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아끼는’ 책장에 ‘각별한’ 자리를 차지한 책은 순정만화다. 그 만화책만 300여 권이 있다. 3월3일 만난 이마루(35) 작가는 최근 책장에 한 권을 추가했다. 순정만화를 보고 자란 자신의 성장기를 쓴 에세이 (코난북스 펴냄)이다.
순정만화 잡지를 보던 시절이 작가는 ‘만화 키드’다. 서재를 만화책으로 채우고 만화에 관한 책까지 낸 엄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만화를 보고 그렸다. 충청남도 천안에 있는 부모님 집 서재에는 만화책 2천여 권이 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이 작가는 자기만의 방에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책을 채웠다. 집에 들여놓은 만화책 중에서 중·고등학교 때인 1990년대에 나왔지만, 지금은 절판된 책들을 가장 아낀다. “이랑 를 여전히 자주 봐요. 의 경우 어릴 때 일기장에 마음에 드는 내레이션을 옮겨 적었어요. 책이 닳고 닳았어요.”
그의 청소년 시절은 순정만화 시대였다. 1988년 최초의 순정만화 잡지 가 나오고 뒤를 이어 1990년대 등이 등장해 순정만화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잡지들 덕분에 만화, 그중에서도 순정만화에 푹 빠졌다.
“중학교 선생님인 친구 엄마가 학생들에게서 뺏어온 순정만화 잡지 를 친구네 집에서 봤어요. 초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그때부터 순정만화에 관심을 가졌어요. 그다음부터는 순정만화 잡지를 사서 봤어요.”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집안 환경 덕분에 만화에 대한 애정을 키워갈 수 있었다. 만화 애호가 어머니 박경이(63)씨 영향이 컸다. 박씨는 “고우영 작가의 를 몰래 들고 다니며 읽던 여고생”이었다. 중학교 교사가 된 뒤에는 만화를 수업에 활용하는 방법을 소개한 (2004)를 펴내기도 했다. 당시 박씨는 다양한 소재와 기발한 상상으로 허를 찌르는 만화들 속에 푹 빠져 있는 ‘짱구 선생’이었다.
박씨는 서재에 꽂힌 2천여 권의 만화책을 보면 오랜 시간 함께한 “좋은 친구”가 옆에 있는 것 같다. “여전히 고우영 작가의 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요. 20살 때 산 책이에요. 오래돼 닳고 손때가 많이 묻었어요. 다행히도 몇 년 전에 복간돼 그 만화책을 또 샀어요.”
박씨는 최근 딸 이마루 작가가 낸 를 서재에 꽂았다. 딸 역시 자신의 만화 사랑을 닮아 뿌듯하다. “아이들과 어릴 때부터 같이 만화를 봤어요. 만화가 아이들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던 저로서는 자식을 통해 그걸 확인한 것 같아 기쁘고 행복해요.”
만화를 사랑하는 모녀지만 취향은 확실히 다르다. 이 작가는 엄마가 사놓은 고우영 작가의 만화 등 소년만화를 많이 보고 자랐지만 순정만화만 좋아한다. “소년만화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여성의 구원자로 주로 등장하고 여성은 아련한 첫사랑의 표상으로 나와요. 여성이 수동적 캐릭터로 등장하죠. 만화뿐 아니라 신데렐라 드라마, 비련의 여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도 좋아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여성 창작자가 그린, 여성이 주인공인 순정만화는 달랐다. 다양한 성격과 이력을 지닌 여성들이 서사의 중심이 된다. 여주인공 1인칭 시점으로 펼쳐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가장 좋아하는 권교정 작가의 작품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와 캐릭터를 만났다. 대등한 위치에서 성별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남녀 캐릭터가 있었다.
이 작가가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만화 속을 부유하는 애달픈 감정들, 올곧은 사랑을 위해 여주인공들이 내보이는 용기나 순수함”을 볼 수 있어서다. 등장인물의 독백과 입체적인 관계로 그려지는 만화 속 감정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섬세했다.
이 작가는 순정만화를 통해 넓고 새로운 세계를 배웠다. 특히 유시진 작가의 은 자신의 대인관계와 세계관을 결정지었다. 이 작품은 고등학생들 이야기에 관계에 대한 열망, 다채로운 감정의 변화를 담았다. 동성애와이성애, 연애감정과 우정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나누지 않고 등장인물의 감정을 충실히 묘사한다. 잊히지 않는 만화 속 대사가 있다. “음, 사랑이든 우정이든 간에 네 감정에 거짓 없이 행동하면 어쨌든 후회는 없을 거야. 여자가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어떤 이들한테는 자연스러운 거니까.” 박희정 작가의 를 보면서 미국 중서부에 있는 작은 호텔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배웠다.
이 작가는 “내 인생의 대사는 순정만화로 채워져 있다”고 말한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다채로운 순간에 순정만화가 떠오른다. ‘요즘 좀 괜찮잖아?’라며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을 때마다 박은아 작가의 만화 에 나오는 “어느 시간에서든, 어느 공간에서든 반짝이는 것이 있다면 잘 간직해야지. 다듬지 않아도 그건 내겐 보석이니까”를 되새긴다.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고서 사랑에 냉소적으로 될라치면” 오바타 유키 작가의 에 나오는 “젊은 날의 우리 마음속에 확실히 영원은 있었다”를 곱씹는다. 그렇게 만화 대사를 떠올리는 자신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푹푹 발목까지 빠지는 모래밭 속에서 방향감각을 잃을 때도 있겠지만 나는 혼자가 되더라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알려준 감정들이 나를 자라게 했으니.”
그 특별한 반짝임을 알아채지 못했던순정만화는 ‘소녀 취향’이라는 이유로 저평가돼왔고 1980~90년대 인기를 끈 추억의 매체로 여겨졌다. 웹툰 시대에도 순정만화책을 보는 이 작가에게는 이런 편견이 안타깝다. “저처럼 만화책을 보는 이도 여전히 많아요. 순정만화 잡지도 나오고 있고 천계영 작가, 윤지운 작가, 임주연 작가 등 여전히 활동하는 작가도 많고요. 끝난 문화, 추억이 아니랍니다.”
이 작가는 순정만화를 다시 펼치면 그때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의 면면이 새롭게 보일 거라 말한다. “순정만화에는 우리조차 잊고 있던, 그때는 그 특별한 반짝임을 알아채지 못했던 수많은 여자의 이야기가 있어요.”
글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