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 오지은 앨범 재킷.
타지 생활을 오래 한 탓에 터미널을 자주 오갔다. 사람들을 태우고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를 바라보면 왠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번은 일없이 터미널에 죽치고 있었다. 떠나는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아니면서 긴 의자에 앉아 줄지어 선 버스들을 바라봤다.
서울살이를 시작하며 얻은 첫 월셋집은 시장 근처였다. 시끌벅적한 골목을 지나 조금 걷다보면 오르막길 초입에 다가구주택이 있었다. 이사를 자주 다녔지만 이십 대 때 머문 곳은 죄다 비슷한 풍경이었다. 낯익은 걸음들. 기대할 것 없이 거리를 헤매다 일부러 돌아가는 길은 먹먹했다.
오지은의 음악은 내게 낮은 담장 같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이십 대가 담장 옆에 서 있다. “나의 이성 나의 이론 나의 존엄 나의 권위 모두가 유치함과 조바심과 억지부림 속 좁은 오해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니까”(<화>(華)) 하고 노래 불렀던 숱한 밤이 있다. 그 시절 나는 언제나 잘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자주 꾼 꿈이 있다. 나는 죽었고,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왜 나는 모르는 사람들과 있을까. 그의 음악을 듣던 “작은 방”의 기억이 펼쳐진다.
사람과 사람의 거리는 아주 가깝다가도 저만치 멀어지곤 한다. 내게도 끊어진 끈들이 있다. 팽팽하게 나를 견디다 이제는 떠난 사람들. 운전 솜씨가 좋은 ‘서른 살 형’은 연극배우였다. 나는 형이 머물던 극단에서 잠깐 조명을 달거나 무대장치 등을 조립하고 해체하는 일을 했다. 어느 날 형이 차를 몰고 왔다. 차 안에서 형은 자기가 서른이 됐다고 했다. 서른이면 성공한 배우가 돼 있을 줄 알았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집도 한 채 있을 줄 알았다고, 그런데 지금 자기는 무명 배우이고 가정은커녕 애인도 없다고 했다. 형이 좁은 길을 후진으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다음날 형은 야외무대에 섰다. <오구>에서 ‘저승사자 2’ 역을 맡았다. 우스꽝스러운 남근이 달린 바지를 입고 춤추고 노래했다. 나는 무대 뒤에서 형을 지켜봤다. 형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마음을 다해 연기했다.
형의 말은 내가 지쳐서 쓰러질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웠다. ‘서른 살 형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생각했던 것 같다. 무명이 아니라 유명의 삶을 살고 싶었다. 성공이 뭔지도 모른 채 성공하고 싶었다. 시를 잘 쓰고 싶었고 하루빨리 시인이 되고 싶었다. 이것이 성공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시를 잘 쓰는 것보다 좋은 시를 쓰는 게 중요하고 사랑받는 시인이 되는 것보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함을 이제는 안다. 글 쓸 자신이 없다는 걸 숨기고 싶었다. 좋은 시를 쓰는 것,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은 벅찬 일이었다.
오지은의 첫 앨범 《지은》은 심장박동 소리(<당신이 필요해요>)로 듣는 이를 맞이한다. 그 소리에 나는 “자그마한 내 쉼터”(<작은 방>)들을 떠올린다. 예술은 대개 삶이다. 가끔 투쟁이고 이따금 아무것도 아니다. 읽고 쓰는 삶을 계속하다보면 삶이 보잘것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노래하는 게 두려울 때도 마음을 다하고 싶다. 어떠한 삶이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 삶은 불행하다. 다시는 불행한 삶에 나를 던지지 않을 것이다.
최지인 시인
*너의 노래, 나의 자랑: 시를 통해 노래에 대한 사랑을 피력해온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최지인 시인의 노래 이야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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