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에서 하동까지 섬진강 500리, 지천의 매화에 취해 물앵두를 기다리는 사람들
봄은 산너머 남촌에서 온다더니 남원과 구례를 잇는 밤티 터널을 지나자 내내 따라 붙었던 겨울이 화들짝 달아난다. “에구 무얼 그리 겹겹이 걸쳐 입고 찾와 왔누.” 바람이 건네는 말에 슬며시 겉옷을 벗었다. 스치는 바람이 더욱 살갑다. 소나무 숲 너머 지리산 노고단에는 흰 눈이 여전한데 고갯길 아래 비탈에 기댄 작은 집 야트막한 돌담마다 어김없이 산수유 꽃이 피었다. 낯선 이에게 “사진 찍으려면 저 산동 산 위 마을로 가는 게 더 좋아”라며 인사를 건네는 노인은 인천에서 고등학교 선생님을 한다는 아들자랑을 흘리며 비탈밭으로 향한다. 노인의 지게에서 푸른 봄이 가득하다.
매화를 만나러 나선 길이었다. 매화향은 천리를 간다는데…. 섬진강 푸른 물길을 따라 구례에서 하동으로 가는 길가 가로수에 매달린 현수막을 보고서야 후각이 살아난다. 바람 타는 현수막은 ‘매화축제가 열리니 광양 매화마을로 얼른 오라’고 재촉인다.
지독한 가난에서 피어난 매화
백운산을 방죽삼아 지리산 수천 골짜기 물을 모두 받아들이는 섬진강을 따라 남으로 간다. 전라북도 진안에서 발원해 500여리를 흘러오면서 온갖 더러운 물들도 다 받아들였을 섬진강이지만 여전히 푸르다. 때로는 급하게 흐르고 때로는 멈춘 듯 느린 걸음으로 여울과 탄과 소를 만들며 제 스스로 정화시켜 온 탓이리라.
지리산이 발 담그고 백운산이 얼굴을 비추는 섬진강에서 대물림하는 가난에 입 하나라도 덜어야 했기에 일찌감치 시집을 가야만 했던 누이의 모습을 본다. 꽃가마도 타지 못하고 타박타박 걸어서 시집으로 향하는 누이의 발길처럼 강은 더디게 흐르고 물빛은 누이의 마음처럼 쪽빛으로 곱다. 떠나는 누이를 돌담에 몸을 숨기고 배웅하는 빼곰히 내민 어린 동생들 얼굴마냥 매화는 골짜기 골짜기 양지바른 언덕에 피었다. 꽃잎이 붉은 빛을 띠는 홍매에서는 시집가는 누이가 마냥 부러운 어린 동생의 얼굴이 보이고, 푸른빛을 띠는 청매에서는 그 동생들을 두고 가야 하는 누이의 안타까움이 보이는 것은 광양시 다압면 매화마을의 매화가 지독한 가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능선의 굽이를 따라 잘 다듬어진 산책로와 바람에 날리는 매화꽃잎…. 발 아래로 보이는 쪽빛 섬진강과 하얀 모래…. 거기에 물새라도 날면 그대로 시가 되고 그림이 될 매화가 핀 섬진강 풍경에서 이제는 누구도 가난을 보지 않는다. 어깨를 두른 연인들은 대나무 숲으로 숨고, 아버지의 카메라 앞에서 온갖 포즈를 잡는 아내와 어린 딸의 표정에는 봄빛을 닮은 행복이 넘친다.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온 한 무리의 중년들은 농원 가득한 커다란 항아리와 매실주며 매실 원액, 매실 장아찌 등 먹을거리에 관심을 보인다. 노란 조끼를 받쳐 입은 건장한 청년들은 밀려드는 자동차를 통제하느라 벌써부터 비지땀이다. 한 할머니는 언제부터 캤는지 이제 막 싹을 내민 쑥을 까만 비닐봉지 가득히 담아 들고 옛날 소쿠리 들고 산으로 들로 나물 캐던 이야기에 열심이다.
본래 섬진나루터가 있어 섬진마을이던 마을이름까지 매화마을로 바뀌게 될 정도로 매화가 피게 된 역사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원의 주인인 홍쌍리씨의 시아버지가 일본에서 매화를 가져와 심고 홍쌍리씨가 이 매화를 이용해 각종 먹을거리를 만들어내 인기를 끌면서 마을사람들이 심기 시작해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매화마을 매화나무가 일본에서 온 것이라며 폄하하지만 70여년의 세월 동안 마을사람들이 쏟은 땀을 보지 못하는 소치일 것이다.
화려한 날들을 보냈던 하동포구
물어물어 섬진강의 끝자락으로 찾아가는 길, 함께 가는 섬진강은 하동포구 80리 불리던 뱃길이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사이좋게 섬진강의 절반을 나누고 있으면서도 유독 섬진강 하류 물길이 하동포구80리로 불리는 것은 전라도 쪽은 백운산 험한 자락으로 가로막혀 있어 포구가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철도가 놓이고 자동차 길이 닦이기 이전 도시의 산물들은 바다를 통해 섬진강을 따라 하동포구로 들어오고 지리산자락에서 나는 나물이며 약초, 목기 따위의 산물들은 다시 이 배들에 실려 바다를 통해 도시로 나갔다고 한다. 하동포구에 돛단배는 물론이고 동력선까지 드나들었던 것이 벌써 수십년 전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시절을 말하고 그리워한다. 그리움은 돌아가지 못할 때 비로소 피어나는 것이다.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 섬진강 줄나루의 줄을 당겨 이편과 저편이 오가고 장마당에 좌판을 벌이고 도시에서 온 장사치와 흥정을 벌이며 막걸리 한잔을 나누던 그 시절로 돌아가기에 세상은 너무나 바쁘게 돌아간다. 멈춘 듯 흐르는 저 섬진강처럼 조금만 느리게 살 수 가 있다면….
하동포구와 함께 번성했을 망덕포구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포구 들머리에는 뭍으로 끌어올려진 돛단배만이 과거 망덕포구의 번성을 부여잡고 있었다. 부두에 묶인 배들은 박제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갯것들과 회 따위를 파는 횟집들이 벚꽃이 필 무렵에 난다는 벚굴을 판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전등불을 밝히지만 포구의 흥청거림은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망덕포구에서 섬진강은 기어코 바다가 되고 섬진강과 길동무를 했던 산들은 섬이 되는데 광양제철소 불빛은 어이 저리 밝은 것일까?
아침 햇살에 빛나는 섬진강을 거슬러 오른다. 청송백사의 고장 하동이다. 섬진강이 만들어준 드넓은 모래밭에 점점이 찍힌 새 발자국이 마치 누군가에게 전하는 문자 같지만 그 뜻은 여전히 알 듯 모를 듯하다. 사람이 새가 아닐진대…. 조선 영조 때 조림했다는 광평송림은 섬진강 드넓은 강변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진 것이라 하니 족히 300년은 넘은 것들이다. 솔숲 솔가지를 스치는 햇살에서 솔냄새를 뒤로 하고 구례로 돌아가는 길은 지리산자락을 타고 간다. 지리산은 골짜기는 좁아도 막상 들어서면 어느 골짜기이든 수백명을 먹여살릴 들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하동읍 먹점마을 역시 그런 곳이다. 들어설 때에는 그저 험한 비탈길이었다. 아스팔트로 포장은 됐다고 하나 자동차 한대가 겨우 지날 정도로 비좁다. 게다가 한쪽은 곳곳에 벼랑이다. 자동차를 돌리지 못해 오르기 시작한 그 길을 내처 오르게 한 것은 매화였다. 비좁은 계곡 비탈에는 계단 진 밭에는 온통 매화꽃이 지천이었다. 그 꽃에 취해 길을 오른다. 아! 저런 곳에서도 사람이 사는구나 싶을 정도로 깊은 골짜기에 마을이 있었다. 10여호의 집들이 급한 비탈 기대어 햇살에 졸고 있었다.
마을을 지나 계속 산을 타던 길은 ‘참배자 외 출입금지’라는 글 앞에서 멈추었다. 대나무 문은 엇비슷 열려 있는데 집은 보이지 않는다. 능선이 돌아드는지 아니면 토굴일지 궁금했다. 머리를 들면 하늘이 닿을 것 같은 이 높은 곳에 수도처를 마련한 이가 갈구하는 것은 무엇일지가 더 궁금했다. 그러나 그 문을 들어서지 못했다. 속세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세상의 한편에 비켜선 이에게 방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탈을 깎아 만든 치마논, 구들논
“물앵두가 같이 피어야 좋아요. 3월20일쯤이면 필라나.” 땅심을 돋울 비료를 뿌리던 마을 주민이 “옛날분들 고생 무지 했죠”라며 건네는 말에는 한국전쟁 당시에 지리산 여느 골짜기이든 다 겪었을 고초 이상의 뜻이 담겨 있었다. 지금 매화가 심어진 곳은 대부분 논이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길도 성하지 않은 산으로 올라와 비탈을 깎고 어른 키만큼 돌담을 쌓고 물을 받아 논을 만들었다. 땅이 생긴 대로 힘이 닿는 대로 논을 만들다보니 치마폭에 폭 덮일 크기의 ‘치마논’도 삿갓 하나 크기에 지나지 않는 ‘삿갓논’ 따위의 논들이 생겨났다. 심지어는 구들장을 놓듯이 돌로 판을 다지고 그 위에 흙을 덮은 ‘구들논’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 화사한 꽃잔치를 벌이는 매화나무들이 뿌리를 내린 땅 대부분이 그러한 논이었던 곳이다. “논에다 나무를 심었으니 옛날분들 알면 경칠 일이죠.” 그이의 헛헛한 웃음에도 이끼 가득한 돌축대 위에 핀 매화는 곱기만 하다.
한때는 조선 5대 장에 들 정도로 큰 장이 섰다는 화개장터에는 초가집을 흉내낸 상가들과 함께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섬진강 재첩국을 한 입 가득 삼키자 갯냄새가 입 안 가득 싸하다. 찬으로 내놓은 나물에서는 흙냄새가 난다. 가공된 맛에 익숙한 입인지라 재첩국 맛이 낯설기만 하다.
칠불사를 찾아 오르는 화개천은 온통 차나무 밭이다. 4월 곡우가 지나면 저 차밭에는 찻잎 따는 손길이 우리나라 차 시배지라는 전통을 이어갈 것이다. 대나무 이슬을 먹고 자란 찻잎을 우려낸 죽로차의 은근한 향이 퍼질 화개천의 즐비한 찻집 간판이 멈추는 곳에 칠불사가 있다. 한번 불을 때면 100일 동안 온기가 남는다는 아자방과 함께 선불교의 자존심이 전하는 곳이다. 동안거가 끝난 이후라 아자방에 스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서산, 부휴, 금당, 대은, 초의 같은 조선시대 ‘큰스님’들이 모두 이곳에서 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루 한끼만 먹을 것이며, 절대 말하지 말 것이며, 절대 눕지 말아야 한다는 아자방의 세 가지 금칙이 엄격하게 지켜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들도사라는 운공이라는 스님이 1천여년 전에 이전에 놓였다는 온돌은 지금까지 개보수를 한 적이 없다고 하지만 절집은 70년대에 새로 지은 것이다. 칠불사는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인도에서 온 허 황후의 오빠와 함께 이곳에서 도를 닦고 성불을 이루었다는 전설이 불교가 중국을 통해 들어오기 200여년 전에 인도로부터 직접 전해졌다는 남방불교의 전래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사람은 땅을 담는다고 했다. 지리산 연봉에 등을 기대고 앉은 칠불사에는 동국제일선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현판이 오랜 세월 변함없는 호두나무에 손색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운조루의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다시 구례땅 구만들에 선다. 지는 노을에 섬진강은 검게 빛나고 노고단에서 왕시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저녁 햇살이 비춘다. 그 능선의 지맥이 닿는 곳에 조선시대 전통양반가옥이라는 운조루가 있다. ‘금귀몰니’(한문), ‘금환낙지’(한문), ‘오보교취’(한문)이나 말들이 운조루에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지만 풍수라는 것이 믿기 나름이니 그렇게 심취할 것은 못 될 것이다. 다만 운조루가 귀한 것은 만인능해(만인능해)라는 나눔의 정신이다. 지금도 전하는 나무로 된 쌀독 아래 구멍에는 만인능해라는 글이 적혀 있다. “끼니가 떨어진 사람이면 누구라도 쌀을 퍼가도 된다”라는 뜻이 담긴 글이라고 한다.
운조루가 있는 마을에 과거 명당을 찾아 수백채의 집들이 들어서기도 했었지만 오히려 화를 입은 집들도 많다고 한다. 다만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의 격변기를 지나면서도 빨치산이든 경찰이든 운조루만은 해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터가 명당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터의 주인이 실천해온 ‘만인능해’ 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진 자들의 의무가 강조되는 시대 운조루의 정신이 새삼 아쉽다.
글·사진 윤승일 기자/ 한겨레 출판기획관리부 nag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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