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에서 이전에도 몇 번 얘기했지만, 저는 아이 셋을 둔 다둥이 워킹맘입니다. 일하면서 아이 셋의 일과를 챙기는 일상은 시간 쪼개기와 멀티태스킹(다중작업)과 잠자는 시간 줄이기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전자우편을 확인하고 메시지에 답하고, 운전하는 동안 이북(e-Book)의 TTS(텍스트 읽기) 기능으로 내용을 파악하고,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에 글을 쓰는 것처럼 말이죠.
제가 일하면서 만난 많은 분이 제게 아이가 셋이 있다고 하면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봅니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아이들이 더 어리던 시절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편입니다. 언젠가부터는 다둥이 워킹맘인 저를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는 분이 늘고 있습니다. 그 말이 어쩐지 불편합니다. 제가 특별히 대한민국을 사랑해서 아이를 셋이나 낳은 것은 아니니까요. 단지 아이를 여럿 낳아 키우는 것이 애국자의 조건이라면, 아이를 적게 낳거나 아예 없는 분은 애국심이 부족하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제 반려자를 사랑했고, 그래서 그와 나를 닮은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싶었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선택한 거지,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으로 아이를 낳은 게 절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다둥이=애국자’ 공식이 형성된 데는 몇 년 전부터 우려가 커지던 출산율 하락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베이비붐 시대인 1959~1971년에 연간 출생아 수는 100만 명을 넘어서 인구증가율이 3% 넘었으나, 1970년대 초를 기점으로 이 그래프는 점점 하향곡선을 그렸지요. 그러던 것이 급기야 2020년에는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쇼크로 최저치를 기록해 인구 자연감소를 보였지요.
한 해에 사망하는 사람에 비해 태어나는 아이의 수가 적으면 인구 자연감소가 일어나는데, 이는 2020년에 우리나라 사람이 유난히 많이 사망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아이가 적게 태어나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국내 주민등록 기록에 따르면 2020년 사망자는 30만7764명인데 태어난 아이는 27만5815명에 불과해, 3만 명 넘게 인구가 줄었습니다. 출산율 역시 역대 최저인 0.84를 기록했는데, 이 숫자는 2021년 매우 높은 확률로 경신되리라고 예측돼(현재 2021년 상반기 출생률은 0.7 수준) 올해 역시 인구의 자연감소가 확실해 보입니다.
태어나는 아이가 해마다 줄어드는 건 피부로도 느껴집니다. 우리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150명 가까운 아이가 함께 입학했지만, 5년 뒤 작은아이들이 입학할 때는 80여 명으로 줄어 겨우 3개 반이 만들어졌으니까요. 넓은 운동장 가득 학생과 부모들이 메우던 초등학교 입학식을 기억하는 제게, 실내 강당을 절반 남짓 차지한 사람들의 모습은 조금 생소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통계치와 조사 결과가 우리나라 출생률과 인구의 감소율이 기록적으로 빠름에 따라 노령화 인구 비율이 급속도로 높아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대사회에서, 특히 자본주의사회에서 개인은 구성원인 동시에 생산과 소비의 주체입니다. 그런 인구가 줄어든다는 건 사회 구성에 구멍이 뚫리고 돈의 흐름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과 소비가 줄어드는 것을 뜻하지요.
시민이 없다면 사회가 돌아가지 못하고 국민이 없다면 국가는 필요 없어지니, 몇 년 전부터 정부는 온갖 저출생 극복 대책을 내놓고는 있지만 딱히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어 보이진 않습니다. 좀더 우려되는 점은, 저출생에 대한 우려 섞인 목소리 뒤에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들’에 대한 원망과 비난이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최근 점점 격화되는 성별 갈등에서 ‘군대 대 출산’ 문제가 매번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도, 정부가 마치 지역 특산물 홍보처럼 전국 가임여성지도를 만들어 여성을 재생산기계처럼 묘사한 일도 이런 심리가 뒷받침됐지요.
계급·지위와 출산율의 반비례는 당연생물학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구조적으로 임신과 출산, 수유와 양육의 상당수는 여성에게 더 많은 부담을 줍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아이 하나 키우는 게 정말 쉽지 않거든요. 이런 말을 하면, 혹자는 말합니다. 우리 어머니 시절에는 더 열악하고 혹독한 상황에서도 애만 잘 낳아 키웠다며, 요즘 여성들은 곱게 자라 어려움도 모르고 제 몸 하나만 아낄 줄 알아서 지나치게 몸을 사린다고요.
그러나 가진 것이 많아지고 삶이 윤택해질수록 아이를 적게 낳는 경향은 비단 최근의 상황이 아닙니다. 이미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절, 다윈의 사촌이자 뛰어난 생물학자였던 프랜시스 골턴이 우생학(優生學)을 창시한 이유도 ‘인류의 질적 향상에 이바지해야 할 신사숙녀로 구성된 상류 계급은 아이를 적게 낳는 데 반해, 오히려 솎아내야 할 열등한 계층이 아이를 마구 낳아대어 인류의 질적 저하를 가속한다’는 분석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골턴은 인류가 유전자풀의 질적 저하로 스스로 멸종하지 않으려면 질적으로 우수한 상류 계급의 혼인과 출산을 적극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상류 계급으로 갈수록 여성이 아이를 적게 낳는 현상은 농경시대 초기부터 발견된 경향이었습니다. 하루 빌어먹고 살기도 힘든 흥부네는 아이들이 주렁주렁 있었던 것에 반해, 먹고사는 데 지장 없던 놀부네는 자식이 적거나 없다고 묘사하는 것도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이었죠. 실제 제3세계 여성의 출산율은 산업화한 나라보다 월등히 높습니다.
인류학자 세라 블래퍼 허디는 저서 <어머니의 탄생>에서 계급·지위와 출산율의 반비례 관계에 대해 당연하다는 해석을 내놓습니다. 여전히 수렵채집사회를 살아가는 소수민족의 여성은 대개 십대 후반 첫아이를 낳은 뒤, 4~5년 터울로 평생 동안 6~8명의 아이를 낳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 중, 무사히 성인이 되어 자기 아이를 낳아 가계를 이어가는 이는 소수입니다. 실제 수렵채집사회에서 여성의 40%는 생식 가능한 연령까지 살아남은 아이를 단 한 명도 갖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이의 생존에는 건강한 유전자도 중요하지만,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먹이고 입히고 키울 자원과 이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줄 안전하고 안정적인 환경이 필요합니다. 이런 조건이 충분하다면 아이의 생존율은 눈에 띄게 높아집니다. 20세기 후반 선진국에서 여성이 평생 낳은 아이의 수와 성인이 되는 자녀 수가 비슷해진 것은 이런 조건이 충족됐기 때문이지요.
자원이 풍부하고 환경이 안전해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무사히 자랄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 여성은 아이를 많이 낳지 않아도 유전자가 존속될 것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으니 아이를 많이 낳지 않습니다. 인간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은 자연스러운 경험이겠지만 절대 안전하지 않은 일이니까요. 우리나라가 1970년대 이후 고도성장기에 들어서면서 출산율이 꾸준히 떨어진 것은 이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물론 여기에 교육 기회 확대로 인한 여성의 사회 진출 증가와 피임약 개발에 따른 출산력 조절 역시 여성의 출산권에 대한 선택지를 다양화했고, 많은 여성이 출산을 미루는 쪽으로 그 선택권을 썼지요. 하지만 최근 상황은 좀더 암울합니다.
임신한 쥐는 환경이 안전하고 편안하면 새끼를 낳아 본능적으로 프로그램된 대로 새끼를 깨끗이 핥아주고 배불리 먹이며 알뜰살뜰 보살핍니다. 하지만 아무리 충실한 어미쥐라도 출산 뒤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갓 태어난 새끼를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물어 죽여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심지어 임신 중에 환경이 나빠지면 자궁 내 새끼들을 도태시켜 다시 흡수하는 현상까지 관찰됩니다.
우리는 수천㎞를 헤엄쳐와 알을 낳고 기진맥진해 죽어버리는 연어나, 자기 몸이 완전히 뜯어먹힐 때까지 새끼를 등에 지고 다니는 어미거미의 일화에 익숙합니다. 자식을 위해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주는 어미의 희생적인 모습에 ‘모성’이란 이름을 붙여 본능이라 칭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종 새끼를 아무렇지 않게 죽여버리거나 심지어 먹어치우는 어미들의 모습을 끔찍한 악몽처럼 여기곤 합니다.
앞서 언급한 <어머니의 탄생>에서 저자는 이런 희생적인 모습만이 모성의 전부이자 본능으로 여기는 관점이 매우 편협한 시각임을 지목합니다. 모성이 유전자를 존속하기 위한 본능의 일부일 수는 있지만, 그 모성의 표현형이 모두 무조건적인 희생만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특히 수명이 짧고 일생에 단 한 번 번식하는 물고기나 절지동물과 달리, 수명이 길고 여러 번 번식하는 다회성 번식 형태를 지닌 포유류의 경우 종종 어미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여러 번 가능한 번식 기회에서 특정한 한 번에 모든 것을 걸기에는 투자 대비 효용도가 떨어집니다. 특히 자원이 부족하고 환경이 열악하다면 한 번의 번식 기회에 섣부르게 전액 투자했다가는 자신과 자손의 생존 가능성을 모조리 날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 일단은 자손의 번식보다는 자신의 생존을 우선시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길게 보면 집단의 번성 가능성도 높이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의 포유류 조상이 이걸 깨달아서 의식적으로 조절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본능은 그럴 만한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런 습성을 지닌 존재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컸을 테고, 이들은 그런 성향을 물려줬을 것이며, 우리는 모두 그들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라 블래퍼 허디는 모성이란 희생적인 천사의 모습이기보다는, 냉정한 사업가의 특성에 더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모성이란 ‘자신과 아이와 나아가 이 아이가 낳을 미래 아이들의 생존’까지를 목표로 하는 냉정한 서바이벌 프로젝트에 투입된 참여자가, 주어진 한정된 자원을 최적으로 운용해 최대의 생존율을 만들어내기 위해 취하는 다양한 전략의 집대성인 셈입니다.
가슴과 머리로 아이를 낳아 키우도록모성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무조건적인 희생에서 자녀를 버리는 일까지의 극단 사이에 놓인 다양한 어머니의 모습을 좀더 다양한 시각으로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삶의 상당수를 유전적 본능에 의존하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본능에 더해 학습과 경험과 윤리적 의식에도 크게 영향받습니다. 그러니 모성이란 것도 본능적인 부분에 더해 학습으로 배운 것, 경험으로 얻어진 것, 윤리적 의식에 따라 지켜야 하는 것 등으로 구성해야 하는 다채로운 존재이죠.
그동안 모성의 희생적 표현형이 강조됐다는 이유로, 그런 모습을 선택하지 않는 여성을 이기적이고 냉정한 존재를 넘어, 애국심이 부족한 비도덕적인 존재로까지 몰아붙이는 건 오히려 모성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셈이죠. 여성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기 전에 그들의 본능과 지능이, 가슴과 머리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가능한 환경이라고 느끼도록 하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요.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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