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인터넷에서 ‘마음 따뜻해지는 순간’(What a Heartwarming Moment)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브라질에서 열린 주니어 요리경연대회, 제한시간은 거의 다 됐지만 이미 요리는 끝났습니다. 이제 요리에 화룡점정을 찍을 소스만 올려주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새 소스병의 뚜껑이 너무 빡빡해 열리지 않았죠. 앞치마로 물기를 닦고 칼끝으로 틈새를 벌려 뚜껑을 열기 위해 애쓰지만, 뚜껑은 요지부동입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이를 지켜보던 패널들은 안타까워합니다. 순간, 참가자는 병을 들고 패널석으로 뛰어갑니다. 아까부터 제일 앞에서 이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중년 신사는 재빨리 참가자에게서 병을 건네받아 망설임 없이 뚜껑을 돌립니다. 그의 손에서 뚜껑 열린 병을 다시 받아든 참가자는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가 시간 내에 요리를 완성하지요.
영상의 길이는 30초 남짓으로 매우 짧지만, 보는 이를 뭉클하게 하는 무엇이 있습니다. 영상 어디에도 그들의 관계에 대해 나오지 않지만,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압니다. 참가자와 패널은 부녀 사이라는 것을요. 딸은 곤경에 처하자 지체 없이 아버지를 찾고, 아버지는 기꺼이 딸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모습에서,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마음으로 느껴지니까요.
이 영상이 주는 감동의 물결이 지나가자, 약간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영상 속 젊은 여성이 겪은 상황은 여성들에게는 흔한 일이거든요. 저만 해도 아이들에게 토마토파스타를 만들어주려고 면을 삶았다가 도저히 소스병을 열 수 없어 결국 오일파스타로 변경한 적이 있고, 휴게소에서 병커피를 샀다가 뚜껑을 따지 못해 마시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더욱 어이없는 사실은 남편에게 그 얘기를 해주고 소스병을 내밀었더니, 그는 별 힘을 들이지 않은 채 쉽게 뚜껑을 열었다는 거죠. 남녀의 악력(손아귀힘)이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 걸까요?
남녀 간 악력 차이에 대해 최근 이슈가 됐던 자료는 소방공무원 시험에서 남녀 합격선의 차이였습니다. 2019년 소방공무원 체력 검정 시험은 악력·배근력·윗몸굽히기·제자리멀리뛰기·윗몸일으키기·왕복오래달리기, 여섯 항목을 측정하는데 각 항목에 1~10점 배점 기준이 있고 총 60점 만점에 30점 이상을 받아야만 커트라인을 통과할 수 있지요. 그런데 각 항목의 배점표를 보면 남녀 기준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표를 보면 악력 항목의 경우(표1 참조), 여성의 만점(10점)은 37㎏인 데 비해 남성은 최하점이 이보다 높은 45~48㎏입니다. 어느 정도 차이가 나리라고 짐작했지만, 이렇게 차이가 크다니 약간은 충격이었습니다. 배근력과 제자리멀리뛰기 등 근력이 필요한 항목에선 역시나 여성의 만점 기준이 남성의 최하점 기준에도 못 미치더군요.
소방공무원은 체력적으로 뛰어난 인재를 뽑는 시험이니 기준이 남다른 게 아닐까 싶어 남녀 평균 악력 자료(표2 참조)도 살펴봤습니다. 2017년 나온 논문 ‘한국인의 악력 평가를 위한 예측모형 개발’은 놀라웠습니다. 동일 연령대 여성의 악력은 남성의 60~70% 수준으로 측정됐습니다. 가장 악력이 강한 30대 여성의 악력 평균조차 남성 중 가장 약한 80대보다 낮게 측정됐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몸은 단순히 2차 성징을 나타내는 신체 부위만 다른 게 아닙니다. 2020년 발표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20대 남녀의 평균 키와 몸무게는 남성 173.8㎝/74.8㎏, 여성 161.4㎝/56.9㎏이며, 30대는 남성 174.1㎝/77.3㎏, 여성 161.2㎝/58.1㎏으로, 키는 10%, 몸무게는 23% 정도 차이가 납니다.
눈으로 보이는 차이 외에 남녀는 근육량, 체지방량과 지방 배치 분포, 골질량과 골밀도 등 신체 구성 비율에도 차이가 있고 혈액당 적혈구의 양, 면역세포의 양, 감각세포 분포 등에도 차이가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남성은 여성보다 골격근이 더 많고 골질량과 골밀도가 더 큽니다. 즉, 여성보다 뼈가 더 크고 단단하며 근육이 더 많다는 거죠.
여성은 골격근이 적은 대신 체지방량이 높고, 지방 중에서 피하지방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습니다. 이에 따라 남성은 신체적으로 힘이 세고 강하지만, 여성은 혹독한 상황에서 버티는 지구력이 높고 체온 조절 능력도 상대적으로 더 좋습니다. 또한 혈액당 적혈구 수는 남성이 여성보다 10% 이상 많지만, 백혈구와 림프구 등 면역세포의 비율은 여성이 더 높습니다. 이는 심폐지구력은 남성이 더 높지만, 질병 저항력은 여성이 더 높다는 뜻입니다. 이 수치는 어디까지나 평균값으로, 양극단의 예외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 외에 남녀는 필요로 하는 호르몬의 종류와 양, 특정 약물에 대한 반응 정도, 질병 감수성과 외부 자극 민감성 정도가 평균적으로 차이 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이가 어른을 그대로 축소해놓은 게 아니듯이, 남성과 여성 역시 단지 생식기 모습만 다른 게 아닙니다.
남녀의 신체 차이는 단지 줄자와 체중계로 측정하는 범위를 넘어 다양한 분야로 확장됐습니다. 그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혹은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 프레임입니다. 전자는 미국의 카운슬러이자 작가인 존 그레이가 1992년 발간한 책 제목으로, 남성과 여성은 생각하는 방식과 사고 흐름 체계가 서로 다른 행성 출신의 외계인만큼 다르기에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면 이 차이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게 필요하다는 주장이었지요. 후자의 경우, 오스트레일리아의 부부 작가 앨런 피즈와 바바라 피즈가 1999년 저술한 책 제목으로, 역시 남녀의 심리학적 차이를 진화생물학적으로 접근해 인기를 끌었던 책입니다.
저자들이 주장하는 남녀의 심리학적 차이에 대해서는 찬반 의견이 분분합니다. 남녀 사이 미묘한 갈등의 원인을 기막히게 짚어냈다는 평도 있고, 사소한 사례를 지나치게 일반화했다는 비판도 있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남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남녀의 심리적 차이는 계측이 쉽지 않습니다. 애초에 심리 상태의 다양성은 신체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가짓수가 많고 그것을 명확하게 측정하는 줄자나 체중계 같은 표준화된 기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심리 상태의 차이로 여겨지는 많은 것이 신체 차이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한 예로 여성들은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회피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에 대해 누군가는 뇌과학과 진화심리학 측면에서 접근합니다. 하지만 신체 차이 자체가 갖는 영향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앞선 통계표를 보면, 건강한 성인 여성조차 타고난 근력으로만 본다면 사춘기에 갓 들어선 소년이나 일흔을 넘긴 남성 노인보다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문명화된 사회가 아닌 자연 상태에서 신체적 근력 차이는 생존을 위협하는 차이가 될 수 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 약한 개체의 생존 방식은 회피 혹은 순종입니다. 맞서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상대에 대해서는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상대를 도발하지 않는 것이 생존 확률을 높이는 방식이니까요.
이는 나아가 여성/남성의 특성이라고 여겼던, 혹은 이를 넘어 여성/남성이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강요됐던 수많은 심리적·사회적 특성이 사실은 서로 다른 몸을 가지고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던 선조들의 생존 투쟁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거죠. 그렇다면 신체적 차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로 인한 모든 결과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한때 인터넷에선 평등과 공평의 차이에 대한 이미지가 유행했습니다. 재미있는 야구 경기가 펼쳐지는 담장 너머에 세 사람이 있습니다. 담장이 너무 높아 경기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각각 발판을 하나씩 주는 것은 이들을 평등(Equality)하게 대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 키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발판 위에 올라서도 여전히 담장 너머가 보이지 않는 이가 있습니다. 타고난 조건과 상관없이 모두를 똑같이 대우하는 건 동일할 수 있어도 정의롭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종종 타고난 차이를 더욱 부각하는 교묘한 차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타고난 조건을 고려해 부족한 이에게는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는 공평(Equity)함이 더욱 정의롭다고 주장하는 이가 생겨났습니다.
모든 종류의 차별 금지 조항은 이에 기인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공평함이 정의롭기는 해도 이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역차별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남들에게 다 돌아가는 혜택에서 나만 제외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다르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야구장 경계에 담장 대신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철망을 친다면 어떨까요? 이 경우, 세 사람 모두 어떤 도움 없이 경기를 자유롭게 즐길 수 있습니다. 시스템을 바꿔 타고난 차이가 불편함 혹은 불가능으로 이어질 가능성 자체를 차단한 것이죠.
우리는 더 이상 3만 년 전 사바나의 평원에 살던 소규모의 유인원 무리가 아닙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타고난 몸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지만, 인구는 수십억 명으로 불어났고 지구상 모든 대륙에 발붙이고 살며, 심지어 잠깐이지만 지구 밖 달에도 다녀왔을 정도로 커다랗고 복잡하고 발전된 사회를 이뤄냈습니다. 이런 사회를 만들어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나이와 성별과 피부색의 다름을 차별의 근거로 이용하고, 이 차이로 인한 불편함을 감내해온 사회적 약자들에게 돌아갈 몫이 크다고 투덜대며 갈등의 골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남녀가 자동차를 타고 달린다면이쯤 되면 생각의 방향을 바꿔볼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회적 평등과 결과적 평등을 애써 맞추는 것을 넘어, 모두의 차이가 애초에 차별로 이어질 수 없도록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타고난 근력이 부족하니 여성과 남성의 선발에 차이를 두었는데, 누군가는 이것 자체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타고난 신체 조건이 달라도 다르게 대우할 필요가 없다면 어떨까요? 남성과 여성이 달리기경기를 하면 대개 남자가 이기지만, 둘 다 자동차를 타고 달린다면 남녀의 차이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근력을 보강해주는 웨어러블(착용하는) 로봇이나 신변의 위협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치안시스템의 고도화는 타고난 차이가 차별로 이어질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면서 낭비되는 자원을 획기적으로 줄여줄 겁니다. 시스템을 바꾸는 것, 그것이 남은 시간 우리 인간이 풀어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의 ‘책으로 배운 생물학, 몸으로 겪은 생물학’의 연재를 마칩니다. 2년간 격주 연재해주신 필자님 감사합니다.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조금만 기다리시면 다시 연재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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