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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빛을 더하는 그들

중국 역사 9명의 인물 에세이 <시간의 압력>
등록 2021-04-12 08:09 수정 2021-04-16 05:54

탄소 하나로만 이뤄진 흑연과 다이아몬드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온도와 압력의 차이다. 다이아몬드의 영롱한 광채와 최고의 강도는 장구한 시간 깊은 땅속에서 엄청난 열과 지압으로 생성된 결정체다.

사람도 그렇다. 대의를 좇아 시련과 죽음에 맞선 이들은 시간의 더께가 걷힐수록 빛난다. 중국 작가 샤리쥔의 <시간의 압력>(홍상훈 옮김, 글항아리 펴냄)은 중국 역사에서 불멸의 존재가 된 인물 9명을 추려 그 삶의 행적을 재구성한 인물 에세이집이다. 격랑의 시대 호걸들의 사상, 그들이 운명을 대한 태도,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주관적 공감을 넘나들며 해당 인물의 ‘인성’(人性)으로 깊이 들어간다. 굴원, 조조, 도잠, 이백, 사마천, 이사, 이릉, 상앙, 하완순까지 옛사람들이 그렇게 새로운 해석으로 독자와 마주한다. 문장은 생동감이 넘치고 호쾌하며 유머와 통찰이 함께 담겼다.

등장 인물들은 모두 문재와 기백이 뛰어났고, 정치에 관여했으나 뜻을 다 펴지 못한 채 생을 마쳤다. 시는 천하를 논하는 미학, 마음을 다스리는 심경, 심장이 타는 초혼곡이었으며, 정치는 세상의 도리를 세우는 방편이었다.

시성(詩聖·두보)과 시선(詩仙·이백) 위의 시신(詩神)으로 추앙받는 초나라 사람 굴원이 “역사에 남긴 최후의 표정은 억울함이었다”. 신흥강국 진나라 앞에서 국운이 풍전등화였으나, 군주는 우매하고 당파가 창궐했다. 굴원은 관직에서 거듭 쫓겨난 끝에 절망의 강물에 몸을 던진다. 그가  맑은 사람의 자리가 없는 혼탁한 세상을 한탄하자 어부가 빙그레 웃으며 했다는 말이 ‘어부사’에 남았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수 있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을 수 있지.”

이백은 “몽환 같은 ‘홀연한’ 모습으로 8세기 인간세계 당나라에 거나한 취기를 풍기며 강림”했다. “영혼은 광야를 떠돌고 우주에서 노닐었으나, 궁중에서는 특이한 부류”였다. 달빛 아래서 홀로 술잔을 기울였고(월하독작), 중천에서 날개가 꺾인 뒤 곧바로 전설이 된 대붕이었다. “이백이 떠나버린 세계에서 사람들은 그를 거듭 부활시켰다.”

후한 말기 난세를 평정한 조조는 “시 짓는 붓을 내려놓으면 칼을 들고, 칼을 내려놓으면 시 짓는 붓을 들었다”. 작가는 “정이 깊은 시인”이자 “무정한 도살자” 조조의 내면에서 “무한한 매력을 지닌 인물”을 발견한다. 사마천은 육체적 거세라는 극한의 치욕 속에 정신적 거세와 싸워 “광활하고 심후한” 창작 <사기>(史記)를 남긴 인물이다. 작가는 “정신의 연옥을 통과한 사람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헌사한다.

한나라 맹장 이릉은 보병 5천 명으로 흉노의 기마병 8만 명과 처절히 싸우다 투항한 비운의 장군이다. 병사들의 개죽음을 피하려 했다. 사마천은 그의 충심을 변호하다 궁형의 치욕을 받았고, ‘반역자 이릉’의 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이릉이 평생 “흉맹한 동물”로 여겼던 흉노에 귀화한 뒤에야 전쟁과 살육의 덧없음을 깨닫고 남긴 글의 한 대목은 이렇다. “너무나 광대한 육지를 보았다. 모든 인류가 서로 원수처럼 여기지 않는 곳이 있는가? 그런 곳이 있다면 아무리 멀어도 찾아 가고 싶다. (…) 남을 죽이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행위가 아닌가?”

작가는 이릉의 영혼 안에 있는 빙설을 느낀다고 했다. 빙설 속으로 떠나간 이릉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읊조린 작가의 문장은 복잡한 정념을 자아낸다. “지식인은 어둑한 등불 아래에서 중얼거린다. 이릉이여, 이릉이여…. 농부는 맑은 하늘 아래에서 중얼거린다. 이릉이여, 이릉이여….”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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