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3월9일 JTBC의 대통령선거 개표방송 ‘2022 우리의 선택-비전 어게인’에서는 고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상이 인공지능(AI)과 증강현실(AR)로 복원된 ‘디지털 휴먼’으로 스튜디오에 출현했다. JTBC 뉴스 갈무리

2022년 3월9일 JTBC의 대통령선거 개표방송 ‘2022 우리의 선택-비전 어게인’에서는 고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상이 인공지능(AI)과 증강현실(AR)로 복원된 ‘디지털 휴먼’으로 스튜디오에 출현했다. JTBC 뉴스 갈무리
제20대 대통령선거일인 2022년 3월9일 늦은 오후, 개표 결과를 기다리며 각 방송사의 전략이나 구경해보려고 채널을 돌리던 중이었다. 텅 빈 수사와 요란한 이미지들을 대강 훑어보다 어느 방송사가 연출한, 두 눈을 의심할 만한 광경에 시선이 멈춰버렸다.
스튜디오 무대 위에는 앵커의 호명에 “인공지능(AI)과 증강현실(AR) 기술”로 복원된 박정희가 불려나와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도 차례로 유사한 방식으로 등장해 앵커의 물음에 답했다. 이 형상들이 전직 대통령과 유사한 체형의 모델에 실제 얼굴을 합성해 360° 촬영으로 구현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뒤이어 패널들이 굳이 재론할 필요도 없는 이들의 성취와 한계를 피상적으로 짚었다. 수감 전력이 있거나 수감 중인 전직 대통령은 ‘디지털 휴먼’군에 끼지 못했고 이 안전한 선택에는 별다른 언급이 덧붙여지지 않았다. 방송사에 따르면 이 기획의 취지는 전직 대통령을 무대에 세워 그들의 “공과 과”를 되새기며 미래의 대통령을 맞이하자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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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휴먼으로 복원한 노무현 전 대통령 형상. JTBC 뉴스 갈무리
기획은 더없이 허술하고 편의적으로 단순했지만, 전직 대통령들의 형상이 스튜디오에 출현할 때마다 나는 소름이 돋았다. 이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물론 그 형상이 가짜라는 당연한 사실을 모르지 않았고, 최첨단 기술력이 극복하지 못한 어색한 동작과 표정의 면면도 종종 느꼈다. 그러니 그 오싹함이 디지털 휴먼이 실물에 매우 근접해 보인다는 관점에서 비롯됐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 형상을 대면하는 일의 거북함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전직 대통령들이 자기 죽음을 망각한 채 너무도 평온한 상태로 다시 나타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우리에게 말한다는 인상에서 기인했다. 달리 말해, 방송이 화려한 기술력으로 되살린 그들의 육체적 환영에는 죽음이라는 전제 혹은 사건의 흔적과 파장이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디지털 휴먼 제작 과정을 논할 능력은 없어도 죽음의 사실을 회피하는 이 이상한 부활에 반문하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앵커가 무대로 전직 대통령을 부른 뒤 ‘어떤 세상을 꿈꿨는지’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 등 물음을 던지자 그들이 대답했다. 그 내용과 목소리를 오래전 그들이 남긴 연설과 대담 등에서 따왔다는 사실이 화면 위 자막으로 제시됐다. 화면상으로 질문자와 답변자는 같은 시공간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연출됐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앵커의 질문은 현재에 있지만, 전직 대통령의 말은 이미 과거에 언급된 것이다. 디지털로 복원한 그들의 가짜 육체는 현재의 무대에 등장하지만, 거기 덧씌운 그들의 진짜 목소리는 과거에 속한다. 그 음성은 이미 오래전 육체를 잃은 목소리다.
화면에서 우리가 본 대화는 실재와 허구,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 질의응답 형식 안에서 통합한 결과다. 하지만 인터뷰란 무릇 질문과 대답이 일회적으로 마주하는 데서 현재성을 획득한다면, 여기서 우리가 본 것은 인터뷰가 아니다. 그 시간, 그 스튜디오에서 혹은 스튜디오를 향해 노무현이 하지 않은 대답을, 연출자가 그의 디지털 육체에 넣은 대사를, 그가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연출자의 선택으로 구성된 허구의 대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조작이다.

MBC 장면들. MBC 영상 갈무리
서로를 향하지 않는 대화 내용의 구체성 없는 안일함은 차치하고라도 시간성을 무시한 짜깁기 형식을 저널리즘의 태도로 수용하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이 방송은 자신이 불러낸 육체적 환영의 시간이 그들의 죽음 이후에 존재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의아할 정도로 외면한다. 요컨대 뉴스에 나오는 김대중의 사진이나 기록 영상을 보며 그 순간이 과거의 시공간에 속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사진과 영상은 그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즉 그의 부재를 지시한다. 부재를 환기하므로 그를 기억의 대상으로 만든다. 더 이상 그에게 직접 물을 수 없고 들을 수 없을 때 그와의 단절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 비로소 기억의 활동이 시작된다.
이 방송의 디지털 이미지와 그를 대하는 앵커의 자세는 기억이 활동할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의 간극과 거리를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한다. 반복해서 말했듯 방송이 복원한 육체적 환영의 이미지와 언어는 그들의 죽음을 둘러싼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층위의 질문과 개인적 차원의 맥락 모두를 증발시킨다. 남는 건 미화돼 추상화된 단면이다. 디지털 휴먼 박정희의 당당한 자태와 표정, 노무현의 온화한 얼굴과 음성은 현재에 아무런 발언도 하지 못하는 초시간적 물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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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가 디지털 휴먼을 향해 제20대 대통령 후보들에게 건네고 싶은 조언을 묻는 대목은 그런 의미에서 낯 뜨거운 실소를 자아내면서도 이 기획의 민낯을 보여준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이 죽음 이후 이 물음에 어떤 답을 내놓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알 수 없으므로 누구도 직접 그들의 자리에서 말해서는 안 된다. 전직 대통령들의 과거 음성을 발췌하는 과정에서 유족의 동의를 얻었다는 앵커의 코멘트는 이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물론 이 방송이 디지털 휴먼을 앞세워 사실적인 상황을 연기했을 뿐이며 연출자나 시청자 모두 이 기획의 허구성을 인지하므로 그런 비판은 과하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죽음을 망각한 디지털 유령을 다른 곳도 아닌 뉴스룸 한가운데로 불러들여 그 죽음을 모른 체하며 대화하는 이 조악한 허구성은 무엇에 복무하는가.

MBC 장면들. MBC 영상 갈무리
이 기획이 안긴 불편함만큼은 아니지만, 이전에도 죽은 이를 디지털 휴먼으로 재현한 몇몇 방송을 보며 당혹감을 느낀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디지털 휴먼의 면모 때문이 아니라, 가상현실(VR) 기술을 통해 죽은 가족과 재회한 사람들의 모습 때문이다. 그들은 죽은 가족의 외모, 행동, 목소리, 버릇 등을 살려낸 캐릭터와 마주하며 그들이 부활한 듯 이야기를 나누고 눈물을 쏟았다. 제3자의 눈에 VR 기술이 살려낸 죽은 이의 생전 모습은 실재와 동떨어진 캐릭터 그래픽에 불과하고 특수장비를 쓰고 그걸 쓰다듬는 유족의 모습은 어색하지만, 상관없다. 여기서 우리가 기다리는 건 원본의 완벽한 재현이 아니다. 우리는 어차피 원본을 잘 알지 못한다. 대신 죽은 이의 환영과 마침내 재회한 남은 가족의 감정과 서사를 기대한다. 디지털로 살아난 ‘너’의 목소리는 ‘너’에게서 나온 게 아니라 그 기대에 부합해 생성된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사랑하는 ‘너’의 죽음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한 사건, 그에 대한 내밀한 기억과 애도 행위를 디지털 휴먼의 세계를 경유해 보편적 멜로드라마 서사로 전환하고 소비한다. 이 다큐멘터리의 눈물에 어쩔 수 없이 동화되면서도 그 눈물이 외설적으로 타인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한 결과로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이건 만든 이의 진심이나 가족을 그리워하는 이의 간절함과는 별개 문제다. 이 다큐멘터리는 <너를 만났다>(MBC)라는 제목처럼 디지털 휴먼을 통해 유족만이 아니라 우리를 그 문장의 주체로 소환하지만, 죽음과 관련해서라면 그건 그리 손쉬운 문제가 아니다.
유사한 체험은 어느 음악 프로그램에서도 반복됐다. 세상을 떠난 가수가 AI 기술이 복원한 음성과 얼굴로 무대 위에서 열창하는 모습을 보는 동안 편한 마음으로 즐기기는 어려웠다. 이 방송은 과거 음성을 디지털 휴먼에 입히는 데서 나아가 그의 목소리를 분석하고 다시 취합해 미발표된 곡을 처음으로 부르게 했다. 그 순간이 안긴 감정은 솔직히 감동보다는 섬뜩함에 가까웠다. 그의 죽음을 떠올리며 그가 녹음했던 앨범 속 노래를 들을 때와도, 그의 생전 영상을 띄워두고 동료들이 그의 노래를 부르며 추모하는 공연을 볼 때와도 다른 느낌이었다. 정작 죽은 이는 완전히 배제된 채 산 자의 욕망에 의해 극적으로 고양되고 되살려진 과도한 무언가를 듣고 보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노래를 부르는 건 누구이며 이 노래의 시간은 어디에 있다고 해야 할까. 유려한 선율에 휘감긴 디지털 입자들 앞에서 난감해질 때마다 화면에는 그의 가족들이 눈물을 참으며 그의 환영을 응시하는 모습이 교차됐다. 앞선 다큐멘터리와 마찬가지로 이 음악방송은 복원의 결과물보다는 복원의 행위가 상기하는 상실의 서사에서 감정을 유도한다.

티빙 오리지널 <얼라이브>에서 디지털 휴먼으로 복원한 가수 유재하 형상. 티빙 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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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례가 고안한 디지털 휴먼의 세계에는 죽음 이후라는 자각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비록 죽음 이후의 시간마저 쇼비즈니스에 동원했다는 비판을 피할 길은 없겠지만, ‘너’의 죽음을 돌이킬 수 없다는 상실과 고통의 감각이 이 인위적 세계의 도입을 촉구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하게 복원해도, 아니 그렇게 복원할수록 죽은 자의 부재가 던지는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은 현실에 더 깊게 파인다.
전직 대통령의 디지털 형상으로 꾸려진 무대에서는 그 감각조차 찾을 수 없다. 뉴스에 초대된 디지털 휴먼은 역사와 죽음에 초탈한 상태로 그들이 연루된 한국 근현대사의 기억, 갈등과 상처의 지대, 여전히 진행 중인 문제를 삭제한다. 새로운 대통령을 공표하는 자리에 전직 대통령의 유령을 굳이 끌어와야 했다면, 그 유령들이 속 편한 덕담이나 하는 디지털 허수아비가 아니라 역대 최악으로 평가된 후보들과 필연적으로 얽히고 연결된 현재의 질문임을 상기해야 했다. 그런 문제의식 없이 저 개표방송이 과시한 야단스러운 디지털 설정과 거기에 더해진 상투적이고 무감한 언어의 정체는 그렇다면 무엇이었을까. ‘돈’과의 대화. 공허하게도 결국 그것이었다.
남다은 영화평론가·<필로>(FILO)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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