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이 사랑한 작가 김혜진① “사람이 항상 궁금해요”에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096.html
*작품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 아무 관계 아니에요
“나는 아수라장 같은 병원 복도 한쪽에 몰린 채 여자를 생각한다. 아니, 여자에 대한 걱정은 하얗게 사라지고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지 허둥지둥한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누구냐고!/ 남자가 내 어깨를 잡아끈다. 다시 돌아가면 여자가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바라볼 것 같다. 그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나는 반사적으로 말한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중앙역>
“병실 쪽으로 다가갈 때 사무실 쪽에서 누군가 나와 목소리를 높인다. 가족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못박았던 그 남자 직원이다./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화가 난다는 듯 쏘아붙인다./ 며칠만 모시고 있겠다는데 그걸 왜 못하게 해요? (…) 어차피 오늘내일하는 사람인데 절차든 법이든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딸에 대하여>
한 인물의 선과 악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사람과 세상 사이의 ‘관계’ 안에서 가능하다. 그 관계가 더는 유지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 파국을 맞는다. <중앙역>의 마지막 장면이 그렇다. 주인공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를 병원 응급실에 눕혀놓고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온갖 일을 하며 돈을 구하지만 병원비를 댈 수 없었던 그는 ‘여자’를 병원에 밀어넣는다. ‘여자’와의 관계를 따져 묻는 병원 관계자에게 “모르는 사람입니다”라고도 소리친다. “이 장면을 쓰기 위해 <중앙역>을 썼다”고 김 작가는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을 통해, 여자도 그도 살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나는” 결말이다.
<중앙역>의 ‘나’가 “모르는 사람”이라 외칠 때, <딸에 대하여>의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라고 외친다. 그러나 ‘나’의 울부짖음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이 돌보던 무연고 노인을 집으로 데려가게 해달라는 요구를 마침내 관철한다. 노인을 모셔온 뒤, 줄곧 긴장감을 유지하던 딸과 그의 동성 연인의 관계가 달라진다.
<중앙역> <딸에 대하여>의 결말이 나름 현실적 선택이었다면, <9번의 일>의 끝맺음은 “소설적 결말”이다. 지역주민들의 온갖 비난에도 집착하며 설치했던 통신탑을 주인공은 회사 인사팀에서 자신이 ‘일’을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이 없자 부숴버린다. “현실적 결말을 내기가 어려워서 무너뜨렸어요. 그 사람의 내면이 무너지는 모습,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폐기하는 장면을 보여주려 했어요.”
“소설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재개발로 갈라진 동네에서 가난한 동네에 대한 혐오와 부자 동네로의 편입 욕망을 그린 <불과 나의 자서전>도 결말이 ‘극적’이다.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재개발이 예정된 ‘남일동’에 무사히 정착하고 동네를 살기 좋게 바꾸려 했던 싱글맘 ‘주해’를 주인공은 열심히 돕지만 현재의 모습과 전혀 달랐던 ‘과거’의 주해를 알게 된다. 주해가 사라진 뒤 예전의 ‘어두운’ 모습으로 돌아가는 남일동을 보면서, 주인공은 동네에 불을 지른다. 이 밖에 최근 발표한 단편 ‘3구역, 1구역’과 ‘광장’도 개발에 얽힌 이야기다. 김 작가는 “재개발에 찬성하는 사람은 투기꾼이고, 쫓겨나는 사람은 피해자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개발이 이뤄지는 곳에 얽힌 상상하기 힘든 관계가 있고, 이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며,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소설을 쓰는 힘은 무엇일까. “문학 말고 한 사람의 내면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장르가 있을까요”라고 김 작가는 반문하면서, 자신이 “타협하지 않는, 타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항상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가 소설 속에 그려왔던 인물 대부분은 ‘타협하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글감을 길어, 그 인물의 내면과 함께 그를 둘러싼 관계와 세상을 드러내려 했다.
“맑은 여름날 글이 잘 써진다”는 그가 긴 장마 기간에 ‘너’에 대한 이야기를 묶은 두 번째 단편집과 <중앙역> 개정판 원고를 넘기고 출간을 기다린단다. 두 권 다 8월 중에 나올 예정이다. 독자에게 하고픈 말은 변함없었다. “(사람들이) 소설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웃음)”
—————
에필로그
김혜진 작가는 시종일관 친절했다. <9(구)번의 일>을 <9(아홉)번의 일>이라고 말한 무례한 기자에게도 흔쾌히 인터뷰를 허락해줬으며, 작가가 서명한 책들을 택배로 보내줬다. 인터뷰 장소 섭외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흔쾌히 <한겨레21> 뉴스룸으로 찾아와줬다. 거듭된 질문과 귀찮은 요청에도 그는 “좋다” “괜찮다”고 답해줬다.
부족한 첫 대면 인터뷰를 메우기 위해 추가로 서면 인터뷰를 했다. 그는 “마감 때 ‘모든 초고는 걸레다’라는 헤밍웨이의 말에 위로받는다”고 했다. 또한 ‘글의 완성’을 평가하는 척도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완성이라기보다는 그냥 완료되는 게 아닐까요. 어쨌거나 물리적 시간의 한계가 있으니까. 시간이 글을 완료시킨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감을 앞둔 이에게 이만한 위로의 말이 또 있을까.
머리를 쥐어뜯으며 김 작가의 단편 ‘쿵후하는 자세’의 첫 대목을 떠올린다. “그 자전거는 인터넷에서 중고로 구입한 것이었는데 쓸 만했다. 아니, 쓸 만한 정도가 아니라 과분했다. 가끔 자전거는 내게 그런 질문도 던졌다. 네가 날 가질 자격이 있을까.”
인터뷰를 위해 소설을 읽으면서, 또 괴발개발 기사를 써내려가면서 계속 자문했다. ‘내가 이 기사를 쓸 자격이 있을까?’ 이 소설의 마지막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주인공이 한 건물의 ‘직원용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청소노동자에게 핀잔을 듣는 장면이다. “근데요. 제가 외부인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누가 몰라. 딱 보면 알지. 다 알아요, 전부 다.”
내가 이 기사를 쓸 자격이 없다는 걸 독자에게 들킬 것만 같다. “시간이 완료시킨” 기사를 부끄러운 마음으로 닫는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