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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와 금지를 넘어 읽고 쓰다

나혜석, 버지니아 울프 등 열다섯 여성 ‘거인’의 세계 <지성이 금지된 곳에서 깨어날 때>
등록 2021-09-02 10:06 수정 2021-09-03 04:21

시몬 보부아르는 <제2의 성>(1949)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갈파했다. 여성성(에 대한 속박)은 남성 중심 사회가 만들고 강요하는 위계의 산물이란 얘기다. 플라톤 이후 근대까지 서구 철학은 ‘정신’을 ‘몸’의 우위에 놓는 이원론 전통이 확고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정신이며, 인식의 주체는 남성에 한정됐다. 여성은 이성과 논리보다 감정과 육체성이 앞서는, 지적으로 열등한 존재라고 봤다. 지성뿐 아니라 몸도 ‘어떤 성질의 결여’(아리스토텔레스), ‘우연한 장애’(토마스 아퀴나스)를 타고난 여성이 남성의 부차적 존재로 종속되는 것은 자연의 순리였다.

오늘날 이런 인식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거의 없을 것, 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현직 기자이면서 사회학과 여성학을 공부하는 이유진은 신간 <지성이 금지된 곳에서 깨어날 때>(나무연필 펴냄)에서 아직 멀었다고, “지성은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의 것”이라고 논박한다. 지성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나누고 연대하고 발언함으로써 편견과 속박과 폭력에 맞서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다.

나혜석, 버지니아 울프, 시몬 베유, 수전 손택, 클라라 슈만, 마사 누스바움, 마리아 김부타스 등 15명의 ‘거인’들에게서 지은이는 ‘새로운 길을 낸 여성들의 날카로우면서도 우아한 세계’를 본다. 각기 다른 시공간, 다른 삶을 살았던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금기와 금지를 넘어 읽으며 썼고, 닫힌 문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린 이들”이다. 프랑스혁명기에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1791)을 발표한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이 연단에 오를 권리를 위해 싸웠지만 끝내는 단두대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단”이 되고 말았다.

지은이는 말·몸·피·신이라는 네 가지 열쇳말로 여성의 삶에 길잡이가 될 만한 책들도 살폈다. 여성을 향한 거의 모든 비난과 찬사의 중심에 여성의 ‘몸’이 자리한 대신 ‘언어’를 박탈당한 실태를 짚고, 이를 넘어설 방향과 실질적 대처법까지 예시한다. “페미니즘 리부트와 함께 재발견된” 김혜순 시인은 전문 작가한테조차도 여성의 글쓰기가 강고한 장벽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웅변하는 사례다. 2017년 그의 시집 <피어라 돼지>가 심사위원단의 호평 속에 5·18문학상 본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문단에서 이 상이 ‘모더니즘 계열의 언어주의자’에게 돌아가는 건 ‘삶으로 문학하는 작가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비난이 거셌고, 시인은 결국 수상을 사양했다.

근대 도시의 거리를 걷는 ‘산보’조차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철학하는 유한계급 남성만이 누릴 수 있는 배타적 문화”였다. 지은이는 “가부장제 구조에서 자신의 몸을 찾지 못한 여성들은 타자에게 가까이 갈수록 자신의 고유한 몸을 만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들림, 접신과 투신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수년 동안 몹시 아픈 ‘몸’을 보듬고 공부하며 사유한 지은이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선언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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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수동 주민, 만 서른다섯에 낳은 쌍둥이 남매의 엄마이자 주부, “여성과 엄마 앞에 놓인 문턱에 지지 않으려고 계속 쓴다”는 지은이가 임신·출산·육아 과정에서 겪는 고충과 감정의 진폭, ‘정상 가족’ 신화의 허구를 생생한 에피소드로 풀어놓는다. 글은 경쾌하고 현실은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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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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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 1945~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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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특파원 출신 저널리스트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비밀문서들을 통해 해방 정국 5년 격동기의 드러나지 않았던 진실을 보여준다. 미 전시 정보국, 연합군 사령부와 주한미군 사령부 등이 작성한 문건에는 광복군 해체부터 한국전쟁 직전 상황까지 충격적 내용이 폭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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