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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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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담담해도 괜찮은, 여성의 얼굴

8월29일 개막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주제 ‘벽을 깨는 얼굴들’

남성 중심 사회를 허무는 31개국 여성주의 영화 119편 상영
등록 2019-08-31 14:33 수정 2020-05-03 04:29

“스크린에서 가부장제, 남성 중심 밀실 등 벽을 깨는 다양한 여성의 얼굴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8월27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있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여성영화제) 사무국. 개막 준비에 바쁜 권은선 프로그램선정위원회 위원장은 21번째를 맞는 여성영화제의 주제가 ‘벽을 깨는 얼굴들’이라고 설명했다. 여성영화제는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여성 영화인을 발굴하고 여성 영화의 발전을 이끌기 위해 1997년 출범했다. 여성영화제는 8월29일부터 9월5일까지 서울 마포구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과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다. 31개국에서 출품한 영화 119편을 상영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권은선 프로그램선정위원회 위원장.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권은선 프로그램선정위원회 위원장.

개막작

여성영화제 사무국 벽에는 하얀색 바탕에 세 여성의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가 걸려 있다. 권은선 위원장은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하는 부드럽고 밝은 표정이 아닌, 무심하고 담담한 표정의 얼굴을 담았다”고 했다. ‘여성의 얼굴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자 자화상’이라는 메시지도 담겨 있다고 한다.

여성영화제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벽을 깨는 얼굴’은 다. 영화제 개막작으로 마케도니아 감독 테오나 스트루가르 미테브스카의 작품이다. 마케도니아의 작은 마을 슈티프에서 해마다 1월 성직자가 나무 십자가를 강에 던지고 수백 명의 남자가 이 십자가를 찾는 행사가 열린다. 여성이 참여할 수 없는 이 행사에 우연히 나선 여성 페트루냐가 십자가를 찾고 그걸 남자들에게 돌려주기를 거부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권 위원장은 “는 ‘국가, 종교, 남성’ 삼위일체로 구성된 사회 지배 시스템과 그 권위를 향한 한 여성의 도전을 담은 작품”이라며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인 사회에 의문을 던지고 그걸 허무는 주인공 페트루냐의 모습을 보며 여성 관객이 임파워링(권한을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하는 영화적 경험을 할 것”이라고 했다.

는 영화 속 이야기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2014년 마케도니아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토대로 만들었다. 권 위원장이 영화의 뒷이야기를 전했다. “영화의 실제 주인공은 당시 백래시(반격)를 심하게 받아 외국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대요. 그런데 지난해 그가 곤욕을 겪은 그 행사에 다른 여성이 참여했대요. 또 다른 여성이 다시 한번 금기를 깬 거죠.” 사회적 금기와 편견을 깨는 ‘현실의 페트루냐’는 아직도 투쟁 중이다.

여성영화제에서는 남성 중심 사회제도와 편견에 맞서는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을 파헤친 ,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자존감을 잃어가는 여성의 현실을 다룬 , 여성 셰프들의 고군분투를 그린 ,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모인 20대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을 기록한 , 탈북자 2세의 소외된 삶을 그린 등이 상영된다.

(왼쪽 위부터)전성연 감독의 <해일 앞에서>(2019), 강유가람 감독의 <우리는 매일매일>(2019),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1955), 이예승 감독의 <겟 잇 뷰티>(2018).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왼쪽 위부터)전성연 감독의 <해일 앞에서>(2019), 강유가람 감독의 <우리는 매일매일>(2019),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1955), 이예승 감독의 <겟 잇 뷰티>(2018).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여성 창작자 발굴의 장도 활짝

영화제는 여성 창작자를 위한 ‘기회의 장’을 열고 지원자 역할도 한다. 이를 위해 마련한 게 한국장편경쟁, 아이틴즈, 아시아 단편경선 부문이다. 그동안 단편경쟁을 통해 박찬옥, 정재은, 이경미 감독 등 재능 있는 여성 감독을 여럿 발굴했다. 제21회 여성영화제 공식 트레일러(홍보 영상물)를 만든 전고운 감독도 여성영화제에서 발굴한 창작자다. 그는 제11회 여성영화제 아시아 단편경선 우수상을 받았다. 전 감독은 전화 인터뷰에서 “여성영화제에서 처음 제 영화가 상영됐을 때 ‘내가 영화 계속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느낌’이었어요. 제가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동력이 됐죠”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에서 정형화한 여성 캐릭터를 깨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담배 피우는 여성을 센 이미지, 사연이 많은 캐릭터로 그리잖아요. 반대로 담배를 피우는 남성을 그렇게 특별한 인물로 그리진 않잖아요. 저는 영화 에서 기호품 중 하나인 담배를 즐기는 여성의 평범한 모습을 그렸어요.”

하지만 영화계는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영화산업에서 대다수 자본과 네트워크는 남성에게 집중됐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정책연구원이 지난해 발표한 ‘2018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을 보면 2018년 상업영화 77편 중 여성 감독이 제작한 영화 편수는 10편(13.0%)에 불과하다. 여성 제작자가 만든 영화는 15편(19.5%), 여성 프로듀서는 23편(29.9%), 여성 주연은 24편(31.2%), 여성 각본은 23편(29.9%) 정도다. 권 위원장이 이런 영화계 현실에 대해 말했다. “1955년부터 1997년까지 (극영화계에) 여성 감독은 단 7명에 불과했어요. 제1회 영화제 때는 선보일 여성 작품이 무척 부족했어요. 이후 여성 창작 인력이 꾸준히 늘었지만 아직 남성 중심 영화계 구조는 많이 변하지 않았어요.”

여성영화제에서는 한국 영화 100주년 역사를 여성의 눈으로 살펴보고 여성영화사 다시 쓰기 작업도 한다. 영화제 첫 회 때 개막작으로 상영한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의 을 다시 선보인다. 두 번째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17년 세상을 떠난 박 감독을 대신해 딸 이경주씨가 어머니의 삶과 영화 이야기를 하는 토크 프로그램도 열린다. 최초 여성영상집단 ‘바리터’의 30주년 의미를 살피는 자리도 마련된다. 바리터 멤버인 김소영 감독·변영주 감독 등이 나와 창립 배경, 바리터가 한국 여성영화사에 남긴 흔적과 의미를 이야기할 예정이다. ‘한국 영화 100년: 여성주의 시각에서 다시 쓰는 영화사’라는 주제로 열리는 국제학술회의도 영화제가 열리는 9월3일에 열린다. 한국을 비롯해 홍콩, 영국 등에서 여성주의적 영화사 쓰기를 실천하는 영화학자와 비평가, 활동가들이 참여한다.

(왼쪽부터)우르슬라 맥팔레인 감독의 <와인스타인>(2019), 마야 갈루스 감독의 <부엌의 전사들>(2018), 테오나 스트루가르 미테브스카 감독의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2018).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왼쪽부터)우르슬라 맥팔레인 감독의 <와인스타인>(2019), 마야 갈루스 감독의 <부엌의 전사들>(2018), 테오나 스트루가르 미테브스카 감독의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2018).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룸(밀실)의 성정치’ 다루는 쟁점 포럼

여성영화제는 해마다 여성주의의 주요 현안을 주제로 ‘쟁점 포럼’을 열었다. 올해 관객과 함께 고민하려는 주제는 ‘룸’이다. 미투 운동, 디지털 성범죄, 연예계 성추문 등 밀실에서 이뤄지는 남성 중심 유흥 문화와 사업 문제를 ‘룸의 성정치’라는 이름으로 쟁점화한다.

권 위원장은 “영화제는 스크린 속 여성의 얼굴, 영화를 함께 보는 관객의 얼굴을 마주 보는 자리가 될 것”이라며 “그곳에서 만난 영화를 통해 여성주의 현안을 토론하고 공감하며 연대의 힘을 얻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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