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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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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거나 죽이지 않고 ‘살리는’ 선택 보여준 <슈룹>

지금 우리 곁에 우산이 필요한 누군가
등록 2022-11-12 16:16 수정 2022-12-09 09:44
tvN 제공

tvN 제공

“두릅? 그게 드라마 이름이야?”

“아니 슈룹! 슈! 룹!”

“슈룹? 사극이라며 왜 영어야?”

“영어가 아니고 우산을 뜻하는 옛말이래.”

‘요즘 어떤 드라마를 보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대답하다가 뜻밖에도 제목을 알리는 단계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난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tvN 드라마 <슈룹>(극본 박바라, 연출 김형식)은 분명 조선왕조를 재현한 것 같은데 어느 왕조의 이야기인지도 불분명하다. 사극인데 현대어가 난무해 오글거린다. 고증 논란에 휩싸였다. 몇몇 장면은 중국 ‘고전 복장극’(고장극) 속 후궁 암투물의 설정과 유사하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 드라마를 ‘정통’ 사극으로 보면 분명 문제적으로 여겨질 법하다. 그러나 남장한 여성이 성균관에서 학문을 익히고(<성균관 스캔들>), 세자가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평민 여성과 혼인하고(<백일의 낭군님>), 공주가 자신의 성별을 감추고 왕이 되는 게 가능한(<연모>) ‘퓨전’ 사극 장르의 문법을 적용하면 장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슈룹>은 퓨전 사극을 넘어 ‘사극은 거들 뿐’인 현대극에 가깝지 않을까.

퓨전 사극의 성패는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가에 있는 게 아니다. 퓨전 사극이라는 장르를 빌려 당시 사회의 관습을 비틀고 상상력을 동원해 드러내려 한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가에 있다. 그렇다면 제목조차 낯선 이 드라마는 2022년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싶은 것일까.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가 ‘혈허궐’이라는 병을 앓다가 갑자기 숨졌다. 공석이 된 ‘국본’(세자)의 자리는 누가 차지할 것인가? 적통 승계 관습에 따라 네 명의 대군 중 한 명이나 세자의 아들인 원손이 다음 세자가 돼야 마땅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그런 관습을 따르는 대신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유경쟁 체제인 ‘택현’(가장 총명하고 어진 자를 후계자로 뽑음)으로 세자를 선발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요구가 가능한 이유는 세자 후보인 대군들의 평판이 그리 좋지 않은 탓도 있지만, 지금의 왕인 이호(최원영)가 택현으로 왕이 된 후궁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선대의 세자와 대군들을 죽여 아들을 왕위에 앉힌 대비(김해숙)는 대신들과 공모해 택현을 몰아붙여 자신의 권력을 영속시킬 세자를 앉히기 위해 모략을 꾸민다. 아들을 세자로 앉힐 기회를 얻은 후궁들도 발 빠르게 야합을 시도한다. 택현은 겉으로 보기에는 공정한 절차 같지만, 알고 보면 위험한 경쟁이다. 대비가 자기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세자와 대군들을 죽였듯 대군들도 의문사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중전 임화령(김혜수)은 아들들을 지키기 위해 대비에 맞선다.

드라마 <슈룹>의 장면들. tvN 제공

드라마 <슈룹>의 장면들. tvN 제공

‘씩씩한 중전’ 앞세운, 또 하나의 여성 서사

<슈룹>은 “조선판 스카이(SKY) 캐슬”로 불리며 주목받았다. 그 평가에 걸맞게 ‘캐슬’이라는 공간은 ‘궁궐’로, ‘입시 전쟁’은 ‘세자 만들기’로 비틀어 조선시대 왕실 교육에 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극의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는 대비와 화령의 갈등과 대립이다. 권력의 핵심인 영의정(김의성)의 딸이자 후궁의 수장인 황귀인(옥자연)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즉, <슈룹>은 궁중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전쟁과 같은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그간 다른 드라마에서도 반복된 ‘내명부’ 여성들 간 암투를 그려 다소 식상한 면이 있다. <스카이 캐슬>처럼 모성을 앞세워 가부장 사회의 계급을 재생산하는 구시대적 이야기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여성들이 서사의 중심에 배치된 <구경이> <작은 아씨들>과 닮았고, 조선시대의 한계를 뚫고 주체적으로 살고자 한 여성상을 제시한 <신입사관 구해령> <옷소매 붉은 끝동>과도 닮았다는 면에서 <슈룹>은 우리가 만나게 된 또 하나의 여성 서사로 이해할 필요도 있다.

서사의 중심축인 임화령을 보자. 화령은 첫 회부터 “어디 있어, 이 새끼!”라고 외치며 박력 있게 등장해 남다른 존재감을 알렸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화령은 왕의 정치철학을 가장 잘 이해하며 돕는 정치적 동반자이며, 판을 짜고 주도하는 전략가이자, 대신들과 논쟁하는 정치적 존재로 활약한다. ‘왕의 여인’ 혹은 ‘세자의 어머니’라는 사적인 존재에 머물던 그간의 ‘중전’에서 성큼 나아갔다.

화령이 보여준 ‘엄마’로서의 면모도 눈여겨볼 만하다. 다른 후궁들이 자신이 가진 권력과 인맥을 사용해 공정해야 할 경쟁을 무력화할 때 화령은 아들들과 함께 시험공부를 하며 그들의 성장을 돕는다. 공정의 겉모양만 취한 채 안으로는 불공정과 죽음의 경쟁으로 내달리는 불의한 경쟁 체제를 따르는 대신 자신만의 방식으로 경쟁한다. 또한 대비와 황귀인이 세자와 주변 사람들을 죽여서라도 자기 아들을 왕의 자리에 앉히려 할 때 화령은 자기 아들들과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성남대군(문상민)을 세자 자리에 앉히려 한다. 그러니까 <슈룹>은 ‘어떻게 이길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될 수 있다.

드라마 <슈룹>의 장면들. tvN 제공

드라마 <슈룹>의 장면들. tvN 제공

성소수자, 혐오, 재난 이야기는 미래지향적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관한 문제의식은 계성대군(유선호)이 시간 날 때마다 궁궐의 외곽 비밀 전각에서 여장하는 걸 화령이 알게 됐을 때 더 드러난다. 화령은 잠시 충격에 빠지지만, 아들의 특별한 성적 지향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계성대군의 정체성을 다른 이에게 들키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전각을 태우면서도 여장한 계성대군을 그린 초상화와 자신이 아끼는 비녀를 선물하며 그를 온전하게 받아들인다. “화는 안 나셨습니까”라는 아들의 질문에 화령은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내 잠시 방황은 했다. 허나 화는 난 적 없”다며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말이다. 남과 다른 걸 품고 사는 사람도 숨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거야.” 화령의 이 말은 자신의 진짜 존재를 매 순간 ‘죽여야’ 했던 계성대군을 살리는 말이었다.

이런 문제의식은 사회적 재난에 관한 인식으로도 이어진다. 세자의 배동(세자와 함께 교육받는 친구)을 뽑기 위해 시강원에 모인 대군들과 왕자들에게 왕은 움막촌에 퍼진 역병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묻는다. 황귀인의 아들 의성군이 움막촌을 불태워서라도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성남대군은 “역병에 대한 거짓 정보와 무지함이 백성들의 불안과 공포를 낳는 것”이고 “그 불안과 공포가 움막촌에 대한 혐오와 차별로도 표출되고 있”다며 “병의 확산을 막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 병을 정확히 알아야” 하기에 구휼뿐 아니라 “구료와 함께 역학조사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성군이 역병에 걸린 백성을 ‘죽이는’ 선택을 한 것이라면 성남대군은 그들을 ‘살리는’ 선택을 한 것이다.

<슈룹>의 시대적 배경은 과거지만 담긴 이야기는 현대적이며 경쟁,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 사회적 재난 등 우리 사회 특히 대중문화가 공론장에 내놓기 어려워하는 민감한 이야기를 소신껏 다뤘다는 면에서 미래지향적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한 편의 드라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담긴 셈이다.

왜 하필 제목이 ‘슈룹’일까

16부작으로 기획된 드라마의 절반이 방영됐다. 조선시대의 왕실 교육을 재현한 시대극이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죽도록 서로를 미워하며 경쟁하는 가족막장극이고, 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수사극이기도 하고, 대군들과 왕자들이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청소년 성장물이자, 청춘로맨스물이기도 한 복잡한 구조를 가진 드라마이기에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섣불리 예측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드라마의 제목이 왜 하필 발음하기도 어려운 ‘슈룹’인지 생각해본다. 사랑하는 아들이 비를 맞게 됐을 때, 위험한 상황에 내몰렸을 때 화령의 슈룹은 그들의 안전한 보호막이 됐다. 화령의 슈룹은 무한 경쟁에 내몰리고, 차별과 혐오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으며, 사회적 재난으로 불안이 일상이 된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지금 우리 곁에 슈룹이 필요한 이는 누구일까. 슈룹이 그저 ‘내 새끼’만 보호하는 것에 그치는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기를 바란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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