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초에 너그 할아버지가 나 보는 앞에서 니네 아버지를 때리더라. 내가 그때부터 너그 최씨네 집안을….”
‘니네 아버지’가 평생 얼마나 미웠는지 줄줄이 쏟아내다가 순서도 없이 폴짝 신혼 시절로 날아가 한 무더기를 푸는 대목이었는데, 이 장면에서 나는 소름이 돋았다. 새색시 보는 데서 아버지의 폭력을 참아냈을 효자의 모욕감이 떠오르면서, ‘아버지도 가정폭력의 피해자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뒤통수를 쳤다. 늘 나와 엄마에 대한 가해자로만 못 박아두었던 아버지에 대해 다른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 건, 그즈음부터였다.
아침마다 머리를 땋아주던 아버지. 달력을 장롱 위에 깔끔하게 챙겨두었다가 새 교과서 표지를 싸주고, 공책 남은 걸 모아 연습장을 매주던 남자. 시대 흐름과 아내의 욕망을 거스르지 못해 자신에게 딱 맞았던 시골 교사 자리에서 뿌리 뽑혀, 산업사회가 태동하던 서울 변두리 돈암동으로 이사해야 했던 30대 초반의 가장.
내내 경제적 가장이자 사회 속 남자의 자리를 만들지 못한 콤플렉스를 뒤집어 존재감을 증명하느라, 젤 원망 많은 아내와 큰딸에게 폭력을 가한 허깨비 가장. 무작무작 확장되던 서울의 가장자리 상도동과 대방동에서 집 장사를 하느라 잦은 이사를 하던 중에, 청년 시절부터 모았던 한문 고서와 소설책과 철학 서적을 마당에서 태우던 서생의 등짝. 혼돈과 방황으로 파열할 것 같던 시절, 나는 다락방 먼지와 작은 벌레들 속에서 그 책들을 들입다 읽어댔다.
호남평야 지대 ‘양반입네’ 하던 부잣집 막내딸로 자란 엄마에겐, 첩의 자식인 서자 오빠 덕에 10대 말 좌익운동 여성 선전부장을 했던 열렬한 생애 토막이 숨어 있다. “짚자리에 떨어지는 날부터 쓰지 못할 계집이라고, 갖은 학대 다 받지 않았느냐….” 건너 동네 아지매들과 색시들을 모아놓고 성차별에 관한 노래를 신나게 불러젖히며 가르쳤다니, 아무리 숨겨도 지워질 수 없는 정신적 세례였을 거다.
6·25로 중단된 배움을 더 잇지 못하고 종전 직전에 시집이라는 걸 가야 했다. 그렇다고 딸 편도 아니었다. 밥상에 생선이 올라오는 날이면, 서방과 아들들 몫의 굴비와는 따로 10원에 열 개나 주는 꽁치가 올라왔다. 구태여 굴비 쪽으로 가는 내 젓가락질을 그때마다 ‘기지배’를 찾으며 쳐내던 엄마. “아버지를 미워한 힘으로 내 길을 만들었다”며 지금도 오만 군데다 떠들고 사는 내가 엄마를 미워하지 않은 것은, 지나놓고 보니 아버지를 맹렬하게 미워하느라 여력이 안 남았던 거다. 나만큼이나 엄마도, 한다고는 했지만 엉망인 ‘엄마’였다.
짧은 좌익 경험을 ‘한때 불장난’으로 입 씻어 묻고, 양반 또한 거추장스러워 벗어 내던지고, 산업자본주의 시대 ‘좀 있는 여편네’의 온갖 틈새벌이로 모은 돈 덕에, 말년엔 도로 양반과 실버타운으로 들어앉은 노인네. 열정과 상처가 여든을 넘어 인지장애와 얽히면서, 장남과 돈과 영감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분열적 왜곡으로 또 한번 헤까닥 뒤집혀 식구들을 볶아댔고,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힘들었다.
엄마의 절약 강박에 돈 심부름 ‘삥땅질’을 하다 도벽이 생겨버려, 대학 시절 학교 친구의 목돈까지 훔쳤다가 지인들의 묵인으로 법적 처벌을 면한 나. 생의 첫 기억이 고아원에서 시작해 선감학원과 형제복지원과 삼청교육대를 거치며, 나랑 동갑인 예순둘 인생에 교도소에서만 36년을 살았다는 선감학원 피해 생존자 김성곤씨의 원통한 생애. 지주 집 막내딸이었던 엄마와 달리, 같은 시절 ‘좌익’ 낙인으로 개죽음당한 수많은 사람과 남은 식구들의 고난. 같은 나라 다른 국민 사이의 차이와 차별, 덕과 탓.
내가2010년 근처 2년간의 구술생애사 작업 동안 내 화자는, 풀어놓고 죽겠다는 작심도 단단했고 기억도 생생했으며, 주관과 눈치, 열정과 분노, 자긍과 자괴가 뒤엉킨 분열하는 주인공이었다. 한편 엄마와 한 작업은 내게, 내 밴댕이 소갈머리를 직시하며 가족의 상처와 편협에서 벗어나, 나와 사람과 세상을 다르게 보는 과정이었다.(필자의 책 , 2013년)
그 후 2016년 1월부터 2018년 11월 죽음까지 약 3년간, 일부러 부모님이 사는 수원 실버타운 근처로 이사까지 하며, 엄마의 해체 과정을 밀착해서 관찰 기록했다. ‘효’ 따위의 배타적 혈연의 정 때문이 아니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선배 여성이자 내 화자였으며 게다가 엄마여서, 이 밀착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늙음과 죽음에 관한 공포 이데올로기는 깨보자는 작심도 있었다.
비싼 실버타운에 살면서도 산업사회 절약 근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엄마는, 화장지 한 칸을 아껴댔고, 없이 사는 큰딸을 위해 찐 달걀과 견과류를 모아 챙겨줬으며, 내내 마다하던 기저귀를 ‘노인들을 위해 국가에서 무료로 제공한다’니까 그제야 쓰기 시작했다.
“더 이상 너그 아버지 안 모실란다!”며 제정신일 때 자기 돈으로 들어온 실버타운을 놓고, ‘여기는 납골당’이라며 자식들이 가뒀다고 우겼다. 똑똑하고 쾌활한 할머니였다가, 말년에 모처럼 잉꼬부부였다가, 인지장애가 심해지면서는 자식들과 영감에게 배신당했다고 이를 갈았다. 그 애와 증, 다행과 불행을 넘어, 어느 날 다 놓더니, 남은 날들은 죽음을 향해 흘러 들어갔다. 늙어 죽어감의 가차 없음이 혹 모든 사람의 피할 수 없는 슬픔이자 고통이라면, 그 슬픔과 고통에 대한 내 복수는 관찰과 기록이다. 복수를 다짐하면 거리 두기가 가능하다. 사람에 대한 이해나 세상에 대한 통찰은, 고통 속에서 오히려 진실의 실마리가 잡힌다.
생물로서 엄마는 이제 없다. 하지만 구술생애사와 해체의 기록을 지나 지금과 나중까지, 그녀의 개인적 시대적 성취와 한계, 긍과 부를 무수히 말하고 쓰며, 시비를 따지고 재해석한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엄마는, 나와 세상을 여전히 확장시켜주고 있다. 이것이 나의 애도이며, 가정의 달이자 어버이 날인 구태의연한 5월을 지나는 내 방식이다.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아래 '후원 하기' 링크를 누르시면 후원 방법과 절차를 알 수 있습니다.
후원 하기 ▶ http://naver.me/xKGU4rkW
문의 한겨레 출판마케팅부 02-710-0543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도수치료 본인 부담 3만원→9만5천원…정부안 들여다보니
112년 최장수 남성…매일 신문 읽었고, 즐겨 한 말은 “고마워요”
서울 ‘11월 폭설’ 117년에 한번 올 눈…원인은 2도 높아진 서해
첫눈 21㎝ 쏟아진 서울…“버스가 스케이트 타, 제설 덜 돼”
검찰, 국힘 압수수색…명태균 관련 2022년 선거자료 확보 나서
‘3차 코인 열풍’ 올라탄 청년들…“이번엔 안정적, 확실히 믿는다”
‘명태균 공천개입’ 당사 압수수색에 ‘긴장감 0’…국힘이 변했다?
‘대설 경보’ 양평 농가 제설작업 중 차고 붕괴…80대 숨져
“65살 정년연장은 단계적 적용…재고용 도입하면 ‘의무화’ 필요”
정산 미루고 별장·슈퍼카 호화생활 플랫폼 사업자…국세청 ‘정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