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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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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백수린② ‘친애하고, 친애하는’ 사람들

등록 2020-08-17 20:07 수정 2020-08-20 13:37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21이 사랑한 작가 백수린① “내가 재현하는 인물들을 책임져야죠”에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10.html

부서질 것을 알면서 짓는 게 사랑

나는 작가와 비슷한 세대에 속하기 때문인지, 작가의 관심은 국경을 포함한 더 넓은 의미의 ‘경계’에 있다고 느꼈다. 작가가 자신의 관심사가 ‘이방인 됨’ ‘이방인성’에 있음을 작품과 인터뷰에서 끊임없이 표현했기에 더 그랬다. 이때 이방인은 외국과 연관되지 않아도 된다. 작가는 “우리는 가족이라면 가장 가까운 사이여야 한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만 가족은, 다른 관계와 마찬가지로, 유지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우리가 서로에게 이방인임을 재확인하게 하는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오늘의 문예비평> 2019년 6월호) 세 번째 소설집에는 결혼과 출산, 나이듦 같은 생애주기의 경계(‘폭설’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개발 차익을 얻기 위해 서울의 재개발 예정 지역으로 이사한 중산층 가정(‘고요한 사건’)이나, 처음으로 전세 아파트를 장만해서 이주한 신혼부부(‘아주 잠깐 동안에’)가 겪는 계층 간 경계도 등장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양한 시간적, 공간적 경계를 통과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누구나 이방인의 위치를 경유하는 게 아닐까.

“저는 누구나 어떤 경계를 통과하는 경험을 하지만 누구나 이방인성을 느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것에 무감하게 지나가는 사람도 봤고요. 이방인이라는 위치가 굉장히 불안정하고 연약할 수 있지만, 굉장히 고독한 일이지만, 그래도 경계 안쪽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사람은 결코 보지 못하는 어떤 삶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이방인의 특권이기도 한 것 같고요.”

작가는 코로나19로 여러 경계가 강화되는 시대의 변화에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국경의 문턱이 다시 높아지는 시대로 회귀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안타까움이 생기는 시절인 것 같아요. 제가 그동안 써온, 세계인들 간의 환대를 다룬 이야기는 앞으로 더 중요해질 수도 있고, 반대로 그런 이야기가 나이브하게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런 문제가 지금과는 다른 시각에서 더 고민해봐야 하는 주제로 부각된 것 같아요.”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더욱 중요해진 세계인들 간의 환대

당장은 첫 장편소설을 구상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2021년 봄부터 연재를 시작한다. 소설을 기다릴 독자에게 장편소설은 어떤 이야기가 될지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아직 불분명하지만, 제가 늘 해왔던 것의 연장선상에서 경계인들의 이야기, 여성들의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김효실 <한겨레> 기자 trans@hani.co.kr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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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지난해 어느 불면의 밤에 일어난 일이다. 어두운 원룸을 적요 대신 ‘사람의 소리’로 채우고 싶었다. 오디오와 스마트폰을 블루투스로 연결해 팟캐스트 <라디오 문학관>을 틀었다. 성우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나마 백색 소음을 잘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주인공 ‘나’가 어릴 적 할아버지와 재혼한 중국인 새할머니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십수 년 할아버지와 살았지만 끝내 ‘가족’이라는 경계, 한국 사회의 가장자리를 맴돌기만 한 사람. 소설의 절정에서 주인공은 “그 언젠가, 단 한 번 새할머니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었던 그 추석의 밤”에 새할머니, 주인공과 피가 섞이지 않은 사촌과 함께 달을 올려다본 기억을 회고한다. “나는 압도적인 크기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티베트고원 위에도 공평히 비추고 있었을 거대한 달 주위로 어둠이 푸른빛으로 서서히 용해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작은 방 천장에도 둥근 달이 훤하게 떠오른 것은. 가족인 듯 가족 아닌 가족 같은 세 사람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린 것은. 방 안을 채운 달빛이 사라지기 전, 스마트폰을 들어 소설의 제목과 작가의 이름을 확인했다. 백수린의 ‘중국인 할머니’.

내 작은 방에 보름달을 띄워준 작가를 직접 만날 기회를 얻었다. 작가는 인터뷰하는 동안 자신이 ‘회의주의자’라고 여러 번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자신의 경계를 늘 감시하고 그 확장을 지향하는 용감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여름의 빌라’에서 독일인 소녀는 강가에 네모 선을 그려 ‘집’이라고 이름 붙인다. 소녀는 캄보디아 소년이 ‘집’ 앞에 서자, 잠시 고민하다가 선을 지우고 소년의 뒤쪽으로 새로운 선을 긋는다. 작가는 “선을 안 긋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지만, 선을 긋는 작업까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늘 선을 그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다만 그 선을 확장해가며 더 먼 곳에 치려고 하는 것, 그게 우리가 가장 정직한 태도로 추구할 수 있는 지향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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