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 곡예하듯 깎아지는 바닷가 낭떠러지를 따라 푸른 잎 무더기들이 봉긋봉긋 보였다. 한 줌 흙조차 부족해 보이는 바윗돌 위에 향나무 수백 그루가 선 듯 누운 듯 자라고 있었다. 절벽 정상부 평평한 곳을 차지한 곰솔(해송) 무리가 이 광경을 내려다봤다. 2023년 12월14일 오후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심곡리 2.8㎞ ‘바다부채길’ 따라 하늘에서 두두 두둑 부슬비가 내렸고, 철제 탐방로 아래로 바위에 들이친 파도가 하얀 포말을 피워올렸다. ‘울릉도 다음으로 큰 향나무 자생 군락지’(강릉시 소개글)다. 원뿔 모양의 어린나무가 대부분이었지만 군데군데 고목으로 커가는 제법 나이 든 나무들도 눈에 띄었다. 향나무는 어릴 땐 원뿔 모양 수형(나무의 전체적인 생김새)을 띠지만, 수십 년이 지나면 특유의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점차 바뀐다.
정재민 국립수목원 박사가 말했다. 조선 개항기 이후 일본 등 외세에 의해 고급 목재인 향나무가 남벌됐던 것도 ‘동해안 향나무 실종’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정 박사는 2010~2011년 현장 답사를 통해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부터 경북 경주시 감포읍까지 향나무가 자생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울릉도 외에 향나무 자생지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궁궐과 학교, 사당, 마을 우물가 등에 폭넓게 심었고 집집이 제사를 지낼 때 쓰인 ‘그 흔한’ 향나무가 울릉도에만 틀어박혀 자생한다는 것이 어색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래서 중국 도입설 등도 제기됐다. 특히 정 박사의 조사에선 빠졌지만, 2016년 군부대가 정찰길로 활용하던 바다부채길이 민간에 개방되면서 향나무 거대 군락의 존재도 주목받았다. 바다부채길의 해안단구(파도 침식에 따라 계단 모양으로 나타나는 지형)는 2004년 천연기념물(제437호)로 지정됐다.
흔히 ‘바다 나무’ 하면 곰솔이나 팽나무를 떠올리지만 진짜배기는 향나무다. 턱밑에 파도를 두고 바다와 붙어 살아간다. 향나무라고 왜 여느 나무처럼 평평하고 안전한 곳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향나무는 자라는 속도가 느리다. 곰솔이 이미 키 큰 나무가 됐을 때, 향나무는 여전히 2~3m 수준에 머문다. 햇빛과 메마른 흙을 좋아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곰솔은 능선에, 향나무는 가파른 절벽에 매달려 살아가는 이유다. “향나무는 굉장히 늦게 자라는 탓에 경쟁에서 밀립니다. 다른 나무들이 침입하기 어려운 절벽 같은 국소적 생태환경이 향나무에 훌륭한 피난처를 제공하는 셈이죠.”(정재민 박사)
건조·추위·염분 등 각종 스트레스를 잘 이겨내고 느리게 자라는 건 향나무가 장수하는 비결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산 나무도 울릉도 도동에 있는 2천~2500살로 추정되는 향나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인 미국 캘리포니아 화이트산맥의 4900살 브리슬콘소나무도 해발 3천m 이상 바윗돌이 많은 건조한 지역에서 자란다.
느긋한 성격 때문인지 번식도 서두르지 않는다. 향나무 결실(열매)은 봄에 수정되면 18개월이 지난 이듬해 봄에 익는다. 연한 녹색은 그해 봄에, 검푸른 것은 한 해 전 봄에 맺은 열매다.
1997년 8월 동해시 송정동 한 가정집 뜰에서 세로 42㎝, 가로 20㎝ 크기에 무게 25㎏의 ‘검은 돌’을 발견했다. 소유자는 ‘10여 년 전(1980년대 중반) 삼척의 마읍천과 맹방해변이 만나는 합수 지대 늪에서 오석(烏石·흑요석)인 줄 알고 이 ‘돌’을 수집했단다. 정항교 당시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장(현 강원도 문화재전문위원) 등이 조사했다. 나무가 화석화한 것으로 보였다. 표면의 부스러기를 약간 떼어내 태웠더니 은은한 향내가 났다. 이후 이 ‘돌’이 오랫동안 물에 잠겨 단단하게 굳은 향나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때문에 이 지역 학계에서는 ‘그동안 미스터리로 남았던 매향 의식의 실체가 수면으로 떠올랐다’는 추정도 나왔다.
‘매향’은 향나무 토막을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묻는 고려시대 의식이다. 1천 년이 지난 뒤 거둬들여 향나무 토막을 ‘침향’이라고 불렀다. 이 침향으로 향불을 만들어 미륵불에 공양을 올리는 것이 ‘매향 의식’의 목적이다. 이 침향은 동남아시아에 사는 백목향의 수지(나무에서 나오는 기름)로 만든 ‘진침향’과는 다르다.
정항교 전문위원은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1002년부터 1434년까지 10여 곳에서 매향 의식이 이뤄졌고 수천 조(條·토막)의 향나무를 묻었다고 하나, 발견된 것은 삼척 맹방 침향 딱 하나라서, 이 침향이 매향 의식의 결과인지는 단정할 수는 없다”며 “일본강점기 때 한 스님이 침향을 발견했다는 기록도 있고, 답사 때 주민들 얘길 들어보면 바닷가에서 건져낸 까만 돌을 모깃불로 썼다는 얘기도 있다”고 설명했다.
전남 영암·영광, 경남 사천, 충남 태안·당진, 평북 정주 등 전국 10여 곳에 매향 의식을 기록한 비석이 확인된다. 향나무가 한반도 전역의 바닷가를 따라 서식했고, 과거엔 매향 의식을 치를 정도로 향나무가 풍부했음을 알 수 있는 단서 중 하나다.
향나무 활용 역사가 오래됐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2022년 10월 국보로 지정된 해인사 비로자나불 2점은 883년 제작된 우리나라 최고 목조 예술품이다. 500살 이상 된 통향나무가 쓰였다. 또 <삼국사기>에는 927년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때 ‘향나무 수레와 보석으로 장식한 말’(香車寶馬) 행렬이 30리(11.7㎞)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여러 매향 의식 가운데 현재 북한 지역인 강원도 고성군 삼일포에서 1309년 치러진 것은 다른 매향 의식들과 다르다. 나머지가 민간에서 주도했던 것과 달리, 고성 매향 의식은 유일하게 왕의 대리인이 주도한 의식이었다. 지금 도지사에 해당하는 ‘강릉존무사’가 의식을 집행했고, 경북 울진부터 북쪽으로 강원도 삼척·동해·강릉·양양·속초·고성과 통천(북한 지역)까지 1400조를 묻었다고 삼일포 매향비 등에 기록돼 있다.
2000년 강릉시는 강릉원주대 교수 등 전문가들로 이뤄진 매향유적조사단을 꾸려 매향 의식이 이뤄진 것으로 기록된 정동진 일대를 조사했지만, 끝내 침향은 추가로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정동진 모래시계 공원에 1천 년을 기약하며 향나무 토막들을 새로 묻었다.
“향나무를 묻은 곳들은 일단 향나무가 많은 곳이었을 겁니다. 아무리 미륵신앙이 번성해도 향나무가 충분하지 않으면 묻을 수 없죠. 또 큰 하천이 아니라 작은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합수 지점이어야 해요. 그래서 강릉에서도 남대천 대신 정동천 하류가 선택된 거죠. 쉽게 유실되면 안 되잖아요. 예상 지역이 광범위해서 사실상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바다 쪽인지 내륙 쪽인지, 얼마나 깊이 묻었는지 기록이 없거든요. 어쩌면 큰 태풍에 이미 다 떠내려가 사라졌을 수 있죠. 모르죠, 정말 천년이 지난 뒤 한꺼번에 나타날지도….”(정항교 전문위원) 당시 향나무가 천년 침향이 되려면 아직도 286년이 더 지나야 한다.
정동진 해변에서 정동천을 따라 서쪽으로 200m쯤 올라가면 성황당(서낭당)과 ‘장군숲’이라 부르는 성황림이 나온다. 500평(약 1650㎡) 작은 향나무숲이었다. 향나무가 모두 23그루로, 가슴높이 둘레가 1~2m 넘는 고목도 10여 그루 있었다. 모두 15m가량 큰 키를 자랑했다. 규모로는 전국 최대로 평가된다.
이날 제법 굵은 향나무 중 하나를 직접 쟀다. 밑동에서 두 갈래로 올라온 줄기의 둘레가 각각 1m와 1.8m였다. 목재조직학 권위자인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임학)는 “향나무 고목은 한 그루씩은 있어도 이렇게 20여 그루가 향림으로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다”며 “고목 나이는 정확히 알기 어렵고, 향나무의 경우 살아온 환경에 따라 자라는 속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꽃 같으면 실험하겠지만 나무는 몇십 년도 넘게 자라는데 실험하기도 어렵다. 다만 가슴높이 둘레가 2m 이상이라면 300살 이상까지도 볼 수 있을 듯하다”고 말했다.
장군숲이라 하는 이유는 여기 성황당에서 ‘삼장군’의 신위를 모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세 장군이 누구인지, 이곳 향림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자생지인지, 언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조성했는지 등에 대해선 아무런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다만 비슷한 이름의, 대구 군위 ‘삼장군당’에서 신라 김유신 장군을 비롯해 당나라 소정방·이무 장군을 받들고, 강릉 단오제에서 김유신 장군을 수호신으로 삼는 점 등을 미뤄 삼장군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정동2리 이장을 지낸 주민 이선종(66)씨가 말했다. “제가 10여 년 전 이장을 할 때, 강릉문화원 등에 성황당 이력을 문의했는데 남은 기록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궁금해서 저희 아버지 생전에 여쭤보니 다른 곳에 있는 성황당을 원래 숲이 우거져 있던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고 하는데, 정확한 건 모르죠. 제가 어릴 때는 향나무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죠. 숲 크기도 두세 배 됐고요. 숲이 우거져 있어 무서운 곳이었어요. 성황당 앞으로 오솔길이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그 길로 안 다니고 돌아서 지나갔어요. 학교(정동초교)가 들어서고, 경로당(정동2리 경로당)이 들어서고, 식당들도 생기고, 큰길이 놓이고 하면서 저렇게 줄어들었죠.”
이 장군숲도 매향 의식과 연관됐을 수 있다. 정항교 전문위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향나무가 많았다고 하나 귀하고 신성한 나무였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집니다. 수년 전에 삼척 맹방을 답사하다, 몇 사람이 앉아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향나무 밑동을 확인했어요.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베어갔다고 하더라고요. 천년을 내다보며 의식을 지내는 사람들이었다면 향나무를 완전히 베어냈다기보다, 굵은 가지만 베어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후계림을 심었을 가능성도 있어요. 후손도 매향 의식을 하도록 배려해야 하잖아요. 지금 장군숲이 고려 때 조성한 후계림이거나 후계림의 후계림일 수 있습니다. 절벽에서 자란 향나무들이 하나같이 굽은 데 비해, 이 향나무들은 곧게 서 있어 조림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는 매향 의식이 치러진 곳에서 불과 몇백m 거리이기도 하고요.” 분명한 것은 과거엔 1천 년 단위 시간표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30년 이상 된 숲조차 노령림, 즉 늙은 숲이라며 베어내고 새 나무를 심겠다(2021년 1월 산림청이 발표한 ‘산림 구조조정 계획’)는 것이 받아들여지는 지금 세상과는 썩 다르다.
이날 동해 추암과 삼척 궁촌·갈남·신남 등 향나무 자생 군락지를 살펴보니, 절벽에 매달린 모양새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삼척 궁촌에서 발 닿는 곳까지 절벽을 따라 올라 향나무를 관찰하다 가시에 찔렸다. 향나무는 어린 가지에선 뾰족한 가시 같은 잎이 돋는다. 더디게 자라는 약점을 이겨내려 진화한 장치일 것으로 추정된다. 향나무류의 라틴어 이름 주니페루스(Juniperus)는 이런 바늘잎을 보고 딴 것으로 ‘뾰족뾰족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7년 이상 된 가지에선 전혀 다른 부드러운 비늘잎을 낸다. 비늘잎은 잎들이 가지를 감싸듯 올라가 덮어서 생긴 것으로, 새의 다리 표면을 덮는 비늘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어려서 둥글둥글 순수하다가 학교와 직장 등을 통해 사회화하면서 뾰족해지는 인간과는 반대랄까. 어릴 때부터 부드러운 비늘잎을 내도록 개량된 ‘조경용 향나무’ 가이스카마저도 너무 강하게 가지를 치면 뾰족한 바늘잎을 낸다.
향나무는 변화무쌍한 모습 때문에 다른 종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서울 창덕궁의 굽이치는 향나무와 제기동 선농단의 곧게 선 향나무는 같은 종이다. 박상진 명예교수가 설명했다. “원래 향나무는 다른 침엽수들처럼 똑바로 자라는 나무라고 봅니다. 자연상태에서는 환경에 맞춰 살면서 구부러지는 거고, 식재한 경우엔 향으로 쓰기 위해 줄기를 떼어내는 등 인위적인 피해를 줘서 그렇게 구불구불해진 거죠.”
이뿐 아니다. 향나무는 은행나무처럼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지만, 어떤 향나무는 암꽃과 수꽃이 한 나무에 함께 달리기도 한다. 이날도 주황색 수꽃이 피어난 가지 옆으로 까맣게 익어가는 열매를 단 향나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향나무류 암나무가 환경이 좋아지면 수나무로 변하거나, 환경이 나빠지면 수나무가 암나무로 바뀌는 일 등 성전환이 관찰됐다는 것이 학계에 보고됐다. 박 교수는 향나무 가치에 대해 “다른 향 나는 식물은 꽃, 열매 등 몸 일부에서 향이 나지요. 진침향도 수지(나무에서 나오는 기름)에서만 향이 납니다. 하지만 향나무는 온몸에서 향이 나는 특별한 나무랍니다”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향나무 가치에 대해 "다른 향 나는 식물은 꽃, 열매 등 몸 일부에서 향이 나지요. 진침향도 수지에서만 향이 납니다. 하지만 향나무는 온몸에서 향이 나는 특별한 나무랍니다"라고 설명했다.
개발과 무분별한 채취 등 사람에 의해 향나무는 희귀수종(멸종위기 취약단계)으로 분류된다. 이런 향나무를 동해안에 다시 퍼뜨리는 건 바다직박구리 같은 새들이다. “향나무는 바닷새들과 공진화해왔어요. 열매가 새의 소화기관을 통과해야 발아하거든요. 바다직박구리는 우리나라 해안에 분포하는 텃새인데, 절벽의 틈에 둥지를 만들어 번식해요. 식생(식물)이 없는 해안 암벽을 찾아가는 거죠. 우연히 절벽 틈새에 배변하면 거기서 향나무가 자라요. 어린 향나무라도 동해안에 많아진 것은 다 바다직박구리 덕분이죠.”(정재민 박사)
이날 오후 삼척 원덕읍 갈남리 해신당공원 주변 해안 절벽을 둘러봤다. 철조망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자란 향나무가 곰솔은 물론 낙엽 진 활엽수들과 뒤섞여 있었다. 어색했다.
“향나무를 포함한 나무들은 수백~수천 년 단위로 기후변화에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기도 하고 남쪽으로 내려가기도, 서식 면적이 넓어지기도 좁아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른 국면입니다. 기온이 너무 급격하게 따뜻해지고 있어요. 이동할 겨를도 없어진 거죠. 삼척 갈남의 경우 향나무만 살던 절벽에 곰솔이나 참나무류, 물푸레나무, 조팝나무 등이 관찰됩니다. 이제 더 갈 곳이 없어요. 지금부터라도 자생지를 제대로 보호하지 않으면 한반도에서 자생 향나무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릅니다.”(정재민 박사)
강릉·동해·삼척(강원)=글·사진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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