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한 여성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아기는 극소저체중아였고 청각과 시각, 인지발달 장애까지 있었습니다. 이 아이를 받아안은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비극적인 사건은 이 아기의 엄마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사람이었다는 데서 사람들 이목이 집중됐습니다. 아기 엄마의 이름은 진 티어니. 부유한 상류층 가문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란 아름다운 여성으로,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별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티어니의 삶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잘못된 팬심이 만들어낸 비극비극은 단 한 번의 스침 때문에 시작됐습니다. 티어니는 어딜 가든 사람들을 몰고 다녔지요. 그중에선 티어니를 열렬히 좋아해서 몸이 아픈데도 그를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열성 팬이 필사적으로 티어니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티어니는 임신 중이었고, 그 열성 팬이 풍진에 걸렸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티어니는 그 짧은 접촉으로 풍진에 걸렸고, 그의 딸은 선천성 풍진증후군을 가진 채 태어났죠.
보통 임신하면 여성들은 온갖 불안에 시달립니다. 이제 내 몸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고 연약한 아기가 내 몸속에 있고, 그 아이의 생사는 오로지 내게 달렸으니까요. 행여나 뭘 먹어서 혹은 먹지 않아서, 뭘 해서 혹은 하지 않아서, 뭘 겪어서 혹은 겪지 않아서 아기에게 이상이 생길까봐 전전긍긍합니다. 단지 기분만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임신은 면역력을 약화해 평소에는 별 이상 없이 지나갈 가벼운 질병도 임신부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풍진을 비롯해 수두·수족구·톡소플라스마증·리스테리아증 같은 질환은 원래 건강한 성인들은 거의 걸리지 않고, 걸리더라도 별문제 없이 지나가지만 임신부는 상대적으로 높은 확률로 감염되고 감염시 태아에게 치명적입니다. 태아만 위험한 게 아닙니다. 간염의 일종인 E형 간염은 일반적으로 3% 이하 치명률을 보이지만, 임신부에겐 20%로 올라갑니다. 2009년 전세계를 강타한 신종플루에 걸린 임신부 중에는 심각한 합병증인 폐렴에 걸릴 확률이 유의미하게 높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아기를 품었기에 한 번에 두 생명을 책임져야 하니 외부 침입에 대응하는 능력이 더 좋아져야 하지만, 임신 기간에는 오히려 감염에 더 취약하고 증상이 심각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면역계 패러독스연어는 힘들여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서는 훤히 노출된 강바닥에 알만 남긴 채 생을 다합니다. 연어는 알이었던 시절부터 오로지 세상을 혼자 힘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거북이는 그나마 모래를 파서 구덩이를 만들어 알을 덮어두지만,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북은 바다까지 기어가는 중에 늘어선 사냥꾼들의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에 태반이 목숨을 잃습니다.
사람의 아기는 엄마 몸속에서 안전하게 열 달 동안 보호받으면서 자라다가 태어난 이후에도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요. 이 과정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아름답고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인체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몸이 제대로 생존하려면 ‘내 것’과 ‘네 것’을 민감하게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깥에서 들어온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 몸은 그들의 먹잇감이자 서식처로서만 잠시 존재하다가 생명력을 잃을 테니까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면역체계입니다. 면역세포는 늘 레이더를 세우고 자신과 타자를 구별하며, 타자에 날 선 거부감을 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수많은 이물질로 둘러싸인 환경에서도 그럭저럭 제 몸 하나 간수하며 살아갈 수 있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임신은 매우 이상한 현상입니다. 태아는 유전자 절반이 엄마의 것이지만, 절반은 유전학적으로 완벽한 타인에게서 온 것이기에 모체의 면역체계는 태아를 거부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모체는 오히려 유전적 타인인 태아를 거부하기는커녕 소중하게 품어서 알뜰살뜰 먹여살리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이자 후천적 면역 개념에 관한 기초를 닦았던 세계적 면역학자 피터 메더워(1915~87) 경은 임신을 일종의 역설(Paradox)이라고 언급했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면역세포는 어떻게 자신과 타자를 구별할까요? 그건 각 세포가 자신의 유래에 따른 고유한 이름표를 표면에 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표는 여러 가지가 있고, 면역세포도 종류가 다양해서 각각 교차 확인을 합니다. 예를 들어 면역세포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T세포는 세포 표면의 이름표를 감지해, 이 모양이 자신의 것과 일치하는지 살펴봅니다. 일치하면 공격하지 않고, 일치하지 않으면 공격하는 거죠.
엄마의 자궁내막에 달라붙은 태아의 세포 중 가장 바깥에 있는 영양막세포는 이름표 자체를 거의 만들지 않아 T세포의 감시를 슬쩍 피해갑니다. 하지만 우리 몸의 면역세포에는 NK세포라는, 이름표 종류를 보는 게 아니라 이름표가 있는지 없는지 감지해 공격하는 종류도 있습니다. 태아의 영양막세포가 이름표를 만들지 않으면 T세포는 피할 수 있어도 NK세포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태아의 영양막세포는 모체의 NK세포 활성을 저해하는 물질을 분비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을 막아냅니다. 이런 복잡한 교란 과정을 거친 뒤, 결국 태아는 엄마의 면역거부반응을 이겨내고 무사히 자궁 내에 자리잡습니다. 이를 ‘면역학적 관용’이라고 하지요.
면역학적 관용은 매우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입니다. 엄마의 면역체계가 약화되지 않으면 모체의 면역세포는 태아를 공격할 테고 이는 높은 확률로 임신중단으로 이어집니다. 실제로 별다른 이유 없이 유산을 여러 번 한 여성의 혈액을 조사한 결과 NK세포 활성과 T세포 수가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유의미하게 높았다는 연구가 여러 건 보고됐습니다. 반면 면역세포 기능이 너무 떨어져버리면 이들이 태아를 공격하진 않겠지만, 다른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침입에 고스란히 노출됩니다.
모체가 병에 걸리면 태아 역시 생존을 보장하기 힘들어지니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체의 면역계가 취한 방식은 일단 외부 물질을 인식하는 민감도를 떨어뜨리는 대신, 인지되면 강력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임신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의 혈액을 채취해 각각 독감 바이러스를 넣어보니, 임신한 여성의 혈액에서 훨씬 더 심한 염증 반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임신 중 면역체계는 외부에서 들어온 물질을 구별해내는 능력이 떨어지지만, 일단 침입자라고 규정하면 자신과 아기를 지키기 위해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강도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임신부는 동일한 질병에 대해서도 더 심한 증상을 겪곤 하는데, 가끔은 이 증상의 강도 자체가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임신부는 일단 외부 감염체에 노출되는 일 자체를 줄이는 게 좋습 니다.
며칠 전, 제가 사는 지자체에서 임신이 확인된 임신부와 산후 6개월 이내 산모, 그리고 이들과 밀접 접촉을 하는 산후조리원 종사자에게 마스크를 자택으로 직접 배송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제안을 하고 실천하는 분들에게 이 글을 빌려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인류가 지금껏 지속해온 면역학적 관용을 사회적 관용으로 확산하는 데 노력하는 분들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며 바이러스와의 대응전에 힘을 보태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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