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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례”

캐나다 교수가 포착한 한반도 식민 말기 문학의 특징 <미래가 사라져갈 때>
등록 2021-07-17 07:51 수정 2021-07-18 01:03

한국 현대사에서 1930년대 말~1940년대 초는 ‘암흑기’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노골적인 황민화와 폭압통치로 치달았다.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식 이름을 쓰도록 강요하면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뿌리 뽑으려 했다. 조선의 지식인과 대다수 민중은 전쟁과 파시즘의 광풍 속에 민족의 미래를 더는 상상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시대의 흐름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문인들은 깊은 어둠과 절망의 시절에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글을 썼을까?

캐나다 토론토대학 자넷 풀 교수가 쓴 <미래가 사라져갈 때>(김예림·최현희 옮김, 문학동네 펴냄)는 한국 또는 일본이 아닌 제3국의 전문가 눈으로 한반도 식민 말기 문학의 흐름과 특징을 포착하고 해석한 책이다. 최명익, 서인식, 이태준, 박태원, 최재서, 임화, 오장환, 김남천 등 당시 활약했던 작가들이 식민주의, 파시즘, 모더니즘이 교차한 시공간에서 일군 미학적 성취를 되살려냈다. 지은이는 영국 태생으로 한국문학과 문화사를 연구한다. 지금까지 월북 작가 이태준이 작가 이력 전반에 걸쳐 발표한 주요 작품들을 영문 번역본으로 출간했다. 2021년 말에는 최명익 단편선의 영역본이 나올 예정이다. 식민 말기 조선에서는 미래와 더불어 탈식민의 개념 내지 희망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제국의 ‘근대’에서 배제됐던 식민지 지식인들이 근대의 본질을 탐구하는 ‘경이로운 순간’이 열렸다. “그들이 겪었던 배제는 글쓰기의 형식 자체에 각인되고, 그 결과 이 작품들은 20세기 중엽 세계 모더니즘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례 중 하나가 됐다”는 것이다. 암울함과 근대의 풍경이 뒤섞인 묘한 분위기는 작가들이 “상상의 고투를 벌인” 작품들에도 투영됐다.

이 시기 문단에는 파편적이고 삽화적 구조를 갖춘 단편소설, 시, 수필 형식이 유행했고 데카당스(탐미주의)와 노스탤지어(향수)의 분위기가 넘쳤다. 개인과 민족 앞에 드리운 짙은 어둠 앞에 작가들은 현재와 일상, 개인과 가정사로 눈을 돌렸다. 예컨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작가 박태원은 자화상 연작에서, 자본과 식민국가, 옛것과 새것이 맞부딪치는 도시 변두리의 일상을 서사화한다. 김남천은 ‘제국의 언어’로 쓴 수필 <어떤 아침>에서, 국민학교 어린이들이 ‘훈도’들의 인솔로 2열 종대 줄 맞춰 소풍 가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명랑하고 원기 있는 행렬인가”라고 썼다. 지은이는 작가의 눈을 빌려 “개인적 욕망을 초월한 전체에의 의지”가 지배하던 현실, “아이들의 활기찬 행렬에서 구현되는 미래에 대한 멜랑콜리한 포착”을 읽어낸다. 최명익의 작품에서도 미래가 사라짐에 따라 문학의 소재와 서술에서 일상의 디테일이 도드라지는 점을 발견한다. 지은이는 당대 작가 중 상당수가 해방 뒤 ‘북쪽’을 선택해 월북하고 냉전체제가 지속하면서 문학사적 평가가 왜곡되거나 지연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밝혔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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