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해 여러 가지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하는 것 같아서….” 9월1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성교육 도서 회수 조치’에 대해 질문받은 여성가족부 장관의 답변이다. 이게 무슨 말이지? 잠시 멍해졌다가, 덕분에 사전까지 찾아보았다. #갈등. [명사] 1.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함. 또는 그런 상태.(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기후위기, 돌봄 위기, 의료 공백과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번아웃(탈진), 급격한 고용 상황 악화, 콜센터와 택배 등 연결 노동자들의 과로와 산업재해, 일회용품 사용 폭증으로 인한 환경오염…. 지금 “코로나로 인해” 고조되는 것이 “사회적 갈등”인가? 더구나, 이번 사안은 악명 높은 2015년 ‘국가 수준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이 개편도 폐기도 없이 남아 있는 문제적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아직도 “더 고민이 필요”한가?
원인과 결과를 뒤집기
문득, 4년 전 이맘때가 생각났다. 한 정당에서 벌어졌던 여성주의 논쟁 과정에서 일부 당원이 서울 시내에 붙였던 문제적 펼침막들. 가장 잊히지 않는 문구는 이것이었다. “남자 여자 편 가르기 그만했으면… 친하게 지내요.”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놓는 흔한 방식 중 하나다. 여성주의가 ‘편’을 가르는 게 아니라(대체로 그럴 힘이 없다), 사실은 그 반대다. ‘평화로운 상태’로 은폐됐던 차별과 폭력을 드러내고 해결을 촉구하는 것, 다시 말해 없었던 ‘편’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 이미 구조화된 ‘편’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말들은 차별 구조의 일부일 뿐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재생산하기에, “모든 것을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리베카 솔닛,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15쪽)은 중요하다. “사회적 갈등”이란 말도 그렇다. ‘갈등’이란 단어는 원인과 결과를 (뒤집는다기보다) 아예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쪽에 가깝다. 충돌 자체만 부각할 뿐 충돌의 원인, 책임 소재, 토론해야 할 쟁점, 방향성에 대한 견해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노사 갈등’이란 말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갑질’이 무엇인지 겪어본 사람이라면, ‘갑을 관계’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일이 ‘갑을 갈등’이라고 묘사될 때 분노를 느낄 것이다. 역사의식을 지닌 시민이라면, ‘국제사회’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한-일 갈등’이라고 표현할 때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누락된다는 걸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무언가를 ‘한다’
시끄러워지지 않게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믿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그것도 정부나 지자체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무언가를 ‘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았던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혐오 선동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세력화했는지 돌아보자. ‘소라넷’을 방치했던 17년 동안 어떻게 ‘n번방’의 토양이 마련됐는지 기억하자. ‘시기상조’는 중립적인 상황 진단이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를 외치며 적극적으로 시기를 늦추고, 변화를 막기 위해 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담론적 생산물이다.
민주주의는 소란스럽다.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하며 아무런 논쟁이 없는 사회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낡은 보수주의자와 혐오 세력에 맞서서 “자기 긍정, 다양성, 공존 등의 가치를 기준으로” 한 성교육 도서를 공인하고 배포할 때 생기는 소란과 긴장을 굳이 “사회적 갈등”이라 표현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더 적극적으로, 더 정확한 방향으로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라.
전희경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옥희살롱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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