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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의 냄새

등록 2019-06-21 01:53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학교가 파하자 지혜는 자기 집에 놀러가자고 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가봐야 심심할 게 뻔했으니 나는 좋았다. 막 찍어낸 벽돌이 아니라 비바람에 풍화돼 분홍빛이 도는 벽면, 지혜의 집은 지붕 위까지 담쟁이가 무성했다. 마당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단단히 박혔고 불투명 창문 사이로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도 오가며 ‘그(런) 집 앞’을 지나노라면 나도 몰래 발이 머문다.

12살 지혜의 톤 앤 매너

그 집에 살던 지혜를 말해볼까. 가만가만 말하는 아이, 음식 먹을 때 장난치며 흘리는 우리와 달리 얌전히 먹는 아이, 무엇보다 친구들이 말할 때 지그시 듣고 있는 아이. 그건 12살 어린아이에게서 나오는 ‘톤 앤드 매너’가 아니었다. 분명 그와 같은 생활양식을 지닌 사람들과 식기를 같이 쓰며 살 때라야 갖게 되는 총체적인 기품과 향기였다. 한꺼번에 사들여 번들거리는 세계문학전집이 꽂힌 서가가 아니라 출판사별로 서로 다른 시기에 번역된 문학책이 꽂혀 있고, 바흐의 평균율 단 한 작품이 서로 다른 연주자 버전으로 꽂힌 음반서가를 떠올려보라. 그 컬렉션은 안목과 시간의 더께라서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 가난한 집 아이는 ‘절대 빈곤’이란 말뜻은 몰라도 가난한 냄새는 안다. 아무리 열망해도 내게서는 지혜에게서 나는 냄새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성인이 되어도 여전했다.

단순한 삶의 태도를 지향하면서 자발적 가난을 말하는 이들도 ‘이미’ 가난한 사람 앞에서는 자발 운운을 멈출 것이라고 믿는다. 야식이 당기는 늦은 밤, 집에 장봐둔 유기농 식품이 가득한데도 간혹 색다른 맛을 즐기고 싶어 편의점에서 두 종류의 라면을 사다 ‘짜파구리’를 만들어 먹는 사람도, 매일 두세 끼를 편의점 식품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사람 앞에서는 나도 편의점 음식 애호가라는 말은 삼가는 조심성은 있다고 믿고 싶다. 교양인은 다채로운 클래식 컬렉션을 구비한 사람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에서 이 정도 섬세함을 지닌 사람이라는 걸 나는 이제 겨우 안다.

영화 에서 기택(송강호 분)이 박 사장(이선균 분)에게 끝내 일을 내고야 마는 것은 박 사장이 기택으로서는 결코 넘볼 수 없는 모든 것을 가졌다는 데서 온 질투가 아니었다. 박 사장은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도망가는 본능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기택과 또 다른 기택 앞에서 코를 막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더러움에 대한 찡그림. 박 사장은 뼛속 깊이 각인된 인간 버러지들에게 혐오를 표출했고, 기택은 그 혐오를 반사하느라 기택의 교양에 역습했다. 그들은 각자의 관성대로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스카이라운지와 지하창고

대체로 부자가 ‘뷰’(View)를 갖는다. 도시 공간에 즐비한 20층이 훌쩍 넘는 건물 꼭대기에는 고급식당이 점한 스카이라운지가 있지만 물품과 때론 사람이 함께 구겨져 있을 지하창고도 있다. 높은 수직건물이 격차 사회에 대한 은유라면 봉준호 감독이 천착하는 공간과 계급의 상관성은 수직과 수평을 아우른다. 그는 격차 사회의 대안이 수평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의 전작 에서 보듯 편편한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는 분명 나란히 길지만 기차 칸을 구분해 하층민 꼬리 칸을 만들어놓으면 그 수평은 드러누운 수직일 뿐이다. 요컨대 구획으로는 평등을 이룰 수 없다. 칸을 지운 공간에 함께 스며들고 섞이면서 내가 너 같고 네가 나 같게 되는 것. 지금도 쓰는지 모르겠지만 그 옛날 하늘 높이 치켜든 펼침막에 단골로 등장하던 단어, ‘대동(大同)세상’은 이러할 텐데 현실에선 가능할 것 같지 않으니 그곳이 바로 유토피아인가 한다.

김민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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