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size="2" color="green">단종 · 김삿갓 · 궁예의 혼백을 만나기 위해 이 겨울의 산천을 헤매다 </font>
하늘은 금방이라도 무언가 토해내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처럼 잔뜩 찌푸려 있는데 청령포를 휘감아 도는 서강 물은 맑기만 합니다. 강 건너 청령포를 오가는 작은 철선의 갑판에는 아직 여드름이 가시지 않은 청년이 길손을 기다리다 졸음에 빠져 있습니다. 마치 멈춘 듯 보이지 않는 흐름으로 먼 길을 재촉하는 강물을 바라봅니다. 이제 막 생존을 시작한 어린 물고기들이 사람 그림자에 놀라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바위틈 깊은 그림자 속으로 몸을 감춥니다.
단종의 한을 품은 관음송
영월에는 만나고 싶었던 3명의 사내가 있습니다. 단종과 김삿갓, 그리고 궁예가 그들입니다. 이미 소나기재 넘어 장릉에서 단종과 인사를 나눈 뒤에 찾아온 청령포는 겨울이 깊어가는데도 푸르기만 합니다. 한껏 자란 소나무도 변함없이 울울창창합니다. 그 소나무 가운데 유독 큰, 줄기가 두개로 뻗은 소나무가 관음송입니다. 어린 단종은 늘 갈라진 나뭇가지 사이에 걸터앉아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한탄했다고 합니다.
단종의 울음과 슬픔을 보고 들어서 관음송이란 이름을 가진 소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생각합니다. 왕에서 노산군으로 다시 역적으로 죽임을 당해야 했던 단종도 이제는 어엿하게 종묘에서 다른 왕들의 신위와 함께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역사는 늘 정의의 편이라는 말이 일견 맞게도 들립니다. 그러나 제 조카에게 죽임을 내려야 했던 세조도 그 자리에 함께 있습니다.
따져보면 역사는 늘 이긴 자들의 것입니다. 단종을 죽음으로 내몰고 다시 복위시키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은 누가 이겼느냐에 따라 충신이 되기도 하고 역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함께했던 민중들에게 역사는 어떠한 자리를 내어주었는지…. 그리고 민중들은 또 어떠했는지 생각하다 보면 답답함이 가슴을 채웁니다.
영월에서 영주시로 잇는 고갯길 가운데 고치령이라는 고개가 있습니다. 그 고개 위에는 금성대군과 단종을 모신 제당이 있었습니다. 몇해 전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 마을사람들이 매년 소를 잡아 제를 올릴 정도로 큰 제당이었다고 합니다. 세조의 동생이자 단종의 또 다른 삼촌이었던 금성대군은 순흥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운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결국 복위운동은 발각돼 단종과 금성대군은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모두가 버린 그 죽음에 대한 지역민들의 애틋함은 단종을 태백산의 산신으로, 금성대군을 소백산의 산신으로 승격시켰던 것입니다.
단종의 혼령이 걸었을 길을 따라가다 보면 태백산과 소백산의 경계가 나옵니다. 그 경계에서 영월 땅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봉우리가 어래산(御來山)입니다. 왕이 왔다간 산이란 뜻인지, 왕이 올 것이란 뜻인지 전하는 이야기들은 엇갈립니다. 영월에서 죽임을 당한 단종의 혼백이 태백산으로 가는 길에 지난 산이라 어래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대리, 궁예의 야망이 시작되다
어래산 일대는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강원도가 만나는 곳입니다. 충청도의 의풍과 강원도의 영월, 경상도의 영주가 만나는 이곳은 정감록에서 이르는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이자, 격암 남사고가 양백지간에 숨어 있다고 이른 승지로 꼽히기도 합니다.
마치 커튼을 드리운 듯 겹쳐진 산자락을 돌아돌아 들어가다 보면 갑자기 펼쳐지는 너른 땅에 놀라게 되는 그 지역에 경상도 땅 남대리가 있습니다.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운동을 할 때 이곳에서 병사를 양성하던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입니다. 임금이 머물 대궐이 있어서 남대궐로 불리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또 한 사내의 야망이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무수한 왕 가운데 궁예는 가장 민중에 가까이 있었던 왕입니다. 영월 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주천강이 열리고, 더 올라가면 법흥사가 있습니다. 궁예의 이야기는 그쯤 어디에서 시작합니다. 신라 경덕왕의 아들로 태어난 궁예는 신라말 혼탁한 정세에 죽임을 당할 뻔하다가 유모의 기지로 살아나 이곳 영월에서 자랍니다. 성장해 지역의 토호 양길의 수하에 몸을 의탁해 세력을 키운 궁예는 제 이름의 군사를 이끌고 후삼국의 한 축으로서 북을 울리게 되는데 그 첫 공격지가 부석사였다고 합니다.
영월에서 부석사로 가려면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를 지나야 합니다. 어래산은 어쩌면 미륵정토를 앞세운 궁예가 지난 곳이란 뜻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래산에서 궁예를 만나게 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몇년 전만 해도 자동차가 지나기 어려울 정도로 심심산골이었던 영월에서 남대리로 드는 그 골짜기를 지금은 버스가 오갑니다. 김삿갓의 무덤을 발견하고 그의 무덤을 관광상품화하기 위한 조처들 때문입니다. 김삿갓 계곡으로 이름까지 바뀐 그곳에 ‘든돌’이 있습니다. 새로 길을 내느라 많이 묻혔지만 임진란 때는 든돌 밑에서 마을사람들이 난리를 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그 규모는 부석사의 ‘부석’(浮石)보다 훨씬 큽니다.
어느 옛날에 든돌 밑에서 아기장수가 났다고 합니다. 든돌을 갖고 힘을 연마할 정도로 장사였다는 아기장수를 마을사람들은 몰래 죽입니다. 나라에서 아기장수 탄생을 알면 마을사람들까지 참화를 입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아기장수에서 궁예를 떠올리는 것이 지나친 상상일까요?
김삿갓, 누워서 살 팔자는 아니었네
김삿갓 계곡의 옛 이름은 와인리입니다. 누워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땅이란 뜻입니다. 십승지지와 관계가 있는 땅이름입니다. 김삿갓은 그러나 누워서 살아갈 팔자가 아니었나 봅니다. 어머니의 지원에 힘입어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한 학업에 열중하고 결국 영월향시에서 장원급제합니다. 그런데 그 글이 자신의 할아버지를 욕되게 한 글이었던 것이죠. 결국 그 부끄러움에 겨워 전국을 유랑하다 객사했고 그 주검을 김삿갓의 아들이 수습해 생가가 있던 이 계곡에 묻었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김삿갓을 민중시인이라 말합니다. 평생을 떠돌며 지어낸 많은 시들이 부자들과 권력을 비아냥거리는 풍자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삿갓의 시 곳곳에서 입신양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음을 한탄하는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만사를 흩어지는 꽃같이 여기고/ 일생을 밝은 달과 벗하여 살자고 했지./ 내게 주어진 팔자가 이것뿐이니/ 청운이 분수 밖에 있음을 차츰 깨닫네.(김삿갓-나를 돌아보며 우연히 짓다) 김삿갓이 방랑에 오르게 된 연유에 대해 구구한 해석들이 더해지는 것도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죽어 200여년 뒤 김삿갓은 이 계곡에서 장승으로 동상으로 다시 살아오고 단종은 여전히 태백산의 산신으로 숭앙받는데 미륵정토를 세우려던 궁예의 혼백은 지금 어디를 떠도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김삿갓 계곡의 아기장수 부석은 버려지고 있는데 부석사의 부석은 왜 촛불공양까지 받는지도 답답하기만 합니다.
깊고깊어 삼재가 들지 않는다는 십승지지의 예언도 이제는 세월의 뒤안으로 넘겨야 할 것 같습니다. 새롭게 길을 내는 공사가 벌서 수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길이 다 뚫리고 아스팔트가 깔리고 나면 이 깊은 계곡의 작은 집들과 그 집의 주인들은 이 계곡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다 저녁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영월 · 영주= 글 · 사진 윤승일/ 여행전문기고가 nagneyoon@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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