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야도 합법 신분을 가진 때가 있었다. 1924~25년 두 해가 그랬다. 24~25살 젊은 때였다. 그땐 공공연하게 식민지 수도 경성의 대로를 마음껏 활보할 수 있었다. 한평생 혁명운동에 몸담은 까닭에 비합법 영역에서 남의 이목을 피해 다니거나 외국 여러 나라로 망명했던 그로서는 예외적인 시절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국경도 넘고 철도 여행도 하는 신분증</font></font>
1924년 1월 신의주 감옥에서 출옥한 뒤 그러한 자유를 얻었다. 수감된 이유는 사회주의를 선전했다는 혐의였다.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잠입하려다 국경에서 그만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1년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실제로는 1년10개월이나 갇혔다. 경찰 신문과 검사국 예심 기간이 터무니없이 길었던 탓이다.
김단야는 출옥 후 곧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그해 3월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공청)에 복귀해 중앙총국 위원에 선임됐다. 체포될 때 재임했던 자리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단야는 합법 공개 영역에서도 활동의 거점을 마련했다. 그해 4월에 설립된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합법·비합법 양 영역에서 조선 청년운동의 진행 과정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합법 신분이 공고하게 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신문사 덕분이다. 김단야는 그해 8월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신문기자 직은 비밀결사의 중앙 간부 역할을 하는 데 유용했다. 기자가 되면 여러 활동의 편의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철도를 이용한 지방 출장이 가능했다. 식민지 시대 철도 여행은 비합법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기차역 개찰구와 열차 속에는 어느 때건 경찰이 상주했다. 그들은 의심스러운 자가 있으면 불시에 검문했고, 소지품 검사를 했으며, 조금만 이상하다 싶으면 연행하기를 능사로 했다. 그러나 기자 신분증만 있으면 무사통과였다. 심지어 국경도 쉽게 넘을 수 있었다. 신의주를 지나 중국 영토로 나가거나, 부산에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도항하는 데에 별다른 장애가 없었다.
김단야는 합법 신분을 활용하여 각 지방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표면상으로 취재 활동에 종사함과 동시에 이면으로는 비밀결사 세포단체들과 연락·통신하는 업무에 임했다. 경찰이 막아서는 곳이라면 어디든 신문사 명함만 제시하면 그만이었다.
기자가 되면 선전도 손쉬웠다. 해방 이념과 자유 서사를 전파하는 데에는 신문 지면 이상으로 큰 영향력을 갖는 게 더 없었다. 비록 총독부의 검열과 정간의 위협 때문에 표현을 적실하게 하는 데에는 제한이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대중의 마음을 획득할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었다. 김단야는 그 여지를 잘 활용했다. 그가 자기 명의로 지면에 기고한 글들이 있다. 그중에서 특히 사람들의 주목을 모은 것은 ‘레닌 회견 인상기’라는 제목의 11회 연속 기사였다. 레닌 사후 1주년을 기념하여 1925년 1월22일부터 2월3일까지 연재한 글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레닌 회견 내용을 녹인 놀라운 기사</font></font>
이 글은 레닌 사망 1주년을 맞아 각 신문사가 기획한 특집 기사들 가운데 가장 돋보였다. 김단야는 레닌과 회견한 경험이 있었다. 1921년 말 1922년 초 극동민족대회 참석차 모스크바에 갔을 때 조선대표단 일원으로서 레닌과 회견했던 경험을 기사 속에 녹여넣었다. 이 연속 기사는 독자를 놀라게 했다. 극동민족대회 조선대표단의 활동상을 합법적인 신문 지면에서 공공연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세계사적 영향력을 지닌 레닌과 직접 면대한 조선인의 기록이라는 점, 조선일보사 현직 기자가 직접 그런 글을 쓸 수 있다는 점 등도 눈길을 끌었다.
김단야는 민완한 신문기자였다. 국내외 정세에 밝고 문장력이 좋았다. 외국어 능력도 출중했다. 중등학교 이상 교육을 이수한 조선인이라면 다들 할 줄 아는 조선어와 일본어 외에도 두 개의 외국어를 더 구사했다. 중국어와 영어로 외국인과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김단야의 기명 기사 가운데 상하이에 관한 것이 있다. ‘제주도를 조망하면서, 상해 가는 길에’와 ‘두 번째 상해를 밟고, 신년을 맞으면서’가 그것이다. 이 글들은 상하이에 가는 노정에서 겪은 일과, 상하이라는 공간이 조선인의 삶과 역사에 비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묘사하고 있다. 그중 한 소절을 읽어보자. 김단야의 내면 의식과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조금씩 흔들리던 선체는 아주 자는 듯이 침착하여졌다. 둥그런 유리창을 통하여 멀리 푸른 물결 저편에 뫼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한 것이 겨우 곤한 잠을 채 깨지 못한 나의 시선을 물들인다. 나는 정신을 차려 한참 주목했다. (중략) 과연 큰 섬이었다. 그러나 크고 높은 산이었다. 그 섬이 즉 산이오, 그 산이 즉 섬이었다. 그것이 곧 제주도인 한라산이오, 한라산인 제주도이었다.”
김단야는 남해 먼바다를 항해하는 여객선 로쿠칸마루 선상에서 멀리 제주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객실 유리창을 통해서였다. 일본 모지항에서 출발하여 49시간 항해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항로였다. 1924년 12월30일 오후 2시에 출항했으므로, 상하이 도착 예정 시간은 해가 바뀌는 1925년 1월1일 오후 3시였다.
그는 제주도를 바라보면서 고국 사랑을 느꼈다고 썼다. “아! 저것이 과연 제주도이다. 나의 고국의 산천이다”라는 탄성이 마음속에서 솟아났다. “저 땅에서 발을 옮겨놓은 지가 불과 3일이 못 되는”데도 그랬다. 경성을 떠난 것이 3일 전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땅이 새삼스럽게 그립고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본 식민지 통치하에서 발간되는 신문에 싣는 글이었음을 고려하면, 매우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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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갑판에 올라갔다. 혹여 흰옷 입은 사람이라도 보이겠나 싶어서였다. 마침 망원경을 지닌 중국인 승객이 곁에 있었다. 김단야는 말을 걸었다. 망원경을 좀 빌려달라고 중국어로 청했다. 하지만 그 중국인은 잘 못 알아들겠다고 답했는데, 광둥어였다. 김단야는 그제야 그 사람이 광둥 사람인 줄 알고서 다시 광둥어로 청했다고 한다.
김단야가 중국어에 더하여 광둥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상하이·광저우 체류 경험이 놓여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1919년 12월에 망명을 단행한 김단야는 1922년 4월 입국을 시도할 때까지 주로 상하이에서 체류했다. 1920년에는 사관학교에서 수학할 목적으로 광저우에서 4개월간 머물기도 했다.
김단야가 상하이로 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저 땅을 떠난 지 불과 3일도 못 됐다”는 문장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조선일보사의 사명을 받고서 중국 특파원 자격으로 상하이로 가는 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취재하려고 했는가. 상하이에서 기고한 두 기사만으로는 김단야 특파원의 소임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상하이로 가는 노정기라든가 상하이 조선인 사회에 관한 스케치 기사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따로 특파원을 파견할 것까지는 없는 평범한 테마였다. 도대체 김단야는 왜 상하이에 출장을 갔을까?
필자는 최근에야 이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김단야가 1937년 2월에 작성한 을 보았는데, 그 기록에 1924년 말~1925년 초 그의 상하이 출장의 비밀이 담담하게 적혀 있었다.
“1924년 말 상해 소재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원동국은 ‘상해로 한 동무를 보내 당과 공청의 사업 활동에 관해 보고하도록 하라’고 내게 알려왔다. 내가 보고자로 지목되었다. 나는 에서의 나의 위치를 이용하여, 전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상해로 임시 특파원을 보내야 한다고 신문사 사장을 설득했다. 그때 마침 쑨촨팡(孫傳芳) 장군(장쑤성장)과 루융샹(盧永祥) 장군(저장성장)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결국 상해와 중국어를 아는 사람으로서 내가 꼭 가야 한다는 동의를 받아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단야가 상하이로 여행하는 내면의 이유는 비밀결사 운동의 필요에서 나왔다. 상하이에 소재하는 국제당 원동국과 경성에 존재하는 공산주의 비밀결사 집행부 사이에 업무 연락의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김단야는 당과 공청의 내막을 잘 아는 핵심 간부인데다 합법 신분이 튼튼했다. 국경을 넘어서 오가는 데 그만큼 적임자가 없었다. 그뿐인가. 그는 중국어와 영어 구사 능력을 갖고 있었다. 당과 공청의 집행부를 대표하여 국제당 원동국과 책임 있는 업무를 협의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외부로는 군벌 취재, 내부로는 비밀결사 운동</font></font>
상하이로 특파되기 위해서는 신문사 경영진을 설득해야 했다. 당시 조선일보사 사장은 사회적으로 신망이 높은 이상재가 추대되어 있었고, 상무이사에는 신석우가 재임하고 있었다.
김단야가 설득했다는 경영진은 아마도 신석우였을 것이다. 김단야는 중국 군벌전쟁의 취재 필요성을 제기했다. 1924년 8월에 발발한, 장쑤성의 쑨촨팡과 저장성의 루융샹 두 군벌 사이의 전쟁 양상을 보도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특파원으로는 자신이 적임자라고 스스로 추천했다. 2년여 상하이 체류 경험이 있고,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했다.
결국 김단야는 1924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1월 하순까지 상하이 출장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의 상대역은 국제당 원동국 책임자 보이틴스키였다. 두 사람은 국제당 지부로서 조선공산당 창립 문제가 최대 현안이라는 점에 동의했고, 이 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두 사람은 행동의 골자를 입안하는 데에 성공했다. 4개 대회를 한꺼번에 준비한다는 복잡하고도 거창한 복안이었다. 비밀 영역에서 당과 공청의 창립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 합법 공개 영역에서 전국 규모의 두 종류 대중 집회를 소집한다는 계획안이었다. 김단야가 상하이 출장에서 되돌아온 직후,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준비하는 대규모 조직 계획이 은밀하게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font size="2">참고 문헌1. 김단야, ‘레닌 회견 인상기, 그의 서거 1주년에 (1-11)’, , 1925년 1월22일~2월3일.
2. 김단야, ‘제주도를 眺望하면서, 상해 가는 길에’, , 1925년 1월26일.
3. Ким Даня(김단야), (자서전), 1937년 2월7일, с.10,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56-65.
4. 이혜인, ‘혁신의 동요와 굴절: 1924-25년 조선일보의 혁신과 사원해직사건’, , 32, 184쪽, 2017년.</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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