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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에서 양식으로, 식탁이 달라졌어요

영월을 찾아온 열흘 요리강습, 요리도구가 요리하는 것 같아 채칼·궁중팬·금빛 시루 등을 샀다네
등록 2021-11-20 08:42 수정 2021-11-21 23:52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영월 마을회관에서 무료로 요리강습을 한다고 누구나 관심 있는 사람은 다 오라고 합니다. 오전 10시까지 옆의 사람도 많이 데리고 오랍니다. 여자들은 때만 되면 뭘 해먹나 고민이 많던 차에 잘됐다고 너도나도 많이 몰려갔습니다. 나는 가게 일이 바쁘니 그냥 잠깐 보고 올 생각으로 갔습니다.

잘생긴 채칼로 예쁜 볼에다 쓱쓱

마을회관에 들어서자 한쪽 옆으로 많은 물건이 쌓여 있었습니다. 40대 중년 남녀가 자기네는 서울에서 온 요리강사 부부라고 소개했습니다. 여름이면 먹거리가 한창 없을 때여서 고생하시는 주부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이곳까지 요리강습을 왔노라고 했습니다. 흰 가운을 입은 4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요리강사 손수련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남자는 자신은 강사님의 남편이자 강사님의 보조로 미스터 김으로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남자가 여자 보조라는 게 좀 낯설었습니다.

재료는 다 준비돼 있었습니다. 석유풍로 세 개를 놓고 요리를 시작했습니다. 모든 요리 도구는 특이하고 예뻐 보였습니다. 채칼로 아주 예쁜 볼에다 오이를 쓱쓱 채 쳤습니다. 당근도 잘생긴 채칼로 쓱쓱 채 쳤습니다. 마요네즈에 케첩을 조금 섞어서 채칼로 채 친 채소에 섞어줬습니다. 보조인 남편은 식빵 가장자리를 칼로 잘라 준비했습니다. 네모난 하얀 식빵에 준비한 채소를 넣고 빗금으로 잘라 삼각형을 만들어 구경꾼에게 한 쪽씩 돌렸습니다. 아주 향긋하고 맛있었습니다. 집에서 찐빵만 만들어 먹다가 너무나도 새로운 맛에 놀랐습니다.

두 번째 요리는 영양식을 한다고 닭 한 마리를 금빛 나는 시루에 쪘습니다. 찐 닭을 오목하게 생긴 궁중팬에 버터를 녹여서 바삭하게 구워냈습니다. 버터 때문인지 맨날 먹던 닭이 무슨 외국 요리처럼 느껴졌습니다. 요리사 부부는 요리할 때마다 아낌없이 음식을 나눠줬습니다. 강사님은 손으로 요리하면서 입으로는 유창하게 설명하고 우스갯소리를 잘해서 연신 폭소가 터졌습니다.

첫날 요리강습에서 채칼을 샀습니다. 집에도 채칼이 있었지만 이건 얇고 납작하게 써는 날도 있고 아주 가늘게 채 치는 날도 있어 바꿔가면서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날 오후 집에 돌아가 아이들에게 낮에 요리강습에서 배운 샌드위치를 간식으로 만들어 먹였습니다. 쥐고 먹다가 흐를까봐 식빵 한쪽을 가장자리도 도려내지 않고 반으로 접어 속재료를 넣어서 줬습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아주 좋아했습니다.

두 손을 포개어 잡고 “이만하게 만들어주세요”

요리강습은 하루에 두 번씩 열흘 동안이나 계속됐습니다. 바쁜 사람들을 위해 오전/오후 같은 요리를 해서 다행이었습니다. 나는 매일 참석할 수는 없고 틈나는 대로 잠깐씩 들러 강습을 보다가 가게 때문에 도중에 나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웃의 요리광들은 바쁜데도 불구하고 열 일 제쳐놓고 요리강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해먹었습니다. 요리도구는 알루미늄은 아니고 스테인리스에 가까운 재질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좋은 요리도구를 못 살까봐 미리 일부러 시간을 내어 가서 궁중팬도 사고 금빛 나는 시루도 사왔습니다. 강습을 본 사람들은 요리도구를 안 사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강사가 요리를 잘해서라기보다는 요리도구가 요리를 다 하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요리강사 부부는 엄청난 재물을 쌓고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인지는 모르지만 소문이 분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사 부부가 서울에 큰 빌딩 두 채를 가졌다고 하고, 큰 기와집에 산다고도 했습니다. “기와집은 무슨, 넓은 아파트에 산다고 하드만.” 서로 쓸데없는 말다툼도 했습니다.

요리강습이 끝나고 집마다 새로운 요리를 해먹었습니다. 지금까지 해먹던 한식에서 양식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게 옳을 듯합니다. 솜씨 좋은 병성이 엄마는 가게를 보면서도 틈틈이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약식을 만들어 가끔 우리 집에 갖다줬습니다. 이종사촌 동생은 점심에 오므라이스를 예쁘게 만들어 케첩까지 뿌려서 가져왔습니다.

나는 요리강습을 많이 못 본 탓도 있지만 익숙한 찐빵을 만드는 것이 편하고 맛도 있었습니다. 찐빵이 떨어질세라 자주 해먹었습니다. 아이들은 찐빵을 아주 크게 만들어달라고 합니다. 두 손을 포개어 잡고 이만하게 만들어달라고 합니다. 평창 친정에서 농사지어 보낸 빨간 팥을 아주 물렁하게 푹 삶아 달달하게 만들어 속을 꾹꾹 눌러 많이 넣고 최선을 다해 크게 빚습니다. 한 시루에 다섯 개밖에 못 찔 정도로 크게 만들면 막내는 한 개를 다 못 먹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찐빵이 클수록 기분이 좋아서 만족스러워합니다. 겨울에는 시래기를 삶아 매콤하게 무쳤습니다. 김치도 다져 만두소처럼 넣어 먹기도 합니다.

전부터 먹던 것도, 요리강습에서 배웠어?

찐빵은 막걸리를 넣고 발효시켜 일명 술빵이라고 했습니다. 찐빵 반죽을 발효시키느라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 묻어놓으면 향긋한 냄새가 솔솔 코끝을 자극합니다. 찐빵 반죽은 부풀어오르기 시작해 가만 놔두면 자꾸만 부풀어오르다가 대야를 넘어 흐릅니다. 시간 맞춰 다시 치대어 공기 빼주기를 다섯 번 정도는 해야 해서 찐빵 반죽을 할 때는 자주 집에 들락거려야 합니다.

아이들이 시큼하고 달콤한 술빵 반죽 맛에 이끌려 몰래 뜯어 먹습니다. 아무리 맛있어도 생것을 먹으면 배탈이 날까봐 먹으면 안 된다고, 먹지 말라고 당부당부하고 가게에 나왔다 들어가면 아이들은 찐빵 반죽을 뜯어 먹다가 도망가기 일쑤입니다. 한번은 큰아이들이 반죽 대야를 열어 뜯어 먹은 뒤 잊어버리고 이불을 덮어놓지 않았는데, 막내가 뛰어놀다가 반죽 대야에 한쪽 발이 푹 빠졌습니다. 내가 막 문을 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이 발을 가만히 들어올렸습니다. 발에 묻은 것만 뜯어서 버리니 빵 반죽은 망치지 않았습니다. 즈네가(자기들이) 잘못은 해놓고 발 빠진 찐빵이라고 먹지 않았습니다. 그 빵은 남편과 내가 며칠을 두고두고 먹었습니다.

찐빵을 만들어 요리강습에서 사온 금빛 시루에 쪄서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멀쩡히 전부터 쪄먹던 찐빵도 요리강습에서 배워온 줄 압니다. 뭐든 맛있는 걸 만들면 식구들이 요리강습에서 배웠어? 합니다. 한 열흘 영월을 휩쓸고 지나간 요리강습은 많은 것을 남겼습니다. 요리도 배우고 주방도구도 새로 많이 샀지만, 무엇보다 흰 가운을 입고 요술처럼 요리를 해내는 요리사가 멋지다 못해 부러웠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나도 요리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심장을 파고들었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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