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할 때는 학생이 몇 명 있더니, 얼마 안 돼 다들 자리를 뜨고 J 혼자 남았다. 어른들만 있는 강연장에 중1 여학생이 끝까지 앉아 있는 건 드문 일이다. 이 아이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질의응답 시간에 내 편에서 말을 걸었다. “뒤에 앉은 학생은, 혹시 질문이나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J가 머뭇거리다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엄마가 줄을 길게 잡나요?”
지난겨울, 국어 선생님 한 분이 초대해줘서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서 ‘작가와의 대화’라는 것을 했다. 선생님과 학부모가 30명쯤 모였고, J도 거기 있었다. 그날 나는 책 내용과는 별로 상관없이 우리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아무래도 거기 모인 사람들의 공통 관심사는 아이들 키우는 문제일 것 같았다. “엄마는 우리를 키울 때 ‘줄을 길게 잡았다’고 말씀하셨어요. 양육의 줄을 너무 바투 잡지도, 그렇다고 놓아버리지도 않았다고요. 덕분에 저는 자유롭게 자란 것 같아요.”
J는 아까 한 이 말을 생각하고 있었나보다. J의 질문에 어른들은 조용히 웃었지만 나는 대답이 막막했다. “글쎄, 그건 엄마한테 여쭤봐야 할 것 같은데.” 겨우 이렇게 대답했더니, 앞에 앉아 있던 선생님이 말했다. “어머니가 여기 계세요.” 이렇게 되면 어머니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 혹시 줄을 길게 잡는 게 어렵다면 그건 왜 그럴까요?” “불안해서인 것 같아요. 혹시 아이가 잘못될까봐.”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을 흔들면
엄마들은 두렵다. 내가 잘못해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놓칠까봐, 남들은 다 갖는 좋은 것을 주지 못할까봐 불안하다. 15년 전, 나는 경기도에서 영어학원을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영어 조기교육 붐이 일었다. ‘영어학습의 결정기’를 놓치면 아이가 평생 ‘오렌지’ 발음을 제대로 못할 것처럼 겁을 줬다.
어느 날 젊은 엄마가 6살 남자아이를 데리고 상담하러 왔다. 우리 학원엔 6살 반이 없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그 집에 2살 난 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동생은 지금 누가 보나요?” “집에 있어요. 자는 것 보고 잠깐 나왔어요.” “어머니, 영어는 언제든지 아이가 하고 싶어 할 때 시작하면 돼요. 지금은 빨리 집에 가보시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젊은 엄마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괜찮을까요? 주위에서 하도 늦었다고 해서.” “괜찮아요, 진짜로.”
아이 손을 잡고 황황히 떠나는 엄마를 보면서, 그가 집을 나선 이유는 엄습한 불안을 그 순간에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탓할 수는 없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사회가 경쟁과 성취의 논리로 흔들어버리면, 양육의 즐거움은 불안으로 바뀐다.
행사가 끝나고 J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건넸다. 곁에 엄마도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줄을 길게 잡아서 네 마음대로 시간을 쓸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어?” “읽고 싶은 책을 밤새 읽고….” 엄마에게 물었다. “J가 밤새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어떨 것 같으세요?” “학교도 가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는데 걱정되죠.” “그럼, 주말에만 하는 건 어떠세요?” “토요일 하루라면 괜찮겠네요.” 옆에서 듣고 있던 선생님들이 거들었다. “J는 정말 성실하고 예의 바른 학생이에요. 자랑스러우시겠어요.”(교장 선생님) “J는 책을 참 많이 읽고 생각도 깊어요. 더는 바랄 게 없는 아이예요.”(국어 선생님) 어머니는 보일락 말락 하게 웃었다.
엄마들은 걱정이 많다. 아이들이 이 경쟁사회에서 낙오될까봐 두렵다. 그래도 주변에 걱정하지 마시라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불안을 거두고 아이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뿌리와 날개,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것
오래전에 제법 잘 만든 공익광고를 본 적이 있다. 부모와 학부모를 대구를 맞춰 비교했다. “부모는 멀리 보라 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고 합니다.// 부모는 함께 가라 하고/ 학부모는 앞서가라고 합니다.// 부모는 꿈을 꾸라 하고/ 학부모는 꿈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묻는다. “당신은 부모입니까, 학부모입니까?” A냐 B냐 하고 물으니, 마치 학부모는 부모가 아닌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배울 학’(學)이라는 좋은 뜻의 글자가 앞에 붙었는데, ‘부모’의 좋은 의미가 전복된다.
학부모와 부모. 우리에게는 구별되는 두 단어가, 다른 언어에서는 그냥 하나인 경우가 많다. 영어만 해도 ‘학부모’라는 단어가 없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다고 해서, 부모에게 다른 이름이 생기는 게 아니다. 다 그냥 부모(Parents)이다. 물론 부모라고 다 같은 부모는 아니다. 방임, 학대, 억압, 조종하는 나쁜 부모도 많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누구에게나 어려운 과업이다.
나는 ‘뿌리와 날개’(Roots and Wings)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좋은 부모에 대해 제법 널리 알려진 인용문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뿌리이고 다른 하나는 날개이다.” 어린아이가 충분히 사랑받고 자라 신뢰나 소속감처럼 안정적인 마음의 뿌리를 갖게 되면, 이제 세상 밖으로 혼자 나가 자유롭게 날며 탐색할 시간이 온다. 연줄을 풀듯 끈을 길게 잡아줘야, 아이는 날갯짓할 수 있다.
어머니를 응원합니다
얼마 전에 “저를 기억하시나요?”라는 제목의 전자우편을 받았다. “저는 작년 12월에 작가님의 강연을 들은 유일한 학생이었던 J입니다. 저는 그날 이후 엄마와 더 나은 삶을 보내고 있답니다.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정말 많이 행복해졌어요”로 시작하는 긴 편지였다. J를 만난 건 거의 8개월 전이다. 지금까지 어머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 어머니도 정말 대단한 거다. 그날 ‘줄을 길게 잡겠다’고 마음먹었다 해도, 그걸 지금까지 꾸준히 지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편지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항상 노력해볼 거예요. 저는 아직 꿈을 꾸고 있으니까요.” J에게 긴 답장을 썼다. J의 꿈을, 그리고 딸의 날갯짓을 지지해주는 어머니를 응원한다고.
이스트본(영국)=이향규 <후아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