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김소연 시인의 ‘그래서’)
이슬람 사원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골목, 서울 이태원 우사단길. 하얀 바탕에 적힌 시구가 가는 이들의 눈길을 잡는다. 그 아래에 있는 간판이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려준다. ‘햇빛서점’.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관련 출판물을 파는 독립책방이다.
6월19일 오전 햇빛서점에서 박철희(30)씨와 박지성(31)씨를 만났다. 둘은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슬로건을 내건 녹색당 신지예 후보의 선거 포스터를 제작한 그래픽디자이너다. 이들이 있는 6평 남짓한 공간에는 또 다른 공간이 있다. 철희씨와 지성씨가 함께 디자인 작업을 하는 ‘햇빛스튜디오’다. 다른 두 업종이 ‘햇빛’이라는 이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적 시각이곳 한쪽 벽면에 철희씨와 지성씨가 함께 만든 신지예 후보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당당한 표정으로 유권자를 응시하는 포스터로 신 후보가 화제를 모았다. 동시에 불에 그슬리거나 찢기고 “시건방지다”라는 비난 등 ‘백래시’(반격)를 받았다.
이 포스터를 둘러싼 논란에 철희씨는 “‘시건방지다’라는 말에는 여성을 아래로 보며 ‘너는 나보다 높으면 안 돼’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이는 여성혐오적 시각이다. 예상치 못했지만 이 포스터가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적 시각을 드러내주는 리트머스 구실을 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들이 최초로 ‘페미니스트 시장 후보’임을 전면에 내건 선거 포스터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건 “당당함”이다. 후보의 표정, 시선과 안경 착용 등 모든 것이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불어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한다는 의미인 하얀 리본 캠페인의 리본을 본떠 포스터 글자 ‘시옷’(ㅅ)을 만들었다.
이들은 처음 작업한 선거 포스터 디자인 작업이 재미있는 경험이었단다. 철희씨는 “처음에 선거 포스터가 비슷비슷해 선거법상에 선거 포스터에 글씨는 어느 정도 들어가야 하고 얼굴이 어느 정도 비율로 나와야 한다고 명시된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얼굴 절반만 나와도 되고 뒷모습만 나와도 된다”고 말했다.
그들은 비슷한 글자체와 사진을 쓰는 보수적인 선거 포스터 방식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지성씨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없는 분야가 아니라 그동안 새로운 시도를 안 한 분야”라며 “오히려 조금만 재미있는 걸 해도 주목을 받으니, 디자이너로서 이쪽 분야는 완전 블루오션”이라고 했다.
대학 동기인 철희씨와 지성씨는 햇빛스튜디오에서 로고·행사포스터·캐릭터 제작과 패키지 디자인 등을 한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각자 의뢰받은 일을 하고 함께 프로젝트 작업도 한다. ‘따로 또 같이’ 일하는 둘은 서로의 장점을 알고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준다. “철희는 한글 레터링(글자를 그리는 것)이 강점이다. 대학 졸업 전시도 그것으로 했고 일반적인 디자이너랑 다르다. 특이하고 이상한 걸 잘 만든다.”(박지성씨) “지성 형은 논리적이고 현실적이다. 내가 특이함을 추구하다가 놓친 걸 잘 보고 챙겨준다. 그래서 잘 안 싸우고 일한다.”(박철희씨)
낮에도 ‘게이 문화’ 즐길 수 있는 공간철희씨는 햇빛스튜디오와 함께 햇빛서점을 운영한다. “26살 때 게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한 그는 성소수자로서 밝고 재밌게 살아가고 싶었단다. “게이들이 낮에도 당당하게 만나고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서점을 열게 됐다.”
2015년 9월 문을 연 이곳은 주말에만 영업한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보통 젊은층이고 30여 명 된다. 철희씨는 “이곳에 오는 성소수자 분들은 책을 사서 자기 집에 가져가는 것도 힘겨워한다. 가족과 함께 사는 경우 집 책장에 책을 꽂아놓는 것으로도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들킬까봐 두려워한다”며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모험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다. 햇빛서점이 서점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동안 햇빛서점에서는 퀴어 시선집 , 성소수자를 다룬 그림책 등 LGBT 출판물을 소개하고 소수자가 살아내는 이야기 ‘햇빛총서’와 게이 잡지 를 펴냈다. 퀴어 동화책 낭독회, 고추 그림 콘테스트 등을 진행하고 LGBT 관련 전시, 모임, 강연, 공동 작업 등을 할 수 있도록 커뮤니티 공간도 빌려준다.
철희씨는 서점을 운영하면서 삶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서점을 취미로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냥 내가 좋은 것 진열하고 좋아하는 것을 팔 거야라는 생각뿐이었다. 난 개인적인 성향이었다.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고 공감하고 연대하는 걸 잘 못했다. 그런데 서점을 운영하고 지금 같이 사는 파트너와 만나면서 사회적 성향으로 바뀐 것 같다.”
이제 철희씨는 성소수자 인권을 이야기하고 이 사회에 사는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페미니즘이나 장애인 인권 등 소수자 목소리가 남의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나도 소수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고 다른 소수자의 목소리에 더 관심 갖게 되었다. 이번에 신지예 후보의 선거 포스터 작업을 수락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기존 기득권 정당이 반영하지 못하는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는) 신 후보의 정책과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새로운 도약, 새로운 시작햇빛서점도 여느 독립책방과 마찬가지로 경영난을 겪고 있다. “책 판매만으로는 수익을 내기 쉽지 않다. 서점 일도 장사라서 센스가 필요한 것 같다.” 철희씨는 앞으로의 생존 고민을 하고 있다. “햇빛서점과 햇빛스튜디오를 분리할지, 햇빛서점을 다른 곳으로 옮길지 고민 중이다. 일단 정해진 건 햇빛스튜디오를 원남동으로 옮길 예정이다.” 다시 출발선에 선 햇빛서점과 햇빛스튜디오는 새로운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글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iryu@hani.co.kr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 인기기사
한덕수 권한대행 탄핵정국을 ‘농단’하다
[단독] “국정원, 계엄 한달 전 백령도서 ‘북 오물 풍선’ 수차례 격추”
얼큰하게 취한 용산 결의…‘나라를 절단 내자’ [그림판]
여고생 성탄절 밤 흉기에 찔려 사망…10대 ‘무차별 범행’
[단독] 권성동 “지역구서 고개 숙이지 마…얼굴 두껍게 다니자”
끝이 아니다, ‘한’이 남았다 [그림판]
‘아이유는 간첩’ 극우 유튜버들 12·3 이후 가짜뉴스·음모론 더 기승
받는 사람 : 대통령님♥…성탄카드 500장의 대반전
육사 등 없애고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로 단일화해야 [왜냐면]
‘김예지’들이 온다 [똑똑! 한국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