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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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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울거나 죽고싶어지는 마음

여성작가들의 문학 텍스트로, 젠더화된 감정 분석한 <여성의 수치심>
등록 2022-07-02 16:06 수정 2022-07-03 02:39

가끔 편의점에서 생리대를 산다. 유독 이때만큼은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아도 점원들이 으레 ‘검은색’ 비닐봉투를 꺼내 생리대를 조심스럽게 담아준다. 마치 자동화된 절차인 것처럼. 일회용 봉투를 쓸 경우 내야 하는 환경부담금까지 면제해주는 호의(?)를 받은 적도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생리대를 구매하는 행위, 더 나아가 여성의 월경 자체가 ‘가리고 숨겨야 할 행위’라는 명제가 규율처럼 몸의 안팎에 새겨지게 한다. 이렇게 여성의 몸은 “그저 월경을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한 존재, 즉 수치심을 부여받은 존재가 된다. 수치심은 비단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뿐 아니라 가족과 사회가 규정한 여성성, 가부장제, 성차별, 인종차별 등과도 연결돼 있다. 역자 손희정이 짚었듯, 수치심은 개인이 느끼는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과 권력관계를 구성하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감정”이다. 따라서 “수치심을 둘러싼 복잡한 맥락과 역할을 해부”할 필요성이 존재한다.

미국 영문학자 2명(에리카 L. 존슨·퍼트리샤 모런)이 쓴 <여성의 수치심>(손희정·김하현 옮김, 글항아리 펴냄)은 20세기 세계 여성 작가들의 문학 텍스트를 ‘수치심’이란 주제로 분석한 열다섯 편의 글을 엮었다. 수치심이 인간 보편의 정동임에도 왜 여성의 몸, 여성이 타자와 맺는 관계에서 핵심 정동으로 작용하는지를 신체·가족·사회라는 세 가지 분석틀로 살펴본다.

여성이 남성보다 수치심을 더 잘 느낀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로 확인된다. 여성과 남성은 수치심을 각기 다르게 경험하고 반응하기도 한다. 소설가 살만 루슈디가 묘사했듯 “여자들에게는 울거나 죽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지만 남자들에겐 “이성을 잃고 날뛰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젠더화’된 수치심이 여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책은 문학 텍스트 비교연구를 통해 살펴본다.

연구와 비교 대상은 아니 에르노, 프란츠 파농, 옥타비아 버틀러, 마거릿 애트우드, 시몬 베유 작품을 포함해 수치심을 다룬 과학소설부터 철학적 텍스트까지 광범위하다. 이를 통해 ‘여성’이란 젠더 자체뿐 아니라 동성애, 장애, 역사적 트라우마, 인종차별, 국가에 의한 여성 신체 착취, 여성성을 모욕하는 민족과 종교 등 다양한 이슈와 수치심의 연결고리를 분석한다. 이처럼 여러 텍스트를 통해 다층적인 차원에서 수치심을 살펴본 것이 책의 강점이다.

‘미투’ 운동을 겪은 뒤에도 사회는 여전히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마땅히 부끄러울 것’을 요구한다. ‘성적 수치심’이란 용어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피해자다움’의 틀이 계속 강고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책은 수치심이 어떻게 여성을 옭아매는지를 짚어내면서 동시에 수치심의 영향력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대항담론을 고민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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