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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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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9월24일 경성에 ‘적기’가 나부꼈다

식민지 조선 사회에 다면적 영향력 행사한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
등록 2019-07-22 18:39 수정 2020-05-02 19:29
초대 소련총영사 바실리 샤르마노프(왼쪽).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 임경석 제공

초대 소련총영사 바실리 샤르마노프(왼쪽).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 임경석 제공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이 개관하던 날, 일본 경찰들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혹여 은밀하게 접근하는 자가 있지 않은가? 영사관 건물 안팎에 배치된 정사복 경찰들은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날은 1925년 9월24일이었다. 낮 12시 세 발의 폭죽이 하늘로 날아올랐고, 그것을 신호로 소련의 붉은 깃발이 게양됐다. 하객으로 참석한 총독부 몇몇 관리와 영국·프랑스·중국 영사관 소속 외교관들이 박수를 쳤다. 경성 하늘에서 적기가 힘차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 깃발이 경성 하늘에 내걸린 모습은 대단히 이채로웠다.

일소기본조약으로 소련총영사관 개관

경성에 소련 외교기관이 들어설 수 있었던 근거는 일소기본조약이었다. 1925년 1월20일 소련과 일본 사이에 체결되고 2월25일에 비준된 조약이었다. 정식 명칭은 ‘일본국 및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간의 관계에 관한 기본적 법칙에 관한 조약’이었다. 이는 소련과 일본의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기본 원칙을 정한 것으로 양국 간 첫 번째 조약이었다.

소련 외교관이 하나둘 입국했다. 경성총영사관의 초대 총영사 바실리 샤르마노프는 일본 도쿄에서 부임했고, 부영사 드미트리 무르친은 중국 하얼빈에서 전근했다. 이들은 가족과 행정 실무 요원 몇 명을 인솔했다. 총영사관에 딸린 러시아인은 12명이었다. 이 중 6명은 가족이고, 6명은 구체적인 소임을 맡은 외교부 임직원이었다. 총영사, 부영사, 통역, 사무원, 타이피스트, 고용인이 한 팀이었다. 이외에 조선인 조력자 서너 명이 고용됐다. 통역하고 신문기사를 스크랩, 번역하는 이들이었다.

총영사관 건물로 경성 시내 정동에 있는 대한제국 시절의 옛 러시아대사관이 제공됐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뒤 8년간 비어 있던 건물이었다. 소련 쪽은 수만엔의 수리비를 들여 영사관 구내의 정원과 길을 단장했고 출입문도 새로 만들었다.

일 경찰, 조선인 사회주의자 움직임 주시

경찰은 소련총영사관 안팎을 면밀히 주시했다. 영사관 존재 자체가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에게 심리적 자극과 충동을 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소련에서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를 비치해 일반인 출입을 허용하는 총영사관 도서실이 치안 교란의 원천이 될 우려가 있었다. 매년 11월7일 열리는 러시아혁명 기념일 행사도 그랬다. 축하차 총영사관을 방문하거나 축전을 보내는 조선인들이 있었다. 어느 경우나 다 엄중한 경계 대상이었다.

경찰이 감시한다는 사실을 웬만한 조선인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총영사관을 공공연히 출입하는 자는 적었다. 총영사관 쪽도 조심했다. 일본 관헌과 마찰을 피하고 싶어 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조선인들의 총영사관 출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총영사관 출입문을 폐쇄해 조선인 출입을 막기도 했다. 1926년 6월 망국의 군주 순종 황제가 운명했을 때 그랬다. 3·1운동 같은 독립운동의 일대 고조 현상이 재현될지도 모른다고 예측되자 일시적으로 출입문을 폐쇄하기도 했다.

경찰이 보기에, 소련총영사관이 조선인 사회주의자를 지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조선 내외의 비밀 연락 거점이 되거나, 불온사상의 선전 기지가 될 가능성도 매우 적었다. 그곳에서 비밀결사 운동자금이 유출되거나 전달될 우려도 없었다. 일본 경찰은 그처럼 판단했다.

조선어 신문, 조선-소련 관계 증진 기대감

소련총영사관 관련 기사는 일간신문의 뜨거운 소재였다. 경성 하늘에 적기가 펄럭이게 됐으니, 매우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붉은색만 봤다 하면 탄압하기 위해 죽을 둥 살 둥 덤벼드는 경찰 당국도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됐다고 풍자하는 신문도 있었다. 영사관 주변에 경찰을 겹겹이 배치할 터이니 순사들로 이뤄진 ‘순사성’을 쌓을 게 틀림없다고 비꼬는 만평도 실렸다.

이제 막 부임한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샤르마노프’ 총영사의 일거수일투족은 관심의 초점이 됐다. 40살, 모스크바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직업 외교관이었다. 그가 경성역에 도착한 것은 1925년 9월5일 저녁 7시였다. 직전 근무지인 도쿄 소련대사관을 떠나서 기차편으로 새 근무지에 왔다. 일행은 둘이었다. 통역 겸 수행원인 ‘게오르기 키바르친’이 동행했다. 그는 레닌그라드동양어학전문학교 학생으로 20대 젊은이였다. 두 사람은 경성역 인근에 있는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마땅히 영사관에 짐을 풀어야 하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총독부와 교섭해 영사관 부지를 받고, 돈을 들여 수리하며, 영사·대민 업무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그가 새로 해야 할 일이었다.

호텔 방에 든 지 얼마 안 돼 기자가 찾아왔다. 인터뷰 요청이었다. 기민함 덕분에 는 다른 신문들보다 먼저, 9월6일치 지면에 신임 소련 총영사의 동정과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신문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소련 총영사 기사를 쏟아냈다.

일간신문들 지면에는 감지할 수 있는 공통성이 있었다. 기대감이었다. 총영사관이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를 증진하는 데 공헌하기를 바라는 심리였다. 신문 지면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심리 현상은 감격이었다. 한 예로 1925년 9월7일치 사설을 보자. ‘소련영사 부임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으로 논설부 기자 신일용이 쓴 사설은 조선 사람들의 격정을 토로한 명문장으로 손꼽힌다. 소슬한 경성의 가을 하늘에 적기가 나부끼는 현실에 무한한 감격을 느낀다고 썼다. 적기는 정의를 위해 헌신한 많은 의사의 피로 물들인 깃발이며, 그것은 인류 역사의 투쟁 시기를 표상하는 상징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튿날인 9월8일치 사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또 신일용이 펜을 들었다. ‘조선과 러시아와의 정치적 관계’라는 제목이었다. 조선의 민족적·계급적 해방운동은 소비에트러시아의 세계혁신운동과 보조를 일치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경찰은 이 사설을 문제 삼았다.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하고 일본제국의 국체를 타파하는 선동적인 기사라고 간주했다. 중벌을 가하려 했다. 9월8일치 신문에 압수 처분을 내리고 그다음 날에는 무기 정간 처분을 내렸다. ‘정간’은 신문 발행을 중단시키는 행정처분으로 신문 경영에 치명적인 조처였다. 신문사 존폐와 관련된 심각한 억압이었다. 집필자도 무사하지 못했다. 신일용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됐다.

고려공청 책임비서가 발급한 김단야의 위임장. 임경석 제공

고려공청 책임비서가 발급한 김단야의 위임장. 임경석 제공

총영사 인터뷰한 기자는 조선공산당 4인방

샤르마노프 총영사는 본국 외무성으로 보내는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경성에 도착한 직후 상황이었다.

“현지 신문기자들을 만났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모스크바에서 남만춘으로부터 신문사에서 일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 15명의 성명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Gr. 동무에게서 얼마 전 그 명단 속에서 가장 믿을 만한 4명의 이름을 보충적으로 받았습니다. 내가 도착한 지 20분 뒤에 경성역 호텔에 그 명단 속에 있는 한 사람이 신문기자 자격으로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처럼 빠른 접근에 깜짝 놀랐고 의혹을 품었습니다. 얼마 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조선일보사에서 근무하는 김단야인데, 그의 기자 신분을 이용하여 곧바로 나를 만났던 것입니다.”

경성에 도착한 직후, 호텔방에 들어간 지 불과 20분 만에 신문기자가 방문했다고 한다. 그 기자는 소속의 김단야 기자였다. 샤르마노프 총영사는 그를 선뜻 믿을 수 없었다. 너무나 빨랐기 때문이다. 경찰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자신의 소재 정보를 그처럼 실시간으로 탐지할 수 있을까? 경찰 지시를 받고서 일하는 사람 같았다.

다행히 샤르마노프에게는 믿을 만한 동지들의 명단이 있었다. 두 종류였다. 그중 하나는 15명의 이름이 적혔는데, 모스크바에 있을 때 남만춘에게서 받았다. 남만춘은 조선공산당의 국제당 가입 외교를 지원하려 맹활약 중인 유명한 혁명가였다. 다른 하나는 가장 믿을 만한 4명의 이름이 쓰인 명단이었다. ‘Gr. 동무’라는 이가 제공했다고 한다. 아마 ‘그리고리 보이틴스키’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대회 개최와 그 당의 국제당 가입을 맨 앞에서 지휘한 국제당의 동아시아 전문가였다.

샤르마노프 총영사가 김단야를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Gr. 동무의 리스트’ 덕분이었다. 4명의 동지란 누군가. 조선공산당에서는 김재봉과 김찬이고, 고려공산청년회에서는 박헌영과 김단야였다. 이 네 사람이 보이틴스키가 지목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터였다. 하지만 김단야는 신뢰 구축을 위해 위임장까지 제출했다. 고려공청 책임비서 박헌영이 발행한 1925년 9월10일치 위임장이었다. 수신자는 샤르마노프 총영사였다. 이 조그만 증빙 문건에는 김단야가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이라는 점, 현안에 관한 상호 협의를 위해 파견한다는 점 등이 명시돼 있었다.

국내 사회주의-국제기구 연락체계 구축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의 설립은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다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언론 역사에 부침을 초래했고, 사회주의 운동사의 진행 과정에도 족적을 남겼다. 특히 국내 사회주의 운동과 국외 국제기구 사이에 또 하나 은밀한 연락체계가 구축됐음이 주목된다. 이 체계를 개척한 사람은 기자 김단야였다. 비밀결사 고려공청 간부이기도 한 그는 그 뒤로도 국제공산당과 밀접한 연계를 설정하는 데 남다른 성과를 올렸다.

참고 문헌
1. 朝鮮總督府警務局, , 神戶, 不二出版, (復刻板), 444~448쪽, 1984년.
2. ‘동아만화, 이 주위에 순사성이나 쌓을는지?’, 1925년 9월7일치.
3. ‘사설, 赤露 영사 부임에 際하여’, 1925년 9월7일치.
4. Билль(빌리), Дорогие товарищи(친애하는 동무들),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06 л.19-24, 1925년 9월19일.
5. Secretary of C.E.C. YOUNG COMMUNIST LEAGUE of KOREA PARK Hun Young, Mandate of Comrade Kim Dan Ya: To Comrade Sharmanoff, p.1,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257 л.8, 1925년 9월10일.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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