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도 있지 않나?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할 것 같은데, 그걸 이해하지 않으면 내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핵심적 퍼즐 조각 말이다. 그 길로 갔다가는 인생 망할 것 같은데 자꾸 들리는 내면의 목소리, 외면할수록 자기 삶에서 또 관계에서 겉도는 느낌 말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글리치>(극본 진한새, 연출 노덕)는 목숨 걸고 자아를 찾는 영웅과 이 여정을 기꺼이 함께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렇게 말하면 웅장한 영웅서사인데 주인공은 살짝 맛이 간 것 같은 여자들이다. 이 괴짜들을 코믹, 미스터리, 에스에프(SF) 잡탕 속에 던져넣은 모험기 <글리치>는 2022년 10월 셋째 주 넷플릭스 비영어권 시리즈 순위 8위에 올랐다.
서른 살 홍지효는 최선을 다해 ‘정상적’으로 산다. 건축사사무소에 다니고 4년 사귄 남자친구가 있다. 다들 결혼할 거라 믿는 사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주문처럼 왼다. “홍지효는 상식적이다.” 조깅하며 영어 회화 공부를 한다. 건강식을 먹고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정상’에 집착하는 까닭은 그가 ‘비정상’이기 때문이다. 지효는 외계인을 본다. 그것도 현대 유니콘스 야구모자를 쓴 외계인이다. 그의 주변에선 전자기계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글리치 현상이 일어난다. 남자친구 이시국에게도 말할 수 없다. ‘미친×’ 소리 듣기 딱 좋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순간은 찾아온다. “이렇게 흘러가면 되는 건가?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가끔 이상한 게 보여도 무시하면서.” 동거하자는 남자친구와 지효의 부모님이 만나는 자리, 지효는 거대한 외계인을 피해 달리다 그 갈대밭에 다다른다. 지효 인생을 바꿔놓은 갈대밭이다. 중학생 때 날라리 친구 허보라와 그 갈대밭에서 만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 사흘이 깜깜하다. 지효는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로 자신을 설득해왔다. 친구 보라랑 본드를 불고 헛것을 봤다고 말이다. 그러나 지효의 무의식은 그게 아님을 안다. 이후 외계인들이 그 앞에 출몰하지 않나. 지효는 질문 앞에 섰다. 안전한 정상인으로 살 것인가? 비정상으로 튕겨나가더라도 자신이 될 것인가?
지효가 헤어지자고 한 날, 남자친구가 사라졌다. 지효는 남자친구의 행적을 쫓다 한 모임을 찾아간다. 그 모임의 이름은 ‘미확인비행물체 마이너 갤러리’. 이름부터 마이너다. 거기서 15년 만에 보라를 만난다. ‘달꾸녕티브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보라의 직업은 백수에 가깝다. 근손실이 올까봐 몸을 유리그릇처럼 아끼는 덩치 ‘값대위’, 적진에 숨어서도 엄마랑 큰 소리로 통화하는 철딱서니 없는 ‘동혁’, 고무총에 맞고 세상 뜰 것처럼 호들갑 떠는 ‘조필립’이 이 모임의 멤버다.
<글리치>는 익숙한 흥행 문법을 죄다 뒤집어버린다. 홍지효 역의 전여빈은 고3 같은 패션에 주근깨를 그대로 드러내고, 허보라 역의 나나는 쌍욕을 입에 달고 산다. 무술은커녕 팔굽혀펴기도 못할 몸이다. 이 여자들을 구해줄 남자 영웅은 없다. 이 시리즈에 나오는 남자들은 모두 걸림돌만 안 돼도 고마운 존재다.
줄담배를 피우며 외계인을 믿는 ‘미친×’들이 영웅이다. 비주류와 주류, 정상과 비정상을 뒤바꿔버리는 <글리치>는 땡글땡글한 외계인 눈으로 관객을 보며 묻는다. ‘정상’ 가면을 쓴 삶이 ‘비정상’ 아닌가?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이 드라마를 봤다면 팬이 되지 않았을까? 그는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이렇게 썼다. “잘 적응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정상적인 인간은 종종 신경증적인 인간보다 더 건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해 그 자신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건강한 개성과 자연스러움은 모두 상실될 것이다. …그에 반해 신경증적인 인간은 자기를 위한 싸움에서 결코 완전히 굴복하려 하지 않는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적응과 정상이 더 높은 가치로 여겨지는 까닭은 인간을 효용성의 잣대로 재기 때문이다. 개성과 자유의 관점으로 보면 정상이 비정상이고 비정상이 정상이 될 수 있다.
지효와 보라는 남자친구 시국을 하늘빛들림교회라는 사이비종교 집단이 납치해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신도들은 외계인이 구원해주리라 믿는다. 이들은 지효를 외계인을 불러올 호산나로 여긴다. 지효는 이 무리 속에 들어간다. 남자친구는 명분이고 그가 찾고 싶은 건 잃어버린 기억이다. 그 고리를 찾아야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외계인과 접촉했다고 믿는 점에서 지효와 이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정반대다. 이 신자들은 자아와 자유로부터 도망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이런 질문에서 시작했다. 근대가 열리며 신의 속박에서 벗어난 인간이 왜 자유와 존엄을 내던지고 파시즘의 권위에 복종했나. 자유와 존엄의 전제조건은 개별자로 서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회의와 고립감은 고통이다. 권위에 의존하면 여기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하늘빛들림교회 신도들이 외계인에게서 찾은 그 권위는 파시즘일 수도 직장일 수도 가족일 수도 돈일 수도 있다. 신도들이 벗어던지고 싶어 하는 자유와 존엄, 지효는 그걸 찾으려고 목숨을 건 여자다.
권위에 복속하지 않고, 개별성을 지키면서도 고립되지 않을 수 있나? 자유로우면서도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있나? 보라는 지효를 15살 때부터 믿었다. 혼자 밥 먹는 아이 지효가 학교 옥상에서 외계인을 불러오는 연습을 할 때, 보라는 그에게 다가간다. 겉장엔 수학이라고 써놓았지만 안은 외계인 관련 자료로 채운 노트를 보라에게 보여줄 때, 지효는 ‘미친×’으로 보일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한다. 보라가 그 노트를 받으며 우정은 시작됐다.
하늘빛들림교회에서 자신의 기억을 찾으리라 믿었던 지효가 절망하고 “나는 미친 사람들의 왕”이라며 통곡할 때 보라는 말한다. “여기는 아닌가보다. 계속 찾아보자.” 보라는 지효가 누구이건 그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응원한다. 질문으로 돌아가 자기를 지키며 연결되는 방법으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제시한다. “사랑은 어떤 ‘대상’을 긍정하려는 정열적인 욕구이다. …대상의 행복, 성장, 자유를 지향하는 적극적인 추구이며 내적인 관련성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보라는 지효를, 지효는 보라를, 그들은 자신을 사랑한다.
그래서 외계인이 있다는 걸까? 지효는 퍼즐을 풀었고 자아를 통합했다. 어떻게 아냐고? 지효에겐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꾸릴 힘이 생겼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자발성은 자기가 누군지 명료하게 알 때만 획득할 수 있다. 지효는 15년 동안 모호하게 불렀던 대상과의 관계를 정립한다. 새엄마를 엄마로 부른다. 부모님 집에서 독립한다. 선배가 그에게 외계인이 있냐고 묻자 지효는 과학자들이 전자칩을 심은 철갑상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사람들은 알고 싶었던 거예요. 네 마음대로 가봐. 자유롭게 살아봐.” 지효는 자기를 구원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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