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을 좇아 적상산에서 덕유산까지 떠나는 여행…차 한잔 놓고 퇴색해가는 초록을 음미해도 좋다
▣ 무주=글·사진 윤승일/ 한겨레문화센터 기행팀장
산다는 것에 지쳐 사랑조차 버거워질 때 길은 유혹으로 다가선다. 떠난다는 것이 유혹일 수 있는 것은 길 어딘가에 스스로에게 치미는 분노까지도 위로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고, 결국 길의 위무(慰撫)를 놓아두고 돌아오는 것은 ‘희망’으로 불리는 존재가 짊어져야 할 업보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의 곤돌라를 타고
전북 무주군 적상산(赤裳山·1024m). 붉은 빛의 바위절벽이 산을 뺑 둘렀다 해서 붙여진 그 이름은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는 뜻으로 바뀐 지 오래다. 1980년대 초반 양수발전소가 세워지면서 산 정상까지 아스팔트가 깔리고 그 길이 끝나는 곳에 호수가 생겼다. 흔치 않은 산 정상의 호수와 아름다운 가을 단풍의 소문에 끌려 오른 그 산. 왕조의 족보를 보관했던 사고는 물에 잠긴 옛 자리에서 벗어나 새로 지어졌고 그 사고를 지키던 승병들이 머물던 호국사는 비석 하나만을 남김 채 망각의 강을 건너고 있다. 다만 산 높은 곳에서도 수몰의 위기를 맞아야 했던 안국사가 호국사의 자리로 옮겨 길 찾는 나그네들에게 한잔의 차를 공양한다.
안국사 귀퉁이의 찻집. 다탁에 앉아 작은 창을 연다. 막힘이 없다. 초록을 여태 벗어던지지 못한 산과 산 사이를 비집고 자리 잡은 들판은 황금빛이다. 결실의 고통과 즐거움을 업보로 간직해야 하는 살아 있는 존재는 다가갈 수 없는 또 다른 세상인 하늘은 파랗다. 어깨를 결은 봉우리 봉우리는 하늘과 땅의 경계다. 하늘금… 누가 이름을 붙였을까…. 퇴색해가는 초록이 서럽다.
바람이 스친다. 아직 여름의 손을 놓지 않은 초록과 이미 가을의 문턱을 넘어 초록을 벗은 나무들…. 살아 있음으로 이겨야 할 다가오는 겨울의 혹독함에 나무들이 진저리를 친다. 다만 숨쉬지 않을 자유를 얻은 처마에 매달린 물고기 한 마리가 바람을 타고 파란 하늘을 유영한다. 무념무상의 소리를 파문으로 남기며…. 저 하늘금 너머의 세계로 돌아갈 때 시인 천상병처럼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 ‘즐거운 소풍을 마치노라’고 노래할 수 있을까.
시야의 끝에서 아득하지만 멀지 않은 덕유산 향적봉은 어머니를 닮았다. 부랑의 삶을 살아내는 아들을 위해 저녁이면 한 그릇의 밥을 이불 속에 묻음으로써 기다림을 말하는 어머니를 닮은 덕유산으로 간다.
시간은 살아 있는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모두에게 공평하다. 변화는 그 증거다. 스키장 개발로 시끄러웠던 덕유산. 그 품을 갉아먹었던 스키장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스키장이 들어선 골짜기의 이름 만선동(滿仙洞)에는 언젠가 이 골짜기 가득 신선들이 노닐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담겨 있다고 했다. 겨울이면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가득 메워지니 그 예언은 결국 들어맞았다고 이야기를 건네는 노인의 얼굴이 이제 막 벼를 베어낸 논을 닮았다.
향적봉을 오른다. 아니 날아간다. 두 발로 걷지 않고도 산을 오를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움인지 또 다른 죄악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관광용 곤돌라는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단 슬로프를 거슬러 산을 오른다.
찬란한 색을 보며 생명을 생각하다
얻으려면 버려야 한다. 편한 것을 택했으니 눈은 단조롭다. 발 아래 혹은 머리 위로 숨쉬는 것들이 내뿜는 향기와 작은 소리는 막힌 공간이 주는 답답함과 기계소리로 대신해야 한다. 짧아진 시간과 허공에서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광을, 이 걷는 즐거움을 버린 대가로 주어졌다. 수년 전 만 해도 깎아져나간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냈던 슬로프에 생명이 가득하다. 시즌에도 잘 열지 않는 경사가 급한 슬로프에는 나무들이 제법 자랐다.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는 길은 떠남과 돌아감을 열고, 흐름이 보이지 않는 시간은 탄생과 죽음을 연다. 돌아가는 것. 그 어느 것도 피할 수 없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적상산에서 바라볼 때만 해도 그저 퇴색해가는 초록으로 보였던 덕유산 능선은 이미 빨강과 노랑과 초록의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색들은 인공의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결코 흉내낼 수 없을 것만 같다. 그 색을 바라보며 가슴이 저려오는 것은 그 색은 오직 살아 있음으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이겨낸 당당함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곤돌라는 향적봉이 지척인 설천봉에서 사람을 부려놓고 다시 산을 내려간다. 곤돌라가 놓이면서 이름 붙여진 산 이름 설천봉. 오직 20여분 거리인 향적봉만이 머리 위에 있고 세상 모두가 발 아래에 놓여 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산다는 주목은 사람의 손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천년’을 향한 길을 떠났고 키 작은 참나무들은 스치는 바람에도 바스락바스락 잎을 떤다. 바람을 이기지 못해 꽃잎을 펼치지 못한 구절초 꽃들이 오히려 당당하다. 살아야 하므로 살아내야 하는 살아 있는 것들의 숙명.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조금 더 당당해져야 한다.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주목의 탈색한 회색 가지가 위엄 있게 보이는 것은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할 숙명을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적상산에서 가을은 이르고 덕유산 향적봉에서 가을은 이미 지났다. 그러나 생명은 여전히 제 소임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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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단풍지 5선
오색 주전골/ 강원도 양양
남설악으로 불리는 점봉산의 계곡이다. 한계령 단풍에 취해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오색이 나온다. 주전골은 오색온천 입구부터 점봉산 십이폭포까지 이어지는 계곡.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계곡의 단풍과 그 사이로 흐르는 옥빛 물줄기가 절경이다. 오색약수에서 용소폭포에 이르는 한 시간여 산행 길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10월 중순경 단풍터널을 이룬다.
오대산 소금강/ 강원도 주문진
설악 주전골에 비견되는 곳이다. 황병산(1470m)을 주봉으로 노인봉과 매봉이 학의 날개를 펴는 듯한 산세 사이의 계곡은 기암절벽과 폭포, 소들이 수없이 형성되어 있다. 무릉계→연화담→금강사→식당암→세심폭→구룡폭에 이르는 계곡은 계곡미와 계곡의 담과 소에 드리운 단풍에 취해 오르게 된다. 보통 구룡폭까지만 오르는데, 구룡폭을 지나 펼쳐지는 만물상은 소금강에서도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월출산/ 전남 영암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월출산은 천황봉(809m)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수석 전시장과 같은 바위산이다. 높이 120m, 길이 52m, 폭 0.6m의 구름다리는 월출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이다. 도갑사와 무위사로 내려가는 길목에 펼쳐진 미왕재의 갈대밭이 가을이면 황홀한 절경을 이룬다. 도갑사의 해탈문, 무위사의 극락전, 마애여래좌상 등 많은 문화재가 재미를 더한다.
주왕산/ 경북 청송
우리나라 3대 암산인 주왕산은 높이에 비해(720m) 산세가 웅장한 것이 특징이다. 기암과 기암절벽 사이를 헤집고 흐르는 제1, 2, 3폭포들의 물줄기. 가을이면 대전사와 기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어우러진 경치가 환상적이다. 대전사→주왕굴→1폭포, 2폭포, 3폭포까지 돌아보는 데는 약 3시간이 소요된다. 거의 평지를 걷듯 굴곡이 없고, 곳곳에 편의시설과 쉼터가 잘 마련돼 있다.
선운산/ 전북 고창
천년 고찰 선운사를 품은 선운산(355m)은 호남의 내금강으로 불릴 정도로 풍광이 빼어난 곳이다. 도솔산으로도 불린다. 숲이 울창하고 진흥굴·도솔암·용문굴·낙조대·천마봉 등과 같은 절경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산세도 별로 험하지 않아서 남녀노소 모두 쉽게 오를 수 있다. 느티나무와 아름드리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선운사 초입의 숲길은 지나치게 화려한 내장사의 단풍과 달리, 깊고 은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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