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 장르물의 폭력성을 논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대개는 폭력적인 이미지의 수위가 기준이 되지만, 용인되거나 될 수 없는 범주의 경계는 모호하고 자의적이기도 하다. 폭력이 그저 파편적인 이미지로 전시되는지, 아니면 서사의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 설명되는지를 쟁점으로 삼은 경우에도 미진함은 남는다. 솔직히 말해보자. 우리가 상업 장르물에서 느끼는 쾌감은 폭력 스펙터클이 구구절절한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잉여 이미지로 운동할 때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다.
다소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생각이지만, 그 시각적 쾌감은 의미를 담지하지 않을수록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요컨대 <킹덤> 시즌2에서 안현(허준호)이 머리를 풀어헤친 좀비가 되어 깃발을 몸에 꽂은 채, 화살을 맞으면서도 화면 전경으로 거침없이 달려오던 순간은 지금 떠올려도 짜릿하기만 하다. <킹덤> 시즌2 3화의 도입부에서 땅에 떨어진 좀비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 목이 잘리기 전 혈투가 벌어지던 현장으로 천천히 되돌아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더없이 잔혹한 두 대목에서 내가 즐긴 건 의미도, 현실과의 연결고리도, 심지어 서사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와는 무관한, 오직 허구의 상상력과 활동력만으로 극대화된 폭력의 스펙터클이었다.
그러니 문제는 장르적 쾌감을 위해 고안되고 동원된 폭력 이미지 자체가 아니다. 불편한 건 따로 있다. 이미지의 폭력성을 변호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해 거기에 섣불리 현실의 맥락이나 의미를 접합하려는 시도가 종종 내겐 그렇게 느껴진다. 폭력 이미지가 아무리 고차원적인 의도로 설계됐다고 해도 그것이 창작자에게나 관람자에게 기본적으로 시각적 쾌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대신, 이미지를 통해 현실의 폭력성을 환기한다는 미명만 내세운 작품들은 미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현실의 폭력성을 폭로하기 위해 폭력 이미지의 수위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는 감독의 말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현실의 폭력성을 ‘모방’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정직하게 들린다) 그렇게 재현된 장면들이 서사 안에서 필연적인 기능을 하거나, 경이로운 미적 활력을 도모한 사례를 본 기억은 없다. 말초적으로 자극적이지만, 더없이 무기력하고 무딘 폭력 이미지. 그 이미지는 이미 현실에서 숱하게 보고 겪은 순간을 그저 시각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그건 폭로가 아니다.
지난 설 연휴, 온종일 넷플릭스 시리즈물 <지금 우리 학교는>을 보는 데 성공했다. 평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드라마를 몰아보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 편이어서 12부작을 하루에 정주행한 경험은 내게 좀 예외적인 일이었다. 마지막 회가 끝나고서야 그 이유가 1부의 한 장면 때문이라는 사실을 새삼 곱씹었다. 이 드라마를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바로 그 장면, 윤귀남(유인수) 무리가 민은지(오혜수)에게 옷을 벗으라고 강요하며 동영상을 찍는 장면 말이다. 이 장면의 직접적인 재현 방식은 물론 껄끄러웠다. 그런데 민은지가 이수혁(로몬)의 도움을 거절하고 다시 윤귀남 무리 앞으로 돌아가 그들의 명령에 응하는 대목에서 남학생들의 가학성보다 당혹스러운 건 재차 강조되는 민은지의 수동적인 태도였다.
다른 장면들의 폭력성이 아무리 현실의 사건들을 소환해도 여전히 장르의 울타리로 보호되며 쾌감의 영역 안에서 활동한다면, 이 장면에는 어떤 울타리도 출구도 마련돼 있지 않다. 그저 철저히 대상화된 여성의 신체와 어떤 의지도 남아 있지 않은 그의 표정과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카메라의 시선만이 선정적으로 새겨 있다. 이 경직된 선정성을 장르의 화법 안에서 대체 어떤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것일까. 이 무모한 장면의 기능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우리 학교는>에 대한 사적인 관람기는 그 의문에서 시작됐다.
이수혁은 민은지를 그대로 둔 채 폭력의 현장을 떠나고 마치 어떤 일도 보지 못한 듯, 누구에게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 순간부터 내 관심은 이를 악물며 폭력을 참아내던 민은지 장면이 얼마나 날카로운 칼이 되어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지에 쏠렸다. 다른 인물들의 화려하고 절박한 액션 시퀀스에 시선을 빼앗길 때도 그 궁금증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가 영화 <킬 빌>의 우마 서먼처럼 격렬하고 냉혹한 복수의 화신이 되어 앞 장면의 무력감과 경직된 선정성을 산산조각내길, 절대 악이 돼도 상관없으니 윤귀남 무리를 잔인하게 평정해버리길, 민은지의 복수심이 <지금 우리 학교는>을 추동하는 주요한 힘이 되길, 복수의 활극이 무참한 생기로 펄떡이길…. 돌이켜보면 원작 웹툰을 보지 않은 관람자의 다소 엉뚱한 바람이었지만, 그런 기대와 호기심을 붙들고 12부작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 바람에 응답하는 장면이 기다리고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는 슬픈 사실이 이 드라마를 완주하게 한 셈이다.
민은지를 다시 마주한 건 얼마 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학교 옥상에 오른 장면에서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으려고 올라간 그곳이 목숨을 부지할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된다. 그가 내려다본 학교 운동장은 때마침 창궐한 좀비 떼로 아수라장이다. 그의 말대로 그에게 폭력을 가한 남자 패거리나 이에 무심한 선생들이나 서로 물어뜯는 좀비들이나 다 같은 지옥의 구성원일 뿐이므로, 그가 좀비들이 닿을 수 없는 장소에 있다고 해서 이를 뒤늦게 찾아온 행운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민은지가 옥상에 있다는 사실에서 안도감이 아니라 이상한 갑갑함이 느껴진 건 그 때문이다. 주요 인물들이 학교 안에서 목숨 걸고 좀비와 추격전을 벌이며 각종 물리적·심리적 한계를 돌파해갈 때, 그러니까 각자에게 배당된 몫을 완수하며 장르의 방향을 적극적으로 추동하는 동안, 민은지는 또다시 그 흐름에서 배제됐다. 앞선 장면에서 그가 남자들이 찍은 동영상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면, 이 장면에서는 옥상에 갇혀 주요 인물들의 서사에 합류하지 못한다. 그는 왜 다른 인물들처럼 장르적 쾌감을 양산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결국 그를 옥상으로 올려보낸 건 그에게 어떤 행동력도 부여하지 않기 위해서일까.
좀비가 되어서든 마녀가 되어서든, 윤귀남 무리를 통쾌하게 처단해야 할 민은지는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지금 우리 학교는>이 민은지의 존재감을 잊은 듯, 몇 화에 걸쳐 다른 인물들의 우여곡절에만 초점을 맞추며 흘러가는 동안 나는 애가 탔다. 그사이 윤귀남은 더욱 악랄한 불사신으로 변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좀비에게 물렸지만, 다른 좀비들과 달리 죽지 않고 타인을 감염시킬 수 있는 ‘이모탈’이 됐다. 이제 그에게 이곳은 피가 낭자한 지옥이 아니라 무소불위의 신체 능력을 휘두를 수 있는 폭력의 “천국”과 다름없다. 이 천국에서 그의 유일한 목적은 자신을 공격한 청산(윤찬영)을 찾아 복수하는 일이다. 그는 이 세계의 프로타고니스트(중심인물) 청산을 맹목적인 목표로 삼음으로써 그와 대립각을 이루며 스스로 악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이 판에서 주인공으로 살아남는 법을 간교하고도 영리하게 파악하는 자다. 그가 끝내 청산을 감염시키고 함께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장면은 서사상으로는 잠정적으로나마 악이 소멸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윤귀남은 폭력의 대가를 치른 패배자가 아니라 주인공 자리를 포기하지 않으며 마지막까지 장르의 스펙터클을 주관하는 데 성공한 존재처럼 보인다.
민은지는 어떠한가. 그가 마침내 옥상에서 벗어나 좀비 지옥으로 뛰어드는 시점은 자신의 동영상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예약 업로드된 상태임을 알게 된 직후다. 민은지는 윤귀남의 휴대전화를 찾으러 교무실로 향하는 길에 좀비 떼의 습격을 받지만, 어쩐 일인지 그도 ‘이모탈’이 된다. 마침내 그에게도 절대적인 힘이 생긴 것이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인물 중 오직 그만이 윤귀남의 진정한 맞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 학교는>은 그를 윤귀남과 대면하게 할 생각이 없다.
민은지가 피투성이로 교무실에 들어가 휴대전화들을 미친 듯이 부수고 불 지르는 장면에서는 액션의 쾌감이 아니라 여전히 수세적인 광기의 이미지만 전시된다. 그가 당직실에 들어가 금붕어를 허겁지겁 씹어 먹는 장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곳에서 발견한 국어 교사를 물어뜯는 대목에 과거 그에게 무시당하던 장면이 플래시백(과거 회상)으로 삽입돼도 별반 통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작 복수해야 할 대상은 따로 두고 엉뚱한 데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는 인상 때문이다. 그가 수용소에서 김철수(안지호)를 공격하는 순간에도 그런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민은지가 표상하는 광기의 선정적인 이미지는 적확한 목표를 겨냥해 외재적으로 폭발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자기 내부를 파괴적으로 갉아먹는 데 그친다. 그가 자주 읊조리거나 포효하듯, 그는 그저 배가 고플 뿐이다.
감독은 민은지의 장면들을 통해 현실 속 피해자의 고통을 형상화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피해자의 고통을 즉각적인 이미지로 전환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고통의 시각화가 ‘고통스러움’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동어반복에는 어떤 사유의 과정도 없다), 그 고통이 어째서 수동적인 양태로만 재현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드라마 후반, 군인들은 격리실에 수용된 민은지의 광기 어린 상태를 투명한 벽을 사이에 두고 구경하는데, 그 시선은 이 드라마가 그를 대하는 방식과 닮았다. 마지막 회에서 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고 그가 갇혔던 격리실은 피로 얼룩진 채 텅 비어 있다. 그는 결국 어떤 언어도, 활동성도 부여받지 못한 상태로 허무하게 증발해버린 것이다.
피해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인과응보·이타심이 드라마를 이루는 두 개의 세계관은 인과응보와 이타심이다. 친구를 의심하거나 배신한 인물, 폭력을 행한 인물은 어떤 식으로든 처벌받으며 제거된다. 목숨을 던져 좀비의 먹잇감이 된 인물의 희생으로 남은 이들은 학교 바깥쪽으로 한 발자국 더 내딛게 된다. 그러한 장르의 규범(질서) 안에서 <지금 우리 학교는>의 서사와 쾌감은 추진된다. 그러나 윤귀남에게만은 그 규범을 피해서도 생존할 예외적 힘과 과도한 면죄부가 허용되고 민은지에게는 다른 이들처럼 규범을 수행할 정당한 기회가 아예 허락되지 않는다.
‘고통에 신음하는 여학생’의 이미지에만 심취하느라 그가 주도하는 쾌감의 스펙터클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다은 영화평론가·<필로>(FILO)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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