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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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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타인의 슬픔을 공부한다

두 번째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펴낸

신형철 문학평론가 인터뷰
등록 2018-10-27 06:03 수정 2020-05-02 19:29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2014년 그해 가을, 신형철(42) 문학평론가는 세월호 추모 에세이집 를 엮으며 이렇게 썼다. 세월호 유가족의 고통을 외면하고 조롱하는 ‘냉혈한’들을 보며 다짐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공부하겠다고 말이다. 그런 마음으로 네 번째 맞는 가을. 그는 산문집 (한겨레출판 펴냄)을 세상에 내놓았다. 은 인터넷서점 알라딘 10월 셋쨋주 베스트셀러 종합 1위를 차지하는 등 주목받고 있다.

10월19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과 마주한 신 평론가는 “책을 준비하면서도 많이 고민했지만 책이 나온 뒤 너무 중요한 주제를 겁도 없이 건드렸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나지막하고 겸손한 말투다.

은 에 실었던 칼럼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 등을 비롯해 2010년부터 8년 동안 일간지와 문예지에 연재한 글을 모아 엮은 것이다. 흩어져 있던 글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슬픔’이다. 그 글들을 쓴 시기는 쌍용자동차 파업 진압,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등 사회적 아픔으로 고통을 겪었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이다.

그는 아프고 슬픈 시절을 지나오며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타인의 슬픔”을 바라본다. 속에 ‘타인의 슬픔’은 결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슬픔을 이해하고 공부하기 위해 노력한 과정을 담았다.

알 수 없는 슬픔의 뒷모습 바라보며 2011년 나온 첫 번째 산문집 (문학동네 펴냄) 이후 7년 만에 산문집 을 선보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어떤 공동체를 향해 노 젓는 일”이라고 했던 이후 어떻게 슬픔 공부로 옮겨왔는가.

예술을 향유할 때 같은 느낌을 받는 순간이 너무 좋다. 내가 비평을 시작한 근본 동력이 거기에 있다. 사람들과 같은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제목을 ‘느낌의 공동체’로 했다. 그 느낌 안에는 슬픔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2010년대의 사회적 사건들을 겪으며 슬픔이라는 느낌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 같다.

책 머리말에서 슬픔에 대해 생각한 두 가지 계기로 ‘세월호 참사’와 ‘아내의 수술’을 이야기했다.

슬픔의 공적 측면과 사적 측면을 함께 가져가고 싶었다. 물론 사적인 슬픔도 문제지만 공적인 슬픔에 점점 소홀해지고 피하게 되는 게 문제다. ‘슬픔에 대한 공부’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쓴 게 2014년 10월 펴낸 에서다. 계간 편집주간으로 이 책을 엮으며 엮은이의 글을 썼다. 그 글을 쓸 때가 2014년 가을이었다. 그 무렵이 되니 얼마간 세월호에 무덤덤해졌다. 진도 팽목항에 있는 세월호 유족들의 슬픔은 시간이 갈수록 더 사무쳤을 텐데, 나는 이미 그 슬픔을 잊어가고 있었다. 10월에 글을 쓰려니, 뉴스를 보며 울던 4월의 내 감정을 다시 떠올려야만 했다. 나 자신이 한심했다. 그러면서 영원히 해야 하는 공부가 하나 있다면 그게 바로 슬픔에 대한 공부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 남자의 쓸쓸한 뒷모습이 담긴 책 의 표지 그림이 제목과 잘 어우러진다. 이 역시 첫 번째 산문집 표지의 독일 화가 팀 아이텔의 작품이다.

작업 초반에 담당 편집자가 작가의 이름을 가린 그림 9장을 보여줬다.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고 이걸 골랐다. 그때는 책 제목을 떠올렸던 시점이 아니어서 그림의 질감만으로 이 작품에 호감을 가졌다. 그런데 제목을 정하고 보니 이거여야만 한다 싶었다. 앞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그 슬픔의 본질과 크기에 가닿을 수 없다는 뜻이 될 텐데, 타인의 뒷모습을 보면서라도 그 슬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겠다는 마음을 이 그림에 담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책에서는 그 그림에 대해 “내가 이르지 못할 슬픔을 가졌을 당신의 뒷모습”이라고 표현했다. 문학평론가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의 내면이다. 그것을 잘 읽어내고 싶다. 살고 경험한 만큼만 작품을 읽어낼 수 있다. 읽는 사람 자신이 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그걸 읽는 사람이 깊어져야 한다. 어렸을 때보다는 그나마 깊어진 것 같은데 아직도 부족함을 절감한다. 특히 슬픔의 영역에 대해서 그렇다. 내가 경험한 슬픔에 한계가 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온몸으로 실감하기는 쉽지 않다.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결격사유가 될 수 있다.

‘같은 아픔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2014년부터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겨레21>과 인터뷰하기 위해 수업이 없는 금요일에 광주에서 서울로 왔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2014년부터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겨레21>과 인터뷰하기 위해 수업이 없는 금요일에 광주에서 서울로 왔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은 내일 자신의 새끼손가락이 잘리게 돼 있다면 오늘 잠을 못 자겠지만 지진으로 어느 대륙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에는 동요 없이 곤히 잘 수 있다’라고 했다. 그게 인간이다. 그런데 그게 인간이라고 말하는 데서 멈춘다면 그것은 솔직한 인정이라기보다는 냉소적 태도에 가깝다. 냉소란 결국 포기다. 타인의 슬픔을 100% 이해할 수 없다 해도 노력해야 하지 않나. 가족이 아플 때 ‘미안한데, 난 너만큼 아프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상대방을 더 아프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너만큼 아플 수 있도록, 같은 아픔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라는 말까지 덧붙여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나하고 똑같이 아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러려고 노력하겠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범위를 사회로 확장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근본적으로 구조와 제도를 바꿔야 하지만, 언제나 구조의 빈틈 속에서 아픈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슬픔에 무지한 걸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나. 단식 농성 중인 세월호 유가족 옆에서 피자를 시켜 먹는 그런 짓은 다시는 하지 않는 사회 말이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태도”라고 폭력에 대해 정의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우리 주위에는 폭력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가혹한 기준이다. 타인의 일에 끝없이 섬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 기준에서 보면 우리 모두 폭력의 주체가 될 수 있고 일상적 행위들 중 상당수가 이미 폭력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폭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모든 것이 폭력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게다가 나쁜 뜻은 전혀 없었는데 단지 잘 몰랐기 때문에 폭력의 주체가 될 수도 있으니 문제다. 아이유의 노래 가 논란일 때였다. 나는 문학작품 주인공 ‘제제’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부터 출발한 노래이니 언제나 해석의 여지는 다양할수록 좋지 않은가 생각했다. 아동학대 피해자인 캐릭터라고 해서 그 아이를 그 범주에 가두는 것도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런데 수시모집 면접에서 한 고등학생을 만났는데 그는 학대 아동 멘토링 활동을 한 경험이 있었고 그 아이들의 상처와 성격을 이해하고 있었던 터라 나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그 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충분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떤 사안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새삼 느꼈다.

엄격한 폭력의 기준을 갖고 텍스트 비평도 하나.

작품을 해석하는 일 자체가 작품을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하는 일이다. 규정의 폭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텍스트의 행간을 최대한 섬세하게 읽고 작가의 작은 목소리까지 다 듣는 것이 평론가의 직업윤리다. 그를 통해 발견되는 진실, 큰 진실이 아니라 작은 진실을 놓치지 않는 것이 훌륭한 평론가의 자질이다. 일상에서는 그렇게 섬세하지 못하기 때문에 읽기와 쓰기에서만이라도 그러려고 노력한다.

위로는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슬픔 공부를 하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최근 테리 이글턴의 를 읽었다. 18세기 영국의 ‘도덕감각’ 학파들이 집요하게 공감의 윤리를 탐문했는데, 그들을 비판적으로 소개하면서 이글턴은 그런 윤리가 ‘타인에게 공감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윤리가 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정당하게 지적한다. 공감의 문제를 고민하는 이라면 늘 그 점을 의식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알겠다’라는 말을 계속 유예해야 할 것이다. ‘알 수 없다. 그러나…’의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실은 그게 작품 비평가의 자세이기도 하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긴 글을 썼다 해도 그 작품에 대해 다 안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알기도 어렵지만 그걸 위로할 줄도 모르는 것 같다.

예전에는 ‘위로’라는 말이 탐탁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해야지 위로만 주고받으면 뭐하나, 그런 생각도 했다. ‘힐링’이라는 개념도 그와 비슷하다고 여겨 경계했다. 그러다 비극적 사건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겸허해졌다. 고려대 국문과 김인환 교수님이 어떤 글에서 불교의 ‘불살생계(不殺生戒)’를 달리 해석하는 대목을 읽는 것도 중요한 순간이었다.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은 없으므로, 저 계율은 해치지 말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이미 다친 인간들이 서로를 달래며 살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위로라는 말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문학이 그런 일을 하면 안 될 이유가 없다고 여기게 됐다. 일상에서 위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고민거리였다.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깨달은 것은 타인의 슬픔을 온전히 실감하는 사람만이 정확한 위로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은 길러지는 것

“타인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과 그를 외면하지 못하는 결벽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타인에게 열려 있는 통각이 마비돼 있거나 미발달된 이들이 하는 정치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는 그런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중에서)

신형철 평론가는 요즘 슬픔에 관한 책 일레인 스캐리의 과 와카마쓰 에이스케의 를 읽고 있다. 11월2일 출간 기념 독자와의 만남 행사에 오는 독자들에게 어떤 책을 소개할까 고민하다가 찾은 책들이다. 그는 “나 역시 슬픔 공부를 시작한 학생일 뿐”이라며 “앞으로 정말 열심히 슬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다시금 자신을 다그친다고 한다. 그 공부에 가장 필요한 건 ‘슬픔 감수성’이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행여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믿음(즉, ‘무지’와 ‘미신’)이 ‘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을 뜻한다. 이게 없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시적으로 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그는 다시 말한다. “계속 공부해야 한다. 누군가의 터널 속 어둠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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