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size="2" color="darkblue">월악산에서 역사의 흐름에 무릎 꿇지 않은 마의태자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다 </font>
하늘재 마루에서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미 강원도 설악산 권금성에서, 인제땅 한계산성에서, 오대산 소금강에서 당신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오르려면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할 정도로 험악한 그곳에 천년의 세월을 견딘 무너져버린 성벽, 잊혀져가는 땅 이름은 당신이 그토록 잊고 싶었던 신라 천년의 종말이 결코 부끄럽지 않았노라고 조용히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군사를 키우고 병기를 다듬고 군량을 비축하며 고려태조 왕건에게 창을 겨누며 오늘도 화살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역사의 울타리를 벗어나 전설의 문을 열어 신화의 세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보루에 세워진 절
망해버린 나라의 마지막 태자라는 신분을 한탄하며 풀옷을 입고 초근목피로 살다가 세상을 버렸다는 교과서가 가르쳐준 당신의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 끝내 무릎 꿇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따르면 보장되었을 호의호식을 끝내 마다할 수 있었던 용기는 또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가는 해는 부여잡을 수 없어 보내고, 오는 해는 막을 수 없어 맞이한 새해. 모두가 말하는 희망이 궁금했습니다. 하늘재에 선 이유입니다. 역사의 울타리를 벗어나 전설의 문을 연 당신에게서 답을 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오갔을 하늘재의 모습은 오늘의 고갯길과는 다를 것입니다. 수많은 절들이 있었다는 문경땅 관음리쪽 길은 이미 까만 아스팔트로 뒤덮여 있습니다. 몇몇의 불탑과 불상만이 전설의 문고리가 되어 당신의 흔적을 만나게 할 뿐입니다. 관음리에 많았다는 절집들은 당신의 병영이었고, 승려들은 당신을 쫓는 병사들이었습니다.
국립공원이라는 보호막 덕에 아스팔트에 덮히는 신세를 면한 충청도 미륵리로 내려섰습니다. 간간이 그늘에 기대어 하얗게 빛나는 눈들은 앞서 간 누군가의 발자국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유난히 청한 하늘. 겨울 해답지 않게 작열하는 햇빛에 잠이 깬 것인지 철없는 진달래는 일찌감치 분홍빛 속살을 내놓았습니다. 스치는 바람에도 파르르 부끄러움을 타는 진달래가 뻐쭘하기만 합니다. 이미 녹아버린 능선의 눈들이 아쉽고 진달래 속살이 뻐쭘하게만 느껴집니다. 있어야 할 것들일지라도 때와 장소가 맞지 않는다면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천년도 더 오래된 당신의 자취가 여전히 그리운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늘재를 내려서면 중원 미륵리사지입니다. 전설은 마의태자와 왕건의 이야기를 함께 들려줍니다. 신라를 가진 왕건이 북방정벌을 약속하며 세웠다는 이야기에는 자꾸 의심이 듭니다. 왜 하필 북쪽 국경과 한참이나 먼 이곳 중원에서 북방정벌을 기원했느냐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운 탓입니다. 오히려 후백제와의 연대를 위해 한강 진출을 꾀하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대산으로 떠날 때 석굴사원을 세운 것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거려집니다. 고개 너머 관음리의 불상들도 한결같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합니다.
하늘재가 열린 것이 신라 아달라왕 3년(153년)이라고 합니다. 하늘재를 넘으면 한강에 닿을 수 있고 한강을 가지면 북진을 위한 교통로를 확보하게 됩니다. 하늘재는 그 교통로로 가는 교두보였던 셈입니다. 신라인들에게, 그리고 마의태자에게 하늘재가 어떠한 의미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미륵리사지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엇갈리는 것은 이토록 큰 절터임에도 어떠한 기록도 없기 때문입니다. 5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 밝혀진 것은 몇몇 글자가 새겨진 기와 편뿐이었다고 합니다. 정작 전설을 역사로 이어줄 비문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미륵리사지 초입의 거대한 거북이 등에는 비석을 세우기 위한 홈이 패어 있습니다. 6m가 넘는 거북이가 받침으로 사용됐을 정도의 비석이면 그 조각이라도 발견돼야 할 텐데 여지껏 찾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고의로 없앴거나 아니면 미처 세우지 못한 것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점차 세력이 약해지던 마의태자가 미처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이 하늘재를 왕건에게 내어주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석굴사원은 벽면 감실에 여러 부처를 모신 것이며, 주불 아래로 물을 흘린 것(아마도 습도를 조절하기 위한) 등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토함산의 석굴암은 부처의 힘을 빌어 동해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한 것이라 합니다. 호국불교를 앞세웠던 신라다운 행동이 이곳 미륵리에 석굴사원을 세운 것은 아닐까요. 부처가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면 수많은 월악산 봉우리에 막힘없이 곧게 뻗은 계곡이 있습니다. 한강으로 이어지는 송계계곡입니다. 저 계곡을 달려 내려가 한강을 회복하고 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개성까지 내달리고 싶었던 것이 마의태자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백성을 위로하는 석불
그리고 그 바람의 궁극적 목적은 만백성의 평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석굴사원의 부처는 손에 약병을 들고 있습니다. 미륵으로 불리지만 약사여래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모든 중생의 병 치료와 수명 연장, 의복과 음식을 만족케 한다는 부처입니다. 부처가 서 있는 자리는 연꽃의 꽃술과도 같은 자리라 합니다. 남쪽의 주흘산과 북쪽의 월악산, 동쪽으로 포암산, 서쪽으로는 신선봉 등 1천m급 봉우리들을 연결하는 정중앙이 부처가 서 있는 자리라는 이야기이지요. 대단한 명당이지만 한강으로 뻗은 송계계곡은 마치 화살과도 같아 땅이 평안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가 그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는 것입니다. 칼날 위에 선 것과 같은 위기에서도 백성을 생각한 풍수배치라는 것입니다.
마의태자가 이러한 일을 이룬 것은 관음보살의 계시 때문이었다고 전설은 전합니다. 마의태자의 꿈에 나타난 관음보살은 ‘하늘재 넘어 큰 터가 있으니 그곳에 석불을 모시고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곳에 마애불을 세우면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게 될 것’이라고 계시를 남겼습니다. 고개 너머 월악산에 산성을 쌓고 머물던 마의태자의 동생 덕주공주도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월악산 중턱 마애불은 그때 덕주공주가 새긴 것이라 합니다.
마의태자와 그의 누이동생 덕주공주가 월악산 자락에 남긴 이야기는 몇날을 새우며 나눠도 남을 만큼 많습니다. 그 이야기는 마의태자의 끝을 말하기도 하고 시작을 말하기도 합니다. 굳이 시작에 의미를 두려함은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믿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살아낸다는 것은…
경순왕에게는 여덟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설악산에서, 홍천에서, 양평에서 그리고 금강산에서 마의태자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은 이 여덟 아들의 행적과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독 월악산 자락에 마의태자의 이야기가 깊게 새겨진 것은 경순왕을 고려에 보낸 곳이고, 신라 천년의 융성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새해입니다. 나서 죽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는 것은 자신의 의지입니다. 태어났기에 세월의 흐름에 밀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세월의 흐름에 역류하더라도 살아내고 싶습니다. 호의호식이 보장된 아버지 경순왕의 뒤를 따르지 않고, 대세인 왕건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은 마의태자는 칼날에 선 것만 같은 위기에서도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라 일러줍니다.
흐르는 송계계곡을 따라 돌아오는 길. 네온사인은 다시 그저 살아가라고 헤픈 웃음을 흘립니다.
글 · 사진 윤승일/ 여행전문기고가 nagneyoon@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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