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사태’ 초기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이 촛불을 들었다. 과거 ‘정의’의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은 명문대생들이 들어올린 ‘공정’의 촛불 앞에 멘붕에 빠졌다. 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미래 한국의 ‘새로운 엘리트’가 될 거라는 점이다. 이들은 조국 사태를 기화로 가시화된 ‘386 엘리트’의 위선과 가식을 고발했다. 조국 사태 이면에 구엘리트와 신엘리트의 충돌이 있었던 셈이다.
(후마니타스 펴냄)은 구엘리트와 다른 정체성으로 무장한 미국판 ‘신엘리트’의 실체를 세인트폴이라는 미국 최고 명문 사립고 학생들을 통해 그려낸 세밀화다. 저자 셰이머스 라만 칸은 세인트폴 졸업생으로, 모교로 돌아가 교사로 일하면서 자신이 세인트폴을 다닌 1990년대와는 판이한 2000년대 세인트폴의 ‘새로운 엘리트’를 마주한다.
‘새로운 엘리트’들은 뭐가 가장 다를까. 바로 ‘특권의식’이다. 1990년대 세인트폴의 유색인 학생들은 백인 학생들이 사용하는 곳과는 다른 기숙사에 사실상 ‘격리’돼 있었다. 학교는 무작위 기숙사 배정을 하려고 했지만, 유색인 학생들이 항의했다. 록펠러나 밴더빌트 같은 ‘가문’ 출신들이 성공한 전문직 부모를 둔 것이 전부인 유색인 학생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저자가 2000년대 다시 돌아간 세인트폴에는 세습형 특권층의 특권의식이 ‘멸종’한 상태였다. “이미 성공의 열쇠를 쥔 양 행동하는 특권층 아이들은 세인트폴의 치부로 여겨지며 멸종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이들은 ‘세인트폴에 올 자격이 없다’라는 분위기마저 있었다.
세인트폴에 올 수 있는 자격이란 무엇일까? 능력이다.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세습 자본 수입이 압도적이었던 부자들과 달리 임금소득만으로 세계적인 부호 반열에 오른 ‘자수성가형 부자’들이 출현했고, 이들의 자녀가 세인트폴에 입학했다. 이들은 사실상 부모에게서 많은 것을 세습받은 결과로 세인트폴에 입학했으면서도, 자기 노력과 능력으로 세인트폴에 입학했다고 믿는다.
1년 학비가 4만달러(약 4600만원)에 이르는 특권 학교에 다니면서도, ‘노력하면 다 된다’는 아메리칸드림을 간직한 이들의 자기모순은 대체로 자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힙합 같은 대중문화를 거리낌 없이 소비하고, ‘일반인’들과 섞여 허름한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할 수 없는 구엘리트를 상대로) ‘우월감’마저 느낀다.
고려대와 서울대에서 촛불을 들어올린 학생들은 역시 ‘거저’ 한국 최고의 대학 간판을 획득하지 않았을 것이다. 명문대에 가야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부모의 기획 아래 초등학교 때부터 고강도 장시간 사교육을 견뎠을 것이며 독서와 봉사활동, 소논문, 자기소개서 등 ‘종합 스펙’을 챙기느라 사춘기의 일탈 따위는 사치로 여겼을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는 지점은 한국 사회의 신엘리트들이 너무 열심히 산다는 것, 그래서 자기가 물고 태어난 수저는 수저로 취급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에 부채감이 없는 이들이 좌우할 미래 한국은 정말 공정할까.
진명선 팀장 torani@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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