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21이 사랑한 작가 백수린① “내가 재현하는 인물들을 책임져야죠”

등록 2020-08-17 19:58 수정 2020-08-20 13:37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조심스러운 태도. 여러 평론가가 백수린이 그리는 인물들의 특징으로 꼽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조심스러워질 때는 언제인가. 내가 선(線)을 넘는 건 아닐까 두려울 때다. 나와 타인의 경계 혹은 차이를 두드러지게 감각하는 순간. 그 찰나의 순간으로 인해 어떤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맞는다. 변화의 한복판에서는 그 의미를 해석하기 어렵다. 다만 그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과 보고 듣고 맡고 맞닿은 감각만이 강렬히 남아, 기억으로 되풀이된다. 그러다 불현듯 ‘그때 그 일’에 서사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백 작가의 단편소설들은 이렇게 경계를 감각하는 기억의 재구성에 독자를 초대해왔다. 인물들은 조심스럽되, 이미지들은 선명하다. 한여름 바닷가의 뙤약볕과 파라솔 아래 그늘이 또렷이 나뉘는 것처럼. 백수린의 소설은 우리가 만난 여름을 닮았다.

실패한 서사를 복기하는 능력

장맛비가 내리던 7월27일 오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백수린(38) 작가를 만났다. 작가에게 최근 출간된 세 번째 소설집 <여름의 빌라>에도 회고적 구성을 한 작품들이 눈에 띈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소설집 맨 처음에 배치된 ‘시간의 궤적’이 대표적이다. ‘나’는 프랑스 유학 중 어학원에서 만난 대기업 주재원 ‘언니’와 친밀한 관계를 맺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내가 취업 대신 국제결혼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불안정해지자, 비혼인 언니와의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나는 언니에게 상처 주는 말을 내뱉고 만다. 소설을 읽고 나면, 현재의 나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현재는 유지되지 않는 어떤 관계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서로 처지가 달라지며 사그라든 관계들이.

“저는 이렇게 과거를 곱씹는 행위, 복기하고 재해석하는 게 타인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쓴 것 같아요. 우리가 필연적으로 타인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실패한 서사를 복기하는 능력이 있어요. 그걸 통해 뭔가를 발견해낸다면…. 그게 이미 망가진 관계의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도 적어도 내가 다음 관계를 맺을 때는 조금은 달라진 태도로 타인을 대할 수 있고, 그런 게 쌓일 때 우리가 소통에 조금은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언어라는 수단의 불완전함과 그로 인한 소통 실패라는 관심은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작 ‘거짓말 연습’부터 꾸준히 작품에 표현됐다. “한두 문장으로 요약한 타인의 삶이 얼마나 진부해질 수 있는가.”(‘거짓말 연습’) “우리는 타인과 조우하고,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착각하며, 그 착각이 주는 달콤함과 씁쓸함 사이를 길 잃은 사람처럼 헤매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던가.”(‘폴링 인 폴’) 회의감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레 다가가 다시 한번 말을 건네는 다감한 선택들도 함께 묘사됐다.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 ‘여름의 빌라’ 속 주인공 ‘주아’의 편지도 그렇다. 주아는 스물한 살에 유럽 배낭여행을 하며 우연히 만난 독일인 백인 부부 베레나·한스와의 인연을 드문드문 이어갔다. 이들의 관계는 베레나·한스 부부가 손녀 레오니와 함께 캄보디아를 여행하던 중에 주아와 주아의 남편 주호를 초대하면서 충돌을 겪는다. 작가는 작품 구상 단계부터 “어떤 몰이해를 극대화하고 싶어서” 인물들의 인종, 세대, 계층을 모두 다르게 설정했다고 했다. 소설은 주아가 극적 갈등을 되짚으며 베레나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였다. 주아는 편지를 상대에게 부쳤을까?

“이번 소설집에 실린 인물 중 용감한 사람 중 하나가 주아라고 생각해요. 주아가 편지를 쓴 뒤 베레나에게 부쳤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썼어요. 물론 저는 회의적인 사람이라서, 편지가 베레나에게 제때 도착했는지는 모르겠어요(극 중 베레나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다). 편지가 제시간에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편지를 쓰고 보냈다는 점에서 용감한 거죠.”

소설을 관통한 뒤 달라지는 인물

차이가 낳는 불가피한 오해와 성찰, ‘말 건넴’의 윤리만이 백수린 소설의 전부는 아니다. ‘여름의 빌라’에 숨겨진 반전은 ‘한국인’의 입장에 공감하기 쉬운 독자에게 더 큰 질문으로 다가갈 것이다. “‘여름의 빌라’를 쓰고 지인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하면서 제가 집요하게 확인했던 부분이 처음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와 마지막을 읽고 난 뒤 인물들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렇게 읽히는 소설이 쓰고 싶었거든요. 다 읽고 나면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무엇이 폭력이고 폭력이 아닌지 그런 것들에 대한 판단을 조금씩 망설이게 되는 소설이요.” 작가가 2018년 1월 황예인 평론가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작가에게 당시 밝힌 소설관을 다른 작품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 물었다.

“기본적으로 저는 어떤 인물을 하나로 고정되지 않게, 납작하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독자에게) ‘나는 이 인물을 이렇게 생각했는데 다른 면도 있구나’ 발견하게 하는 게 저한테는 중요한 일이고, 소설가로서 그런 걸 그리는 게 제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소설집 전체적으로 중요하지만 가장 핵심적으로 공들여서 만든 게 ‘여름의 빌라’죠.”

소설가로서 백수린의 역할. 그의 작품과 인터뷰 등을 발표 시간순으로 읽으니 어떤 변화가 감지됐다. 그는 첫 소설집 <폴링 인 폴>에서 “글쓰기는 내게 언제나 나의 어둠을 견디는 방편”(작가의 말)이라고 했다. 그에게 소설은 그가 어떤 시간을 버텨낼 수 있도록 돕는 작업으로 묘사됐다. “말하자면 허무와 싸우는 방법이 내게는 소설뿐이었던 셈이다. 지나가는 찰나를 글 속에 가두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나 스스로 납득해가는 과정. 그러다 천천히 그것이 나만의 싸움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하는 싸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던 것 같다. 어둠 속에서 빛을 공유하고, 헛것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발견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 그러다보면 소멸되고 말 어떤 찰나가 불멸이 될지도 모른다는 환상.”(2012년 이수형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그러나 작가는 점차 사라져 잊힌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는 작업에 의미를 부여해갔다. 2011년 등단 뒤 9년여 동안 한국 사회와 문학계가 겪은 큰 사건들, 독자와의 만남 등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했다.

“데뷔 초에는 제가 소설을 쓰지만 ‘소설가’라는 인식은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책이 쌓이고 독자들을 만나며 ‘내가 소설가가 되었구나’라는 인식을 하게 됐어요. 이전에도 독자를 생각하면서 썼지만, 소설가로서 독자와의 관계를 더 의식하게 된 거죠. 두 번째 소설집 <참담한 빛>은 세월호의 영향 아래서 쓴 게 많아요. 세 번째 소설집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선 문단 내 성폭력, 미투 운동이 영향을 줬어요. 물론 이전에도 여성주의에 관심 갖고 여성적 글쓰기를 주제로 연구도 했지만, 제게 초기에 소설 쓰기는 생활인으로서 저와 분리돼, 더 본질적이고 내밀한 저를 표현하는 게 절실했거든요. 그런데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보면서, 책을 여러 권 내며 살아남은 여성 소설가로서 ‘내가 재현하는 인물들을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제 기존 소설에서 어둠을 보여주는 인물을 많이 재현했는데, 그런 인물은 한국 사회에 이전에도 많이 재현됐던 것 같았고. 그렇다면 다른 여성 인물을 더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소중한 나만의 것’을 지키는 엄마, 할머니

자식이나 손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엄마, 할머니 대신, ‘소중한 나만의 것’을 지키려고 애쓰는 엄마와 할머니가 등장하는 ‘폭설’과 ‘흑설탕 캔디’, <친애하고, 친애하는> 등이 그런 바람으로 만들어졌다. ‘할머니’를 주제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 때, 할머니의 연애를 떠올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할머니의 젊은 시절 첫사랑이나 할아버지와의 이야기가 아니라, 노년에 한국어도 못하는 외국인과 사랑을 나눈 이야기라면. 작가가 할머니를 주제로 쓴 소설 ‘흑설탕 캔디’는, 손녀 ‘나’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일기장을 토대로 할머니의 연애사를 추적하는 한 편의 반전 드라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세 번째 소설집에 실린 8편 가운데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꼽았다. 이유를 물었다.

“소설을 쓰면서 즐거웠어요. 할머니의 로맨스를 상상한다는 것이 즐거웠고, 할머니의 삶을 소설로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야기를 쓰는 방식도 고민이 많았는데, 할머니를 주인공 화자로 내세울까 하다가 손녀를 화자로 해서 할머니의 로맨스를 상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저는 그게 어떻게 보면 소설가의 작업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썼어요. 몇 개 안 되는 힌트로 상상을 덧붙여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그 안에 진실이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저는 소설 쓰기와 흡사하다고 생각해서 그 과정을 보여드린 것이기도 하고요.”

독자는 손녀 위치에서 할머니 연애사를 엿볼 뿐, 결코 할머니만의 기억에 접근할 수 없다. 할머니는 일기장에 프랑스인 브뤼니에씨와 이별하며 들은 말을 “대명사 두 개와 동사 한 개”라고만 썼다. 손녀는 “당신을 기다릴게요(Je vous attendrai)”이거나 “그리울 거예요(Vous me manqerez)” 등으로 여러 문장을 조합하며 상상하는 데 그친다. 할머니가 일기장에조차 기록하지 않으려 한, 고유한 할머니만의 것이 존재함을 강조하려는 장면인지 물었다.

“맞아요. 할머니한테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모르는 채로 남겨두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어디에도 기록하지 못하는 뭔가가 각자 다 있잖아요. 가장 소중한,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

<친애하고, 친애하는>의 주인공은 연극무대 디자이너를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로 “부숴야 할 줄 알면서도 짓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흑설탕 캔디’에서 할머니와 브뤼니에씨는 각설탕으로 탑을 쌓아 올리며 놀다가, 탑이 무너져 내리자 함께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린다(연애가 확실하다). 작가는 이처럼 “무너질 줄 알면서 쌓고,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짓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부서지고 무너지는 순간에도 예기치 못한 기쁨은 존재한다”고도 덧붙였다.

작가의 과거 인터뷰를 보면, 가장 많이 등장했던 질문을 쉽게 건질 수 있다. ‘작품에 외국과 외국인이 자주 나오는 이유가 뭔가요’다. 반복되는 질문에 지쳐갈 때쯤, 작가가 질문에 질문을 던지는 반가운(!) 인터뷰를 발견했다. “어쩌면 저는 이런 질문을 반복적으로 주고받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라는 개념이 매우 협소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요.”(2018년 1월, 문학과지성사 인터뷰) 1982년 인천 출생인 작가는, 자전소설 ‘국경의 밤’에서 세계화로 점차 국경의 문턱이 낮아지는 시대에 성장한 자신의 세대 정체성을 밝혔다. 학창 시절 유학 경험이 있고, 불문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김효실 <한겨레> 기자 trans@hani.co.kr

*21이 사랑한 작가 백수린② ‘친애하고, 친애하는’ 사람들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11.html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

백수린의 번역

도서관이나 온라인서점에서 ‘백수린’을 열쇳말로 검색하면 꽤 많은 양의 책이 쏟아진다. 그 가운데 일부는 ‘저자’ 백수린이 아니라 ‘옮긴이’ 백수린. 작가와 번역가가 동일 인물 맞다. 불문학을 전공한 백수린 작가는 등단 전부터 프랑스어 동화책을 번역했다. 2018년에는 소설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전 에세이 <문맹>(한겨레출판)을 번역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를 피해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이주해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옮긴이의 말’에서 백수린 작가는 편집자의 번역 제안이 “국내에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3부작 소설을 매우 사랑하는 독자일 뿐 아니라 외국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들의 언어와 정체성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오래전부터 특별한 관심을 가져온 나에게 매혹적인 설명이었다”고 했다.

첫 소설 번역에도 도전했다. 백 작가가 프랑스 작가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여름비>(미디어창비)다. 백 작가는 3시간 가까운 인터뷰 동안 딱 한 번 빠르고 단호한 어조로 “아름다워요!” 하고 외치듯 말했는데, 그게 <여름비>를 설명한 순간이다. 8월 말 출간 예정이다.

동화책 번역도 계속할 예정이다. 성인을 위한 그림책을 좋아해서, 본인이 출판사에 먼저 번역을 제안한 책도 있단다. “타깃층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출판사에 까인 경험을 조곤조곤 들려줬다.

직접 번역한 동화책 가운데 어른이 읽어도 좋을 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질 아비에와 키티 크라우더의 <구름을 삼켰어요>(창비), 알랭 쎄르와 올리비에 딸렉의 <사랑해요 사랑해요>(창비)를 추천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