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size="2" color="663300">백담사와 건봉사 곳곳에 스며있는 만해의 자취…세월의 변화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건만 </font>
걷고 있습니다. 단풍은 이미 떠났고 겨울은 아직 오지 않은 계곡. 흐르는 물은 한없이 투명해 차라리 옥빛입니다. 현재를 흐르는 저 물은 이미 수년 전에 하늘에서 내린 물일지 모릅니다. 스미어 수십리를 빛 없는 세상에서 살아 있는 것들의 자양분이 되었다가 비로소 오늘을 흐르는 물을 거슬러 산으로 듭니다. 이 길은 백담사로 가는 길입니다.
‘전두환 처사’가 다녀간 뒤…
간간이 지지난해와 지난해 연이은 수해의 흔적을 지우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억지로 길을 내느라 깎아낸 산이 흘러내려 길을 메우고, 그러고도 넘친 바위덩어리는 계곡에 천연스럽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변화는 자연의 섭리입니다. 살다가 죽어야 하는 모든 생명들은 그 섭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진리는 변화뿐이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상념은 등줄기에 땀이 맺히면서 서서히 가닥을 잡아갑니다. 백담사를 찾은 이유도 다시 분명해집니다. 만해 한용운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간밤 가슴에 일던 격랑을 잠재워준 것은 만해가 남겨준 시 한편이었습니다.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지 말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그 사람의 기쁨이라 같이 기뻐하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않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렵니다.’(한용운의 ‘인연설’ 일부)
사랑과 집착이 다르고 배려와 지배가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머리가 알 뿐입니다. 가슴은 여전히 소유와 집착에 시달리고 가끔 울컥 쏟아지는 뜨거운 피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평생을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 만해가 남긴 시 한편에 간밤의 격랑은 어느새 잠재워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싸움꾼인 만해가 남기 시 한편에….
만해는 동학군이었다고 합니다. 충청도 홍성 땅에서 혁명의 꿈을 벼리던 그가 도피처로 삼은 곳이 이곳 백담사였다고 합니다. 만해가 처음 이 계곡을 걸을 때 어떠한 감정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루지 못한 꿈을 가슴에 부여안았을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버리고 걸었을지 아직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한줄기 바람이 이나 봅니다. 가랑잎들이 떼구르 어서 오라 앞서갑니다. 가랑잎은 그곳이 길이든 아니든 거침이 없습니다. 계곡에 떨어진 놈들은 어느새 배가 되어 흐르는 물을 쫓습니다. 그 가랑잎에 마음으로 두 글자를 새깁니다. 무애(無碍). 만해가 아끼는 제자에게 남긴 글입니다. 거침없이 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백담사는 빈한한 절이었습니다. 기억 속의 백담사 절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고 무너져내린 기와에는 듬성듬성 이름 갖지 못한 풀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굽이를 돌아 셀 수 없이 돌아 백담사를 찾아가는 길이 시멘트 옷을 입었듯, 백담사 역시 달라져 있었습니다. 백담사 입구의 다리를 건너지도 않았는데 거대한 일주문이 길을 머뭇거리게 합니다. 나무다리에 지나지 않아 매년 떠내려가기를 반복하던 다리는 잘 다듬은 돌다리로 변해 있었고 수심교라는 이름까지 달고 서 있습니다. 수심교(修心僑). 마음을 닦으라곤 하지만 계곡은 오히려 멀게만 느껴집니다. 다리를 건너면 새로 선 금강문이 또 멈칫거리게 합니다. 옛 문은 이러저러한 버팀목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서 있는 모습이 오히려 새롭습니다. 변화가 섭리라고는 하지만 늘 낯선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새로 지은 절집들은 아직 단청을 입히지 않아 나무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전두환 처사()가 백담사로 온 이후에 일어난 것들입니다.
20여리 계곡길이 콘크리트 포장이 된 것도, 수심교가 놓인 것도, 큼직한 절집들이 새로 세워진 것도, 다 전두환 처사가 백담사로 온 이후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아이러니는 전두환 처사 부부가 머물던 화엄당이 만해가 ‘님의 침묵’을 탈고한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만해는 꼭 한번 대중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있다고 합니다.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애국지사 일송 김동삼 선생이 별세했을 때입니다.
만해의 눈물
“유사지추(有事之秋·독립의 뜻)를 당하여 나라를 수습할 인물이 다시 없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니 비통하다”는 것이 만해가 대성통곡한 이유라 합니다. 일제 총독앞에서도 거침이 없었다는 만해가 전두환 처사를 만났다면 무어라 했을지 사뭇 궁금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인연인가 봅니다. 백담사 경내에서 만해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도, 만해의 기념관이 지어진 것도 전두환 처사의 백담사 기거 이후에 일어난 일이니 말입니다. 동상으로 만난 만해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빙긋이 웃는 모습으로 바라봐줄 뿐입니다. 경내에 새겨진 ‘나룻배와 행인’에서 만해는 ‘나는 나룻배’라 말할 뿐입니다. ‘흙발로 나를 짓밟는 당신을 날마다 기다리면서 늙어가는 나는 나룻배’라 말할 뿐입니다. 깊은 산중 해는 이미 절집 뒷봉우리를 넘어가고 그저 낮은 곳으로 흐르는 계곡물 사이에 한 그루 소나무가 뿌리를 다 드러낸 채 서 있습니다. 물은 그저 낮은 곳으로 흘러만 가고, 만해가 남겼다는 오도송 ‘남아가 이르는 곳이 다 고향이건만/ 오랜 나그네 되어 고향땅 생각납니다/ 한소리 질러 산천세계를 울리고 나니/ 펄펄 날리는 흰눈 속에서 복숭아 꽃을 보았네’ 그 뜻은 저 먼 산봉우리보다 더 멀기만 합니다.
다시 건봉사로 갑니다. 만해가 공부를 했다는 곳입니다.
진부령 그 긴 고갯길을 함께하는 산들의 비탈에 자작나무는 하얗게 겨울을 기다리고 소나무는 제 홀로 푸르름을 자랑합니다. 그렇게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은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을…. 사람만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건봉사는 백담사와 설악동 신흥사 등 인근의 절집들을 거느린 큰 절이었다고 합니다. 절집에 전해지는 만해의 흔적은 일주문 밖에 선 만해의 시뿐입니다. 건봉사에서 만난 만해는 ‘사랑하는 까닭’을 말합니다. ‘당신이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이고,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이며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이라는 것입니다. 몇해 전 노승에게서 들은 만해는 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가끔 저 바닷가 간성읍에 내려가 술에 취해 사람들의 멱살을 잡기도 했다는 만해는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고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것일까? 사라지지 않는 혼란은 일주문 앞에 선 금강저를 만나고 능파교를 지나 복원공사로 어수선한 법당 앞에 서 있는 십바라밀이 새겨진 석주를 만나면서였습니다. 금강저는 불교도들이 불법을 닦을 때 쓰는 도구라 합니다. 인간 번뇌를 부숴버리는 보리심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십바라밀 역시 피안의 세계로 가기 위해 스스로를 닦는 수행법을 말합니다. 보통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6바라밀을 말하는데 건봉사의 십바라밀은 여기에 방편·원·력·지의 4바라밀을 더한 것입니다.
자유롭다는 것
부처의 치아 사리를 모셨다는 ‘적멸보궁’ 앞에 서서 주춧돌만 남은 건봉사의 옛터와 복원공사가 한창인 능파교 건너를 바라봅니다. 저 다리를 건너면 피안의 세계가 열리는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연꽃이 져버린 연지를 거울 삼아 내 모습을 비춰보고 그 모습에 함께 드리워지는 버리지 못한 ‘지배와 소유’의 그림자를 봅니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은 소멸의 과정을 거치게 마련인데 내 가슴은 세월의 흐름을 거부하고 그저 부여잡고 있었던 탓인 것 같습니다.
“그대들은 남을 마중할 줄은 아는 모양인데 왜 남에게 마중을 받을 줄은 모르는 인간들인가.” 만해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출감하면서 마중 나온 이들의 비겁함을 빗대어 한 말이 다시 가슴에 파문을 남깁니다.
사랑을 찾아나섰던 길 ‘무애’의 화두를 떠안고 돌아갑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롭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당신 또한 사랑의 의미를 찾고 있다면 만해를 찾아보십시오. 만해가 당신에게는 어떤 화두를 던져줄지….
인제= 글 · 사진 윤승일 기자/ 한겨레 부 nag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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