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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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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이 머리’를 먹는 사람들?

낡은 언어를 수선하는 법, 시대에 맞지 않는 언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등록 2022-02-24 17:58 수정 2022-02-25 02:24
예전에 출간된 번역서들을 읽기 위해 즐겨 찾는 동네 시립도서관.

예전에 출간된 번역서들을 읽기 위해 즐겨 찾는 동네 시립도서관.

일제강점기 때 한글을 어렵게 배우셨던 할머니는 고향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를 쓸 때면 방으로 나를 조용히 불러 당신의 글을 고쳐달라고 하셨다. 나는 아랫목에 할머니와 나란히 누워 편지를 다시 썼다. 학교에서 배운 바르고 고운 말로, 틀린 글자에는 빨간 연필로 줄을 그으면서. “할머니, 다마가 아니라 전구, 양놈이 아니라 서양인, 계집년이 아니라 여자아이야.” 내가 조목조목 따지고 들면, 할머니는 고약하다고 화내시면서도 틀린 말은 모두 바른말로 고쳐달라고 하셨다.

50년 전, 100년 전의 문학을 번역할 때면, 예전에 할머니에게 그랬듯이 작가의 방문을 두드려 따져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선생님, 이런 단어는 인종을 비하하는 표현 같은데요, 고쳐주실 수 없을까요?”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영원히 잠든 이들을 무슨 수로 깨우겠 는가.

교정지를 받고 빨간 줄이 그어진 단어 혹은 문장을 보며 고민하던 순간이 있었다. 옳지 않은 표현이라는 것을 편집자도 알고 나도 알지만, 세상을 떠난 작가는 답이 없으니까. 장애인, 여성, 소수자, 특정 인종을 향한 거친 시선과 표현을 발견할 때면 나 역시 편집자만큼이나 빨간 펜으로 줄을 긋고 고쳐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내게는 지켜야 할 역자의 윤리가 있지 않겠는가. 역자는 원문을 재편집할 수 없다, 역사를 다시 쓸 수도 없다. 귀족과 천민이 있었고, 흑인을 검둥이라 불렀고, 장애를 저주라 여겼으며, 남성이 지배자였던 세상은 지울 수 없는 우리의 과거이고, 그 흔적은 문학 안에 여실히 남아 있다. 어디 문학뿐이겠는가? 빨간 펜을 들고 찾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언어 안에 숨은 차별과 폭력과 무지가 여전히 넘쳐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에는 ‘검둥이 머리’라 불리는 초콜릿케이크가 있었다. 검둥이 머리라니…, 실소가 터져 나오지만, 그 케이크의 명칭이 소비자의 요구로 ‘초콜릿 머랭’으로 바뀐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역자에게는 작품 속 초콜릿케이크의 이름을 바꿀 권리가 있을까? 내게는 여전히 어려운 질문이다. 20세기 초, 프랑스 백인 남성 작가가 쓴 글을 21세기에 사는 내가 여성의 감수성으로 고쳐 옮기는 것이 좋은 번역인가를 묻는 말에도 분명하게 대답할 자신이 없다. 그러나 이런 우유부단한 역자인 나도 독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달라진다. 독자로서 나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문제의 뿌리를 향해 매서운 눈을 뜰 수 있다,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빨간 줄을 그을 수 있다.

고전은 가치 있는 문학이고, 저명한 작가의 사상은 여전히 반짝이나 정답은 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답이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 진리라 믿었던 걸 의심하고, 질문하고, 고치는 과정에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내게 그 오래된 책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물음표를 찍고, 틀린 것에 줄을 긋고, 고쳐 쓰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러니 역자로서 내가 할 일은 독자에게 빨간 펜을 건네는 것이 아니겠는가.

책 속에 숨은 낡은 시선과 죽은 언어가 독자들의 빨간 펜을 만나기를 희망한다. 바뀌어야 할 단어와 문장에 빨간 줄이 그어진 교정지를 기다린다. 나는 그것이 지금부터 우리가 써야 할 문학의 초고라 믿는다.

글·사진 신유진 번역가

*책의 일: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소개합니다. 직업군별로 4회분 원고를 보냅니다. 3주 간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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