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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몰랐다, 아내가 한 일”의 뒤편

중산층 여성의 ‘주택실천’, 최시현의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
등록 2021-09-04 15:17 수정 2021-09-10 02:02

1978년만 해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인근에는 소가 밭을 갈았다. 40여 년이 흘러 농지는 빌딩이 됐다. 5천만원에 분양됐던 아파트 가격은 현재 20억원을 훌쩍 넘겼다. 강남이 커갈 때 몇몇 여성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교사를 하다 결혼하고 전업주부가 된 고영실(70·가명)씨는 계를 운영해 돈을 모았다. 그는 목동·여의도 아파트를 사고팔아 더 큰 돈을 벌었고 1982년에는 강남으로 다시 진입했다. 아파트 가격은 1993년 1억5천만원에서 2020년 재건축이 끝나자 25억원까지 올랐다. 40∼50여 년간 이어진 한국의 압축성장 과정에서 어떤 여성은 악착같이 집을 매매하며 중산층 가족을 이루는 물적 토대를 세웠다.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창비 펴냄)는 고씨처럼 부동산 매매에서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한 중산층 여성 25명의 주택 생애사를 담은 책이다. 지은이 최시현 교수(여성학 박사)는 이들의 행위를 부동산 투기로만 몰지 않고 ‘주택실천’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 한다. 집을 사고파는 일은 투기와 투자로 구분되기 어려운, 가족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내가 만난 여성들은 (부동산 매매가) 자식에 대한 극진한 사랑에서 비롯된 일이자 내 가족을 보호하는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로서 자신의 사회적 능력을 증명하는 직업과 같다고 소명했다”고 썼다. 남성이 직장일에 몰입하고 사회적 지위를 얻어갈수록, 여성은 부동산 투기라는 ‘더러운 일’을 전담해야만 했다. 재개발 지역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았던 한 고위 공직자가 “난 몰랐다, 아내가 한 일”이라고 발언할 수 있었던 이유다.

여성이 부동산으로 성공했더라도 자식은 마냥 행복했던 것 같진 않다. 허수지(40·가명)씨는 어머니의 부동산 재테크로 “대한민국 상위 5%”에 들 수 있었다는 고마움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강한 장악력과 무자비한 비난을 무서워하며 갈등을 겪다 결국 독립했다. 여성이 투기적 주택실천으로 성공하더라도 가부장적인 삶의 태도가 자리잡기 쉬운 모습이다. 허씨 역시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만나던 사람이 지방 중소도시에 살자는 말을 하자 그곳은 투자 대비 집값이 안 오른다는 말을 겨우 참곤 했다. 이렇게 투기로 빠져드는 주택실천은 아비투스(사회집단의 습속)가 돼 대대로 상속되는 듯 보인다.

‘빈곤 여성에게 부동산은 일이 될 수 있을까’ 책을 덮으니 든 물음이다. 지은이가 만난 여성은 대부분 대학을 나온 중산층이자 전업주부였다. 책의 설명력이 중산층 여성에 한정되는 건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 배움이 짧고 일하느라 시간이 없고 중산층이 될 거라는 희망도 없는 여성은 부동산을 자기 일로 만들 수 있을지. 가능하다면 중산층과는 어떻게 다른 모습이었을지. 집을 둘러싼 페미니즘 이야기가 더 넓게 가닿기를 바라게 된다.

이정규 기자 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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