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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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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인가 현실인가…‘장르’로 정착한 기후소설이 온다

15m 올라온 해수면, 눈사람을 모르는 아이들
해수면 상승하고, 식량이 고갈되고, 먼지 덮인 지구 배경의 기후소설
사고실험 바탕으로 ‘장르’로 정착… 인류가 가야 할 길 탐색
등록 2022-10-26 15:51 수정 2022-12-09 17:00
미국의 대표적인 기후소설가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뉴욕 2140>(New York 2140, 국내 미출간)에는 2140년 뉴욕의 맨해튼이 거대한 해상도시로 그려진다. 맨해튼의 풍광이 변한 건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무려 15.25m 상승했기 때문이다. Orbit

미국의 대표적인 기후소설가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뉴욕 2140>(New York 2140, 국내 미출간)에는 2140년 뉴욕의 맨해튼이 거대한 해상도시로 그려진다. 맨해튼의 풍광이 변한 건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무려 15.25m 상승했기 때문이다. Orbit

기후위기 시대엔 어떤 일도 일어난다. 2012년 미국 뉴욕을 강타한 초대형 허리케인 샌디의 진로는 기상 관측 사상 전례가 없는 형태였다. 샌디는 대서양에서 북상 중 서쪽으로 급격히 방향을 바꿔 미국 동부 연안을 강타했다. 100명 넘게 숨졌고 수백만 명이 이재민이 됐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선 2019년 9월부터 무려 5개월 동안 초대형 산불이 계속됐다. 남한 면적의 2.4배나 되는 숲이 불탔고 야생동물 5억 마리가 숨졌다. 남아시아의 방글라데시는 2020년, 파키스탄은 2022년에 국토의 3분의 1이 잠기는 홍수 피해를 입었다.

2022년 여름, 폭우로 한국 서울의 강남대로가 침수돼 차들이 물에 잠기고 반지하 집에서 사람이 숨지는 일이 일어나리라고 어느 누가 예상했을까. 우리 시대의 기상 현상은 ‘있을 법하지 않음’을 특징으로 한다. 있을 법하지 않고 전례 없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이 기후위기다. 기후위기 시대엔 문학의 고민도 깊어진다.

❶영국의 이언 매큐언이 쓴 <솔라>(2010년, 2018년 국내 출간)는 기후변화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한 물리학자가 주인공이다. 문학동네 제공

❶영국의 이언 매큐언이 쓴 <솔라>(2010년, 2018년 국내 출간)는 기후변화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한 물리학자가 주인공이다. 문학동네 제공

❷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리치가 쓴 <승산 없는 미래>(Odds Against Tomorrow, 2013년, 국내 미출간)는 가까운 미래 미국 뉴욕이 배경이다. 맨해튼의 빌딩들이 바닷물에 잠겨 있다. Picador USA

❷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리치가 쓴 <승산 없는 미래>(Odds Against Tomorrow, 2013년, 국내 미출간)는 가까운 미래 미국 뉴욕이 배경이다. 맨해튼의 빌딩들이 바닷물에 잠겨 있다. Picador USA

전례 없는 사건들 앞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을 문학에선 ‘개연성이 떨어지는 일’로 여긴다. 이런 소재는 주로 하위 장르문학의 것이지만, 이젠 현실에서 더 흔하다. 현실에 발 디뎌야 하는 문학이 피해갈 수 없다.

세계 3대 문학상인 부커상을 받은 인도 작가 아미타브 고시는 <대혼란의 시대>(2021년)에서 “어떤 주제의 시급성이 그것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기준이라면, 기후변화가 실제로 지구 미래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려하는 것은 전세계 작가들이 깊이 고민해볼 주요 관심사여야 한다”고 했다. 정통 문학도 기후위기를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는 고시의 충고를 따르는 작가들은 꽤 여러 해 전부터 나타났다. 최근엔 이런 작품을 묶어 기후소설(Climate Fiction, Cli-Fi)이라 부른다(영화는 이와 구분해 ‘Cli-Fi Movie’라 한다). 기후소설은 미국 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댄 블룸이 2011년 처음 별도 장르로 분류했다.

기후위기 담론이 그러하듯, 역사적으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한 영미권에서 이런 흐름이 시작됐다. 영국의 지넷 윈터슨이 쓴 <돌의 신들>(The Stone Gods, 2007년, 국내 미출간)은 기후변화로 고통받는, 지구와 흡사한 가상 행성 ‘오버스’(Orbus)를 다룬다. 역시 영국의 이언 매큐언이 쓴 <솔라>(2010년, 2018년 국내 출간)는 기후변화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한 물리학자가 주인공이다.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리치가 쓴 <승산 없는 미래>(Odds Against Tomorrow, 2013년, 국내 미출간)에선 가까운 미래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기후재난에 대비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계산하는 젊은 수학자가 등장한다. 이 수학자의 계산이 거의 끝나갈 무렵 뉴욕 맨해튼에 그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제로 덮쳐온다.

2021년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연설하기도 한 미국의 킴 스탠리 로빈슨은 최근 가장 손꼽히는 기후소설가다. 소설 <뉴욕 2140>(New York 2140, 2017년, 국내 미출간)에는 2140년 뉴욕의 맨해튼이 거대한 해상도시로 그려진다. 맨해튼의 풍광이 변한 건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무려 15.25m 상승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후소설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기후나 기상 이변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이전에도 있었다. <해저 2만리> <80일간의 세계일주> 등을 쓴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이 1889년에 펴낸 <위아래 없는>(Sans Dessus Dessous, 국내 미출간)을 보면, 지구 축의 기울기가 변하면서 3년 동안 급격한 기온 하락을 경험하는 20세기의 한 도시가 등장한다. 1939년에 나온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도 작품이 쓰인 시기 미국과 캐나다 중서부에서 일어난 ‘더스트 볼’이란 기상 재난을 배경으로 했다. 가뭄에 농토가 황폐화하고 모래바람 때문에 농사짓지 못하게 된 이들은 이재민이 돼 고향을 떠난다.

❸1940년 미국의 존 포드 감독이 영화로 만든 <분노의 포도> 포스터. 20세기 폭스사

❸1940년 미국의 존 포드 감독이 영화로 만든 <분노의 포도> 포스터. 20세기 폭스사

❹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 스탠리 큐브릭 프로덕션

❹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 스탠리 큐브릭 프로덕션

언젠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이들은 흔히 넓은 의미의 과학소설(SF)로 묶인다. 과학소설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사변’이다. 경험이 아닌, 생각만으로 사물이나 현실의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사고실험을 이른다. 이런 작업은 과학소설의 수식으로 잘못 붙곤 하는 ‘공상’이 아닌, 과학적 추론에 따른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과 함께 세계 3대 과학소설가로 꼽히며 미래학자이기도 한 아서 클라크(1917~2008)가 이 사고실험을 강조한 대표적인 예다. 그는 최초의 인공위성이 등장하기 10여 년 전인 1945년에 정지위성궤도(고도 3만6천㎞)에 위성을 쏘아올려 대륙 간 통신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이 지구 위성 중계망은 그로부터 19년 뒤에야 실현된다. 1968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만든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도 클라크의 동명 작품이 원작인데, 우주의 무중력 상태와 우주정거장 모습 등이 거의 정확히 구현돼 있다. 실제 영화가 개봉한 1년 뒤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의 우주비행사들이 클라크의 소설을 참고로 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클라크가 <낙원의 샘>(1979년)에서 묘사한 ‘우주 엘리베이터’는 정지위성궤도의 우주정거장과 지상을 케이블로 연결하는 것인데, 지금의 로켓보다 훨씬 효율적인 운송수단으로 묘사된다. 이 또한 언젠가 현실이 될지 모른다.

기후소설의 사고실험은 기후위기 상황을 구체적으로 예측하려는 시도이면서 기후위기를 막을 담론 확산의 매개가 된다. 부커상을 두 차례나 받은 캐나다의 대표적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과학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미친 아담’ 3부작도 그런 경우다. 3부작의 첫 편인 <오릭스와 크레이크>가 나온 해는 2003년이다. 소설엔 환경오염으로 자연의 상당 부분이 파괴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유전자 조작과 복제 생물을 이용해 식량 고갈을 해결하고 영생을 얻으려는 인류가 등장한다. 해수면이 상승한 바다엔 이전 시대 물건이 무질서하게 떠 있고, 유전자가 조작된 아이들은 한 번도 눈을 본 적이 없어 눈사람이 무엇인지 모른다. 주인공의 부모는 “어떤 곳에서든 운전할 수 있던 때,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 어느 곳이든 비행기로 여행할 수 있던 때, 진짜 불고기를 쓰던 햄버거 체인점과 핫도그 판매대를 기억하느냐”며 한탄한다. 애트우드는 이 3부작의 집필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기이한 시대에 살고 있다. 한편에서는 온갖 생물학, 로봇공학, 디지털 기술이 매 순간 발명과 발전을 거듭하며 한때 불가능이나 마법의 영역에 있었던 위업들을 실현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의 생물학적 터전을 숨 막히는 속도로 파괴하고 있다. ‘미친 아담’ 3부작은 여기서 몇 걸음 더 나간 후 탐색에 들어갔을 뿐이다.”(<타오르는 질문들>, 2022년)

❺부커상을 두 차례나 받은 캐나다의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과학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 그의 ‘미친 아담’ 3부작도 대표적인 기후소설로 꼽힌다. 민음사 제공

❺부커상을 두 차례나 받은 캐나다의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과학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 그의 ‘미친 아담’ 3부작도 대표적인 기후소설로 꼽힌다. 민음사 제공

모두의 책임을 묻는 소설

애트우드의 사고실험은 소설에 등장하는 신인류의 특질에서 더 분명해진다. 이들은 구인류(현재의 우리)처럼 지구를 파괴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유전적으로 설계됐다. 이들의 신체는 모두가 균등하게 아름다우며 자외선이 차단돼 옷이 필요 없다. 따라서 목화 재배, 양 사육, 유독성 염료가 필요하지 않아 산업혁명의 필요 자체가 없다. 이들은 가르랑거리는 소리로 자가 치유를 하고 채식한다. 축산이나 양계를 할 이유도 없다.

이와 유사한 미래 인류의 특질은 이보다 앞선 미국 작가 어슐러 르 귄(1929~2018)의 <어둠의 왼손>(1969년)에서도 등장한다. 외계 행성인 게센인들은 평소엔 성별이 없다가 한 달에 한 차례 발정기인 ‘케메르’ 때 성이 정해진다. 누구도 자신이 어떤 성별이 될지 알 수 없고 선택할 수 없다. 여성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임신하면 호르몬 분비가 출산과 수유기까지 계속된다. 누구나 ‘출산에 묶일’ 수 있기에 사회적 부담과 특권을 동등하게 나누어 가진다. 이들은 다툴지언정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며, 평화롭고 신중하며 인내심 있고 사려 깊다.

르 귄은 <어둠의 왼손>의 1976년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엄격한 외삽(맥락상 사고실험)을 이용한 SF의 결과물은 대부분이 로마클럽이 내린 결론과 비슷한 어딘가에 도달하게 된다. 즉, 인간 자유의 점진적인 소멸과 모든 지상 생물의 멸종 사이 어딘가에.” 지구의 유한성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로마클럽이 1972년 낸 보고서 <성장의 한계>는 세계 인구와 산업 생산이 한계에 이르러 인류 문명이 붕괴할 것으로 내다봤다. 애트우드나 르 귄의 기후소설 실험은 우리의 미래가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소설 형태로 구체화했다.

최근 영미권 기후소설은 단순히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정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로 번져간다. 미국 작가 존 레이먼드의 <부정>(Denial, 2022년, 국내 미출간)이 그런 예다. 2052년이 배경인 소설에서 인류는 재앙적 기후변화를 가까스로 막는데, 이보다 20년 앞선 2032년 ‘토론토 재판’을 통해 기후변화에 책임 있는 주요 인물을 ‘생명에 반하는 범죄’로 유죄 판결한다. ‘화석연료 재벌’로 살다 20년째 숨어 사는 소설 속 등장인물은 이렇게 호소한다. “지구상에 죄가 없는 자가 어디 있나. 이 죄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나.”

(왼쪽부터) 로마클럽이 1972년 낸 보고서 <성장의 한계> 초판본 표지. 김기창의 소설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2021년). 김초엽의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2021년). 로마클럽 누리집 갈무리. 민음사 제공. 자이언트북스 제공

(왼쪽부터) 로마클럽이 1972년 낸 보고서 <성장의 한계> 초판본 표지. 김기창의 소설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2021년). 김초엽의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2021년). 로마클럽 누리집 갈무리. 민음사 제공. 자이언트북스 제공

실천과 참여를 고민할 때

기후소설의 흐름은 국내에서도 나타났다. 소설가 김기창은 2021년 단편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에 본격적인 기후소설을 표방하는 작품을 냈다. 소설 속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어부로 사는 소년이 산호초의 죽음, 어종 변화로 생존이 어려워지자 결국 살인자로 둔갑하는 비극이 그려진다. 거주불능 상태가 된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류가 건설한 투명 태양열 패널로 둘러싼 ‘돔시티’도 등장하는데, 소수가 그 도시 안에 살고 더 많은 이가 그 밖에 머문다. 한국 과학소설계의 총아로 떠오른 김초엽도 노출되면 죽음에 이르는 먼지 ‘더스트’로 멸종한 미래 인류를 다룬 <지구 끝의 온실>을 2021년 펴냈다. 국내에서도 기후위기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조만간 본격적으로 나올 전망이다.

문예지 <월간문학>은 2022년 10월호에서 ‘문학과 재난대응’을 특별기획으로 다뤘다. 이 주제로 발표한 이들은 “감염병과 기후변화라는 엄중한 상황에 맞닥뜨린 한국문학이 실천과 참여, 상상력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설가 강호삼은 관련 글에서 “쥘 베른은 <달세계 여행> <해저 2만리> 같은 과학소설을 발표해 과학자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오늘날 우주여행과 인공위성 발달을 실현케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며 “당면한 기후변화와 전 지구적으로 예견되는 재난에 있어 우리 문학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창출해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함께 고민해봐야 할 때”라고 당부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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