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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비대면 사회, 그의 이름을 물어봤어야 했는데

등록 2020-10-13 12:58 수정 2020-10-16 01:57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몇 달 전 배달음식을 주문했는데 배송 오류가 났다. 다른 음식이 온 것이다. 누구 탓이랄 것도 없었다. 점심시간이라 배달하시는 분이 정신없어 보였다. 하필 그날 처음 배달을 시작한 음식점이었다. 음식점 주인이 포장지 위에 주문확인서를 붙여놓는 걸 깜빡했다. 나 또한 내용물을 확인 못하고 받기만 했다.

모든 일의 뒤에는 사람이 있다

배달업체 콜센터에 전화했다. 여성 상담원이 전화를 받았다. 상황을 설명했다. 상담원이 확인 뒤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조금 있으니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남성 상담원이었다. 불만사항이 접수돼 전화했단다. 다시 처음부터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배달하는 분이 음식을 바꿔 배달한 것 같다며 확인 뒤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10분쯤 지나 그 남성 상담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쪽에서 바뀐 음식을 먹고 있을지도 모르니, 새 음식으로 받을지, 아니면 이미 받은 음식을 먹을 건지 물었다. 매운 걸 못 먹는 사람이 있어 다시 받겠다고 했다. 같은 목소리를 들으니 어찌나 안심되는지, 나는 그 상담원과 두 번에 걸친 통화만으로 정이 들 뻔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음식이 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콜센터로 전화했다. 세 번째 상담원은 또 다른 남성이었다.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고, 나는 처음부터 다시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그때 아차 싶었다. ‘내가 상담원 이름을 물어봤어야 했는데.’

사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소비자답게 이런 일이 벌어지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객 응대 매뉴얼 첫 장부터 시작하는 상담원과의 통화밖에 없음을 안다(통화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인공지능 대화방이 아닌 게 어딘가). 음식을 만들어준 가게에 전화해봐야 ‘배달업체에 문의하라’고 할 것이고, 나에게 물건을 처음 준 배달노동자는 이미 드넓은 배달의 우주를 헤매며 일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는 만날 수 없다.

지난해에는 매트리스 반품 사건이 있었다. 온라인에서 산 매트리스를 반품하려 했더니, 반드시 처음 받은 택배 상자에 도로 넣어야 한다고 했다. 가정집에 거대 매트리스 포장 압축기가 있겠나.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으라는 말과 똑같지만, 상담원이 무슨 잘못인가. 그때도 나는 세 분의 상담원과 ‘자기소개’부터 시작하는 대화를 반복해야 했다. 내가 낸 묘수는 마지막에 통화한 상담원 이름을 물어본 뒤, 그 상담원만 찾아서 계속 통화하는 거였다.

‘모든 일의 뒤에는 사람이 있다.’ 이건 내가 사회생활을 통해 얻은 몇 안 되는 철칙 중 하나다. 앱과 전화 뒤에 있다 해도 이런 종류의 일을 하는 건 (아직은)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특정한 개인’이란 사실을 잊는다. 나와 접선하기 전에는 A·B·C 상담원이었겠지만, 한 번 접선하고 나면 ‘이력’이란 게 생기고, 그 이력은 어떤 일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앞의 상담원과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라는 설명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 상담원을 부탁드려요’라고 말하면 된다는 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잔머리 중 하나다.

뉴욕 경찰관 이름을 알고 보니

그러나 우리 사회는 개인의 이름을 잘 물어보지 않는다. 우리 어머니는 병원에서 “키 작은 간호사분이 잘 아는데 어디 갔어요?”라며 찾고, 이모는 은행에서 “2층 맨 왼쪽에 있던 분과 이야기했는데”라며 찾는다. 미국 뉴욕에서 가방을 잃어버렸을 때의 일이다. 모래밭에 바늘 떨어뜨린 것과 같은 일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찰서를 찾아가 분실 신고를 했다. 그때 담당 경찰관이 자기 가슴에 꽂힌 이름표를 가리키며 “이게 내 이름이야. 앞으로 이 이름을 찾아”라고 말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모른다. 내가 뉴욕 경찰관 한 분을 알게 되다니!

그래서 배달음식은 어떻게 되었냐고? 나는 ‘이름 모를 두 번째 상담원을 찾아달라’고 하소연했고 결국 그와 함께 문제를 해결했으나, 그날 나는 네 시간에 걸쳐 모두 열 통의 전화를 해야 했다. 비대면 사회, 도대체 나와 그의 만남을 가로막아서 누가 덕을 본단 말인가.

김보경 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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