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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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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지혜로 바꾼 두더지쥐

동물 세계의 다양한 할머니들… 현명한 지도자 범고래,
사회적 지지 하이에나, 오랜 세월의 힘 벌거숭이두더지쥐
등록 2021-07-18 07:49 수정 2021-07-22 00:25
동물 종류만큼 동물들의 할머니 세계도 다양하다. 범고래. REUTERS

동물 종류만큼 동물들의 할머니 세계도 다양하다. 범고래. REUTERS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흔한 밈 가운데 ‘할머니에게 아이를 맡기면 생기는 일.JPG’ 유의 것이 있습니다. 턱선이 날렵했던 아이가 할머니 집에서 몇 달을 지낸 뒤 볼살이 터질 만큼 통통해져 돌아왔다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 아래 댓글로 저마다 다양한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댓글은 많지만 결은 비슷합니다. 늘 자신은 뒷전인 채 손주들에게 더 먹이고 입히고 위해 주시던 할머니에 대한 애잔하고 아련한 이야기이죠. 할머니에 대한 인상은 대개 그렇습니다. 조금 촌스럽고 투박하지만, 언제나 날 품어줄 것 같은, 훈육이 없는 사랑을 무조건 베풀어줄 것 같은 그런 존재로 말이죠. 그런 ‘모든 것을 품어주는 할머니’에 대한 이미지는 이 각박한 세상에 작은 위안을 주는 마음의 쉼터로 남을 수 있지만, 과연 이런 이미지만이 할머니에게 주어져야 하는 전부일까요?

늘 예측 가능한 존재가 돼야 하는 사람들

얼마 전 즐겨 보는 웹툰 <유부녀의 탄생>에서 한 에피소드를 보고 마음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여기 한 여성이 있습니다.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살림살이를 돕다가 일찍 결혼해 세 아이를 키우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의 뒤치다꺼리까지 도맡아 하다가 이제야 겨우 자신만의 시간이 생긴 여성입니다. 노년이 돼서야 겨우 자기 이름을 찾을 기회가 주어지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어머니 혹은 할머니라는 대명사뿐이었지요.

그러던 그가 뒤늦게 공부를 시작합니다. 야학을 다니며 중등과정·고등과정 검정고시를 마치고 내친김에 대학까지 진학하려 하지만, 이쯤에 이르러서는 그때까지 만학도의 공부를 지지해주던 많은 이가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입니다. 이에 그는 당황하고 분노합니다. 자신의 꿈과 삶을 접은 채 그들의 꿈과 삶을 온전히 쌓아올리기 위해 애썼는데, 이제야 늦은 꿈을 이루려는 그에게 지원은 못할망정 은근히 꺼리는 눈치였으니까요.

그런 그를 보며 작가는 생각합니다. ‘어머니란(혹은 할머니란) 늘 나를 위해 기다려주고, 내가 해달라는 대로 맞춰주고, 가끔 한 번씩 사드리는 외식에 기뻐하는, 그렇게 예측 가능한 존재’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기에 그저 집에 머무르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죠. 어머니 혹은 할머니에 대한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이미지가 확고할수록, 이들의 자아 찾기는 주변 사람들에게, 특히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범고래와 하이에나와 벌거숭이두더지쥐, 세 동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경험 많은 암컷 개체가 무리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동물 세계 전체를 보면 암컷이 집단의 리더인 경우는 드물지 않지만, 포유류에선 암컷 리더가 상대적으로 드뭅니다. 아무래도 암컷이 임신에서 출산, 수유의 전 과정을 책임지는 포유류의 경우, 재생산에 대한 부담이 큰 게 이유일 듯합니다. 누군가는 이를 이유로 인간 여성의 리더십에 의문을 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비록 소수이지만 포유류 암컷 리더가 이끄는 종에서 공통된 특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이에나. REUTERS

하이에나. REUTERS

할머니 가설을 증명해준 범고래

먼저 범고래를 살펴볼까요. 범고래는 인간이 아닌 동물 가운데 최초로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을 증명해준 동물입니다. 할머니 가설이란 인간 여성이 자연적인 한계수명을 맞이하기 훨씬 전에 폐경을 경험하고 생식능력이 단절되는 현상에 대한 진화적인 설명입니다. 인간에게 임신과 출산은 위험한 일이기에 나이 든 여성은 스스로 번식하는 것을 중단하고, 자신이 낳은 아이들의 자녀를 키우는 일을 돕는 것이 오히려 가계의 생존율을 높인다는 가설이죠.

범고래 암컷은 인간처럼 폐경을 겪고, 그 뒤에도 수십 년을 더 살아갑니다. 범고래 집단을 연구한 과학자들은 나이 든 어미가 낳은 새끼의 사망률은 젊은 어미에게서 태어난 새끼보다 1.7배 높은 데 비해, 할머니가 없는 손주 고래의 사망률은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는 경우보다 무려 4.5배 높아짐을 보고했습니다. 나이 든 암컷 고래는 스스로 번식하기보다 손주 고래를 돌보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것이 집단 전체의 번성과 자신의 유전자를 존속하는 데 훨씬 더 유리한 셈이죠. 집단의 번성과 유전자 존속에 유리하다면 진화의 무게추는 그쪽으로 기웁니다. 게다가 암컷 범고래는 수컷보다 수명이 훨씬 길기에,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습득한 노하우는 자연스레 나이 든 암컷 범고래가 집단의 구심점이 되게 합니다.

앞의 연구에서도 할머니 고래의 존재가 손주 고래의 생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할머니가 단지 자신이 잡은 먹이를 나눠주기 때문만이 아니라, 먹이가 부족하면 어디로 가서 구할 수 있는지, 위험이 닥치면 어떻게 집단을 이끌고 탈출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노하우와 리더십의 영향이 더 크다고 합니다. 범고래 할머니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넘어 ‘현명한 지도자’의 구실도 겸하는 것이죠.

점박이하이에나의 경우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점박이하이에나는 수십 마리가 클랜(Clan)이라는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는데, 리더는 그 집단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경험이 많은 암컷입니다. 보통 수컷이 암컷보다 체구가 더 큰 다른 포유류와 달리, 하이에나는 암컷이 수컷보다 20% 가까이 더 커서 힘으로도 절대 수컷에게 밀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점박이하이에나의 클랜에서 암컷은 원래 태어난 클랜에서 뿌리내려 평생을 살아가지만, 수컷은 성체가 되면 태어난 집단을 떠나 다른 클랜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이는 근친번식을 통한 유전자풀의 단일화를 막기 위한 현상인데, 그렇기에 수컷은 집단에서 이방인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하이에나는 강한 사회성을 지닌 동물이라서, 집단 내 개체들 사이에 알력 다툼이나 서열 싸움이 일어나면 각 개체의 물리적 강함 차이보다는 집단에서 받는 동료들의 지지 차이가 승패를 가르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됩니다. 그러니 암컷과 수컷이 맞붙으면 원래 자신의 클랜에서 오랜 세월 친분을 쌓아온 동료들이 많은 암컷을 외부에서 유입된 이방인인데다 각자 다른 클랜 출신이라 충분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수컷이 이기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범고래 암컷이 오랜 수명으로 얻은 유용한 노하우를 가지고 집단 리더로 추앙된다면, 점박이하이에나 암컷은 물리적으로 더 큰 체구와 든든한 사회적 지지를 바탕으로 리더로 군림하는 거죠.

벌거숭이두더지쥐. 연합뉴스

벌거숭이두더지쥐. 연합뉴스

사람으로 치면 800살 넘는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동물은 벌거숭이두더지쥐입니다. 사하라사막 이남 동아프리카에 분포하는 쥐의 일종으로, 땅 밑에 굴을 파고 군집을 이뤄 살며 보통의 쥐와 달리 몸에 털이 없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쥐의 일종이다보니 몸집도 작고, 나무뿌리를 먹고 살기에 땅 위로 올라오는 일이 드물어서 이들이 사람들 눈에 띈 건 1980년대 들어서입니다. 이들의 생활상은 더없이 독특해서 학자들의 눈길을 끌었지요.

벌거숭이두더지쥐는 포유류 중 유일하게 개미나 벌과 같은 사회성 곤충의 특성을 보입니다. 다시 말해, 생식능력을 지닌 우두머리 암컷 한 마리와 수컷 1~3마리, 생식능력이 없는 개체 수십~수백 마리가 하나의 군집사회를 이뤄 삽니다. 벌거숭이두더지쥐 집단에서 새끼를 낳는 것은 우두머리 암컷뿐입니다. 우두머리 암컷이 방출하는 독특한 냄새 분자는 집단에서 다른 개체들의 생식력을 억제하고, 리더의 독특한 울음소리는 개체 하나하나의 행동을 통제해 이들이 번식보다는 자신의 시중을 들도록 합니다. 거의 예외 없이 우두머리 암컷은 가장 나이가 많은 암컷입니다.

벌거숭이두더지쥐는 극단적으로 수명이 긴 동물로 알려졌습니다. 벌거숭이두더지쥐 군집을 처음 발견해 실험을 시작한 것이 1980년대 말인데, 당시 새끼들이 아직 살아 있기에 이들의 최대 수명이 30년 이상임은 알았지만 정확한 한계수명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보통 쥐과 동물의 수명이 3년을 넘지 않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생명력이죠. 이들이 이토록 오래 사는 이유는 이들은 (거의) 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사람으로 치면 800살 넘는 나이가 돼도 여전히 건강한 새끼를 낳을 수 있고 심장 기능이나 몸의 구성 성분, 뼈 상태, 신체 대사 활성도에 특별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래 살아도 늙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 살아남은 개체일수록 그들이 겪은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우두머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집단 내 우두머리만이 생식능력을 갖추는 이들 동물의 특성상,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암컷을 중심으로 집단이 구성되기 마련이죠. 벌거숭이두더지쥐의 리더는 오랜 세월을 버텨낸 끈기와 권력의 힘으로 집단을 존속시킵니다.

인간 할머니들 모습도 다양하다네

비록 소수지만 나이 든 암컷이 리더인 포유류 집단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개체의 수명이 길고, 강한 유대감을 지닌 사회집단의 일원이라는 거죠. 하지만 각각의 개체군에서 보여주는 암컷 리더들의 특성은 다릅니다. 누군가는 현명함과 리더십으로, 혹은 강력한 힘과 사회적 지지를 바탕으로, 때로는 세월의 무게감과 통제력을 바탕으로 집단을 이끌지요. 역시나 수명이 길고 사회집단을 이루는 것이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이라면 지금의 할머니상은 지나치게 정형화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서 여성이 사회적 리더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다만 다양한 생물의 모습을 통해, 연륜을 지닌 인간 여성들이 보여주는 모습도 그만큼 다양하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셨으면 합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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