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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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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과 답] 덕업일치의 어려움

모두 좋은 직업을 갖기 어려운 것처럼,
모두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것도 불가능하다네
등록 2020-07-12 21:06 수정 2020-07-17 09:33
영국에서는 청소년들이 여러 일을 경험하도록 장려한다. 영국에서 학생들이 엔지니어를 경험해보도록 주선하는 ‘투모로 엔지니어스’의 인스타그램 사진들. @tomorrowsengineers 화면 갈무리

영국에서는 청소년들이 여러 일을 경험하도록 장려한다. 영국에서 학생들이 엔지니어를 경험해보도록 주선하는 ‘투모로 엔지니어스’의 인스타그램 사진들. @tomorrowsengineers 화면 갈무리

큰아이 애린이 세상에 나왔을 때, 꼬물거리는 아기를 보며 세 가지를 소원했다. ‘몸은 건강하고, 마음은 편안하고, 머리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로 자라나게 해주세요.’ 크게 욕심내지 않고 그것‘만’ 바란다고 여겼는데, 돌이켜보면 실로 많은 것을 바랐다. ‘모든’ 것을 바랐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살면서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꾸 다른 것을 더 바랐다. 공부를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가면, 괜찮은 직업을 가지면… 좋겠다.

“직업은 중요하지 않아”

“아주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직업이나 상관없어. 일해서 생활비만 벌 수 있으면 직업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페인트칠 같은 거 해도 되고 사무실 청소, 아니면 엑셀파일 정리나 코딩 작업 같은 거 해도 돼. 그렇게 번 돈으로 내 시간에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 하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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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아이 린아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딛고 있는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종종 내가 알고 있는 경험적 세계가 도전받는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면서 성장한 아이들이 자기주장을 분명하게 표현할 때 그렇다.

직업과 관련해, 내가 산 세상에선 오랫동안 ‘좋은 직업’이란 게 분명했다. 연봉이 많고, 안정적이고, 사회적 위신이 높고, 동료들도 점잖고,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이라면, 거의 완벽한 직업이다. 이 중 서너 가지만 충족해도 훌륭한 직업이다. 전문직, 국가공무원, 대기업 정규직이 쉽게 떠오른다. 그런데 이런 직업은 많은 사람이 원하는지라, 그 경쟁에 뛰어들어 직업을 얻는 과정이 너무 고단하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전념을 다해도 낙오자가 더 많다.

나는 아이들이 그 경쟁에 뛰어들어 (쟁취하리라는 보장도 없는) 그 직업의 지위를 얻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기 원치 않는다. 그냥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그럭저럭 ‘먹고살 정도’의 수입을 얻기 바란다. 애린은 미술을 좋아하니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린아는 영화를 좋아하니 영화제작 관련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좋은 직업’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좋아하는 직업’을 찾도록 격려해주는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엄마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의 말을 듣고, 휘청했다. 나는 여전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과 연관 지어 생각했다. 이런 생각의 허점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것인데 놓쳤다. 모두가 다 ‘좋은 직업’을 갖기 어려운 것처럼, 누구나 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것도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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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별로 정해진 국가최저시급

아무래도 린아의 말이 현실적인 판단인 것 같다. 그런데 아무 일이나 해서 생활비를 벌고 나머지 시간에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최소한 두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아무 일이나 해도 생활이 가능한 정도의 돈을 벌어야 하고, 직업과 별개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보장돼야 한다. 어쩌면 여기서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가장 보수적으로 생각해서, 최저임금 받는 일을 한다고 가정하면, 영국에서 최저시급은 25살 이상이면 8.72파운드(약 1만3천원)다. 25살 이상이 주 40시간을 일하면 한 달에 1400파운드(약 210만원)를 벌 수 있다. 그런데 주 40시간을 일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시간이 없을 것 같다. 그럼 주 20시간만 일하자. 소득이 낮으면 ‘유니버설 크레디트’라는 정부보조금을 신청할 수 있다.

보조금 액수는 가족 수, 소득, 월세, 저축 등 여러 변수에 따라 다르다. 대강 계산해서 아이가 25살 넘고 싱글인데 최저임금으로 주 20시간을 일하고 700파운드를 번다고 하면, 정부지원금이 270파운드 정도 나온다. 집세 내지 않고 얼추 1천파운드(150만원)면 그런대로 혼자 살 수 있겠다. (월세를 내면 추가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더욱이 주 20시간이면 하루 평균 4시간 일하는 것이니, 좋아하는 일을 할 시간도 확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렇게 틈틈이 하고 싶은 일을 하다보면 그게 직업이 될 기회가 올 수도 있겠다. (나는 아직도 ‘직업’의 미련을 못 버 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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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사회복지의 모범 국가는 아니다. 그래도 일할 의지가 있으면 살 수 있다. 여기서 청년실업 문제는 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라고 부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혹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청년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일하려고 마음먹으면, 법적으로 13살부터 가능하다. (의무교육 기간에는 주말에만 근로가 허용된다.) 국가최저시급도 정해져 있다. 18살 미만은 4.55파운드(약 6800원), 18~20살은 6.45파운드(약 9700원), 21~24살은 8.20파운드(약 1만2천원)다. 16살인 린아 친구는 얼마 전까지 벽돌 쌓는 일을 해서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단다. 청소년이 여러 일을 경험하는 걸 사회적으로 장려하는 분위기다.

우리 아이들도 14살 때쯤, 학교에서 조직해준 ‘일 경험’(Work Experience)이란 것을 했다. 한 학년이 모두 일주일 동안 학교에 가지 않고 본인이 선택하거나 학교에서 연결해준 직장으로 출근해 일한다. 일주일 뒤, 고용주의 평가서를 받아 학교에 제출해야 한다. 평가서를 보니 팀워크, 의사소통, 문제해결, 일처리 능력같이 업무 역량에 관한 질문과 복장, 시간 준수, 고객 응대 같은 근로 태도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하단에는 전반적인 의견을 적는다.

딸이 일하는 식당에서 매일 식사를

애린은 근처 중등학교에 미술보조교사로 일했고, 린아는 동네 음식점에서 서빙을 했다. 애린은 매일 정장을 입고 출근했다.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린아가 서빙하는 식당에는 일주일 내내 손님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내 아이가 주문지를 받아들고 어른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대견했다. 사회 공간에 서 있는 아이는 집에서 보던 모습과 달랐다. 그렇게 하나하나 배우며 독립해가는 것 같았다.

엄마가 되었을 때 소원했던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묻는다. 중간 점검 같은 거다.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하고, 호기심이 많은 아이로 자라고 있는지. 혹시 나는 다른 욕심이 생겨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잊지 않았는지. 그런데 아이들이 잘 성장하려면 학교와 사회가 도와줘야 한다. 학교는 아이들이 진짜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찾도록 안내해주고, 사회는 어떤 일을 하든 기본 생활이 가능하도록 안전망을 갖춰주면, 그다음은 건강하게 자란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갈 거다.

이스트본(영국)=이향규 <후아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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