 가지)가 길고 곧다 등을 들어 나무 상태가 ‘양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식한 나무라 걱정했는데 새 터전에 잘 적응한 것 같네요. 속에 구멍이 생긴 점을 빼곤 썩은 부위도 거의 없고, 국내 모과나무 노거수를 많이 봐왔지만 가장 생육상태가 좋습니다. 다른 노거수들이 노년이라고 한다면 이 나무는 장년으로 앞으로도 수백 년은 더 살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원래 있던 곳이 대밭이었다는 건 꽤 큰 마을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차나 술로 즐기는 모과나무를 심었다는 건 여유가 있었다는 얘기고요. 그러다 이제 인구도 줄고 연세 드신 분들만 남게 되니 관리가 안됐다는 거잖아요. 관에서 살펴주는 것도 아니고….”

의령군 인구는 2022년 11월 기준 2만6천여 명으로 경남에서 가장 적다. 이성근 부산그린트러스트 사무처장은 “이 모과나무같이 곳곳에 알려지지 않은 노거수가 아직 많다. 지금이라도 정부·지방자치단체가 조사하고 관련 토지를 사들여 노거수들이 살았던 곳에 계속 살도록 제대로 관리하는 게 인간의 도리”라고 말했다.

지금은 ‘선량한 소유주’를 만나 대접받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이 질문에 박평진씨는 복잡한 속내를 드러냈다. “저도 그게 고민이에요.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나중에 내가 죽으면? 수백 년은 더 살아갈 나무인데….”

이 나무 어르신의 수령이 궁금했다. 박평진씨는 이전 소유주인 종중 쪽에서 들은 말과 다른 노거수 모과나무들과의 비교 등을 근거로 450∼500살 정도로 추정했다. 모과나무는 과일나무 중 드물게 오래 사는 장수목임에도 식재 시기 등이 사료로 남은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2022년 12월1일 신전리 관광농원 주인 박평진씨가 모과나무 옆에 떨어진 모과를 들고 서 있다.

2022년 12월1일 신전리 관광농원 주인 박평진씨가 모과나무 옆에 떨어진 모과를 들고 서 있다.

“모과나무, 과실수 중 드물게 장수목”

이경준 서울대 산림과학부 명예교수에게 모과나무에 대해 들어봤다. “모과나무는 더위·가뭄 등을 잘 극복하는 환경저항성이 뛰어난 수종이다. 상처가 생겼을 때 유합조직이 상처를 감싸서 낫게 하는 능력이 특히 좋다. 모과나무에 연리지(두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 결이 서로 통한 것)가 잘 생기는 것도 이런 특징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매화 정도를 제외하곤 과실수로 기념식수를 하거나 당산목 등으로 삼진 않는다. 느티나무·소나무·향나무 등과 달리 과실수는 과일을 따 먹고 소비하는 것이 목적이다. 우연히 오래 살아 큰 나무가 돼 관심을 갖는 것이지 심을 때부터 기록을 남기진 않는다.”

그러면서 그는 “20년 전만 해도 역사성이 없다는 이유로 과실수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최근에 역사성이 부족해도 크거나 나이가 많으면 충분히 가치 있다고 평가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이 명예교수는 1997년부터 7년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청주 ‘연제리 모과나무’도 수령이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2000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등록될 때 수령이 ‘300∼350살’로 돼 있었지만 2011년 천연기념물 등재 땐 ‘500살’로 150∼200살 불어났다. 역사적 맥락도 논란거리다. 1455년 단종이 임금에서 끌어내려진 뒤 관직을 버리고 청주 무동(楙洞·모과나무마을·현 연제리)에서 지내던 학자 유윤(柳潤)이 세조의 부름에 ‘이 모과나무(연제리 모과나무)처럼 쓸모없는 사람’이라며 거부해, 임금으로부터 ‘무동처사’라는 어필(御筆·임금이 쓴 글씨)을 받았다는 내용이 안내판·누리집 등에 쓰여 있다. 하지만 문헌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을뿐더러 ‘어필을 내린 임금’이 누구인지도 불분명하다. 문화재청은 ‘연제리 모과나무’를 소개할 땐 ‘세조’라고 했지만, 유윤과 관련한 다른 천연기념물인 충남 서산 ‘송곡서원 향나무’(제553호)를 소개할 땐 광해군이라고 했다.

1978년 인근 마을에서 충익사를 ‘의병장 곽재우 유적지’로 성역화하면서 옮겨심은 ‘의령 충익사 모과나무’도 1987년 기념물 지정 땐 280살이라고 됐던 것이 현재 500살로 바뀌었다. 전북 순창 강천사, 강원도 삼척 안의리, 경남 창원 의림사 등등 전국 각지에 수백 살 됐다는 모과나무가 많은데 이 나무들의 나이 또한 얼마나 정확할까. 그런데 나이와 근본을 따지는 이 노거수들이 실은 생태적 특징만으로도 충분한 울림을 주는 건 아닐까.

임금이 애타게 찾던 모과, 겨울이 제철

“나는 본시 담증(痰證)이 있어서 모과를 약으로 장복하고 있다. 그런데 충청도에서 쌀을 찧는다고 한 개도 올려보내지 않았다고 하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속히 파발을 띄워 독촉하라.” <조선왕조실록> 광해 1년(1608년) 10월21일 기사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모과를 애타게 찾는 임금의 답답함이 느껴진다. 400∼500살이라면 이때 쓰인 진상품일 수 있다. 모과는 말리거나 꿀·설탕에 재어놓았다가 차로 마시거나 술을 담가 먹는다. 겨울은 ‘임금도 목말라한 모과’를 즐길 제철이다.

참, 모과나무는 벚나무아과로 벚나무와 친척이다. 잎도 안 틔운 상태에서 만개하는 벚꽃만큼 화려하진 않아도 5월 잎사귀 사이사이 핀, 꽃잎 다섯 장 모과꽃도 참 근사하다.

창녕=글·사진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나무 전상서: 나무를 아끼고 지키는 사람들의 마음을 전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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