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이 사랑한 작가 박상영① “이 순간을 날것 그대로”에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12.html
소설은 소설일 뿐
박상영의 소설을 읽다보면 화자가 박상영일 것이라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화자가 남성인데다 ‘박 감독’(‘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과 ‘영’(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이라는 화자의 이름이 박상영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화자가 작가랑 같은 성별인 경우 작가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 같아요.”
현실감을 더하는 건 또 있다. 현학적으로 세계를 풀어내는 대신 ‘빙구같이’ ‘속이 다 보여서 광어’라고 하는 등 다른 작가들은 좀처럼 쓰지 않는 일상어 덕이다. 핑클, 티아라, 유채영, 카일리 미노그 같은 대중음악 가수가 등장하고 인천 유설희 간호학원, 망원동, 보광동 같은 현실 지명들이 언급되는 것도 마치 소설이 아닌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데 일조한다.
박상영은 이에 대해 “의도한 바”라고 설명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에 대중가요가 아닌 재즈를 인용하는 것처럼, 과거 많은 작가가 작품이 빨리 낡아버릴 것을 우려해 동시대의 대중문화 코드를 쓰는 걸 주저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전 지금 이 순간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날것으로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물론 내 소설이 천년만년 읽힐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지금 이 순간 잘 소비되는 것도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현실 같더라도 박상영은 ‘소설’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 “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게 두려워서 소설이라는 장르를 선택한 거예요. 소설은 철저히 픽션이고, 메타포(은유)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박상영의 소설을 구성하는 한 축이 퀴어라면 다른 한 축은 공간이다. 공간은 넓게는 도시, 좁게는 집이다. 도시는 서울(‘우럭 한점 우주의 맛’ ‘대도시의 사랑법’), 방콕(‘늦은 우기의 바캉스’), 상하이(‘대도시의 사랑법’) 등 대도시다. 대도시는 좁은 지역사회에 비해 누군가로부터 숨어 있기도, 자신을 드러내기도 좋은 공간이다. 이 도시에서 화자는 해방감을 느낀다. “사회적으로 소수자에 위치한 사람들이 대도시라는 공간에서 익명성을 획득하고 도시별로 어떻게 다른 삶의 양상을 가져가는지 그려보고 싶었어요.”
대구 탈출, 원룸 탈출
대구 출신인 박상영 또한 “서울이라는 이데아”에 도달하기 위해 10대 때 “목숨 걸고” 공부했다. 가장 많은 트라우마를 남긴 10대의 삶에서 통째로 벗어나고 싶었다. ‘대구 탈출’이라는 생존 본능으로 “정말 하기 싫은 공부”를 했다.
“10대는 가장 억압받았던 시기예요. 그래서 많이 괴로웠어요. 독실한 기독교인인 엄마와의 갈등이 특히 심했어요. 종교전쟁이라고 할 수 있죠. 생활공간, 인간관계, 부모님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대구를 탈출했을 땐 해방감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었어요.”(박상영의 작품 속에서 부모는 주로 화자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인물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은 다른 법, 서울에서의 삶이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다. 대구라는 도시 공간에서 벗어나 이데아인 서울에 당도했지만, 현실 속 주거 공간은 제2의 탈출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보증금 없는 월 30만원짜리 반지하방이 시작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문 앞에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와 전래동화에 나오는 지네”가 있고 “누우면 발밑에 싱크대가 있는” 침침한 원룸. “도시 생활을 겪는 시골쥐 같았어요. 그래도 글쓰기라는 소통 창구가 생기면서 부모님에 대한 분노, 내적 문제를 극복하려고 노력했어요. 이 도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곧 나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과도 일치했던 것 같아요.”
20대 박상영이 겪은 주거 현실은 그의 소설 속 청년 화자들도 겪는다. “반지하의 축축한 느낌은 그렇다 쳐도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냄새 하며 (…) 정말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아도 되는 거야?”(‘햄릿 어떠세요?’) “그의 투룸 빌라는 반지하에 암막 커튼이 쳐져 있어 동굴처럼 어두웠다.”(‘우럭 한점 우주의 맛’) “닦아도 닦아도 먼지가 계속 나오는 게 참 우리 집다웠다.”(‘대도시의 사랑법’)
“지상 과제였던 원룸 탈출”은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누워도 싱크대가 보이진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고층으로 집을 얻었다. 그리고 이사하면서 몸 누일 곳을 제외하고 온통 좁은 원룸에 널브러져 있던 책과 옷도 버렸다. “해탈의 경지, 무소유예요. 한국의 곤도 마리에가 되려고요. 헠헠헠.”
“작가 생활 5년을 돌아보건대, 여기까지 온 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작가라는 직업이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상영은 쓰고 또 쓴다. 쓰고 싶은 욕망, 써야 하는 현실. 쓰고 싶기에 써야 하기에 박상영은 쓰고 또 쓴다.
♡
인터뷰를 마친 뒤 책 세 권의 맨 앞장에 박상영의 서명을 받았다. 서명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단어는 ‘사랑’이었다. 첫 책인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엔 “그때는 몰랐었어 누굴 ♡하는 법”, <대도시의 사랑법>엔 “Love 수경♡ 우주만큼 행복하세요”,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엔 “Love 수경 따뜻한 밤 되세용”이 적혔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사랑이었다. 보통의 존재들의 사랑, 그것은 자신을 향한 사랑이기도 하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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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박상영은 신작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에서 매일 저녁 ‘오늘 밤은 기필코 굶고 자야지’ 다짐하면서도 배달 앱을 켠다. 인터뷰 중 그에게 “어젯밤은 굶고 잤느냐”고 물었다. “아니요”라는 답을 기대했는데, “어제는 야식을 먹지 않고 저녁을 먹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이어트 본격 돌입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 들려온 답. “너무 졸려서 밤 10시에 잤다.”(안 먹은 게 아니고 못 먹은 거였구나.)
야식 전문가는 남다른 야식을 추천해줄 거라는 생각에 자주 먹는 야식을 물었다. 박상영이 진지해졌다. “그건 어쩌다 한 번 야식 먹는 사람들이 하는 질문이다. 매일 식사하는 사람에게 뭐 먹냐고 묻는 것과 같다.”(우문현답이었다.) 참고로 박상영의 ‘힐링푸드’는 간장게장과 육회다.
질문 면박을 당해 회심의 질문을 날렸다. 박상영의 책 세 권을 음식에 비유한다면? “세상에 못 쳐낼 질문은 없다”던 그가 인터뷰 약 두 시간 만에 처음으로 뜸을 들였다. “이거 참신하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매운맛 마라탕이다. 소재도 세고 캐릭터들의 감정도 강렬했다. 첫 출사표였기 때문에 힘도 잔뜩 들어갔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칵테일 같다. 달콤하면서 쓴맛도 나고 괜히 멜랑콜리한 기분에 젖지만 우울하지 않다.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는 (고민) 한식 백반 같다. 매일 일과를 따박따박 써내려가기도 했고 일상에 젖어들어 위안을 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썼거든. 이렇게 스테디셀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ㅋㅋ”
P.S. 박상영이 기사에 꼭 적어달라고 한 내용이 있다. “실제로 보면 더 재미있다고. ㅋㅋㅋ 책으로 봤을 때보다 상상을 초월했다고 꼭 적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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