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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공장 아이돌, 뮤지션이 되다

방탄소년단의 세계적 성공에 대한 본질적 탐색
등록 2018-06-07 02:22 수정 2020-05-03 04:28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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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이 케이팝을 넘고 있다. 한류와 케이팝이라는 말로는 온전히 설명이 어려운 어떤 지점에 이미 도달했다. 뉴스로 전해지는 팝의 본고장 미국에서의 열광적인 반응이 놀랍다기보다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미국 현지에서 케이팝의 성장, 싸이 신드롬, 그리고 방탄소년단의 정상 등극을 모두 지켜본 내게는 이 모든 것이 마냥 갑작스럽거나 우연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사실 글로벌 스타로서 방탄소년단의 가능성은 생각보다 일찌감치 포착되었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 케이팝 이상의 케이팝 </font></font>
지난 5월20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방탄소년단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아미’(army)의 모습. ‘아미’는 방탄소년단의 글로벌 팬클럽 이름이다. 연합뉴스

지난 5월20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방탄소년단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아미’(army)의 모습. ‘아미’는 방탄소년단의 글로벌 팬클럽 이름이다. 연합뉴스

무려 4년 전인 201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케이팝 페스티벌 ‘KCON’에서 한국 대중에게는 이름조차 낯설었던 BTS의 무대는 현장에서 취재했던 필자와 등 현지 언론을 모두 놀라게 할 정도의 반응을 끌어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예상 못한 호응이 흔히 케이팝의 세계화를 말하며 함께 거론되는 ‘현지화’ 전략을 답습하지 않고 얻었다는 사실이다.

방탄소년단은 재미동포나 외국인 멤버, 외국 작곡가와 프로듀서, 유력한 현지 프로모터 등 세계 진출에 필요한 그 어떤 맞춤형 요소도 갖추지 못했다. 프로듀서 방시혁이 다른 중소 기획사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레드오션에 진입한 한국 음악시장을 넘어 국외 시장을 대안으로 삼은 것만은 분명하나 이는 정교하게 마련된 전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일한 선택지에 가까웠을 것이다.

다행히 달라진 미디어 환경은 이들의 시스템적 약점을 오히려 기회로 만들어주었다. 지상파 방송이 아닌 유튜브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외국 케이팝 팬들의 가장 주된 소비 창구가 되면서 기성 미디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들의 음악을 알릴 수 있었고, 그렇게 모인 케이팝 역사상 가장 열성적인 팬덤 ‘아미’(Army)는 홍보와 번역 계정을 자발적으로 운영하며 흡사 프로모션 파트와 같은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그리고 이들은 전세계적 네트워크를 형성해 BTS를 실시간으로 지원하고 있다.

2014년 케이블TV를 통해 방영된 는 미국 거장 래퍼들과 현지 작업을 하는 모습으로 국내 팬들에게 힙합 아이돌로서 정체성을 드러내려 기획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미국 대중에게 방탄소년단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뜻밖의 효과를 낳았다. 같은 해에 라이브 음악공연장 ‘트루바두르’(Troubadour)에서 고작 200여 명의 팬을 앞에 두고 열린 깜짝 공연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이때 보여준 진정성 있는 스킨십은 곧 KCON에서 예상치 못한 환호로 이어졌고, 다시 그 이듬해 열린 북미·남미 투어에서 예상 밖의 성공을 끌어냈다.

그 흔한 영어 버전 노래 한 곡 없이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BTS는 미국 시장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 아티스트로 등극했다. 그들에게 미국 진출은 이렇게 그저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와중에 얻어진 기회와 팬들의 반응과 요구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일 뿐이었다. 맞춤형 전략은 애초에 없었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전략은 없었다, 진정성이 있었다</font></font>

2010년대 이후 미국을 비롯한 대중음악계의 가장 큰 변화는 의심할 바 없이 힙합의 대유행이다. 이는 를 비롯해 한국의 인디 힙합을 제도권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아이돌 음악에도 의미 있는 변화의 계기로 작용했다. EDM(전자댄스음악) 일변도였던 아이돌 음악의 트렌드는 힙합과 R&B 등 흑인 음악 성향이 강해진 어반(urban) 사운드로 전환되었으며, 랩을 음악의 전면에 내세운 이른바 ‘힙합 아이돌’은 케이팝의 대안으로 각광받기 시작한다.

방탄소년단 역시 이 유행의 전환기에 등장해 케이팝 특유의 퍼포먼스에 힙합의 내러티브를 접목해 주목을 받았다. 초창기 대표곡인 《N.O》처럼 정제되지 않았지만 거칠고 날 선 랩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케이팝 특유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고스란히 가진 이들의 음악은 싸이의 성공 이후 급격하게 불어난 북미 팬들의 취향과 잘 맞았다. 또한 자신의 음악을 책임지고 정체성을 투사하는 탈아이돌의 방법론을 통해 케이팝은 ‘만들어진’ 음악이라는 고정관념에 맞선 것은 기존 아이돌과 다른 중요한 변별점이었다.

펑크, 힙합 등 오랜 역사를 지나며 대중음악의 ‘진정성’에 엄격한 잣대를 발전시켜온 미국 대중의 관점에서 방탄소년단의 음악은 ‘공장형 아이돌’에 쏟아지는 비난을 피해 마음 놓고 지지를 보내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주변의 회의적인 시선과 비판에도 힙합에 기반을 둔 진정성 담긴 담론을 꾸준히 끌어안은 방탄소년단은 결국 기존 케이팝 팬을 넘어 흑인과 라티노(라틴아메리카 출신) 등 다양한 인종을 포함한 광범위한 팬덤을 만들며 탈케이팝의 가능성을 보여주게 된다.

미국 현지 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방탄소년단의 음악은 힙합을 포함한 그들의 음악과도, 그들이 지금껏 알았던 케이팝과도 다른 느낌을 준다고 한다. 그 핵심은 무엇일까? 나는 국적과 문화를 초월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동의 코드를 지적하고 싶다. 방탄소년단은 그간 아이돌 음악에서 기피되던 청춘과 성장의 내러티브를 적극 껴안아 그것을 일관된 정체성으로 삼은 사실상 유일한 케이팝 그룹이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청춘과 성장의 내러티브</font></font>
지난 5월20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 참석한 방탄소년단. 연합뉴스

지난 5월20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 참석한 방탄소년단. 연합뉴스

‘학교 3부작’에 이은 ‘화양연화’ 연작을 통해 구체화하기 시작한 이들의 이야기는 추상적인 콘셉트와 허구적인 세계관이 주류를 이룬 기존 케이팝과도, 때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자기 증명과 이른바 ‘스웩’이라는 마초적 허세의 내러티브에 탐닉한 미국의 주류 힙합과도 다른 매력을 뽐냈다. 나 가 보여주는 들끓는 에너지, (Cypher) 시리즈와 (Mic Drop)을 통해 드러나는 젊은 뮤지션들의 당찬 면모, 무엇보다 (Epilogue: Young Forever)와 에 담긴 상처받기 쉬운 젊음의 희망과 슬픔의 이야기는 국적과 문화를 뛰어넘어 모든 젊은이에게 같은 울림을 선사하고 있다.

눈치 빠른 미국 음악시장이 일찌감치 BTS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그들의 음악이 가진 이 보편성의 잠재적 가치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수년간 이렇다 할 차세대 슈퍼스타를 발굴하지 못한 미국 팝계의 침체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이다. 팝 아이돌 가수가 화려하지만 영혼 없는 메시지로 깊이를 갖지 못하고, 제도권의 힙합 뮤지션이 지나친 향락주의로 경도되어 청소년의 롤모델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트렌디한 음악과 퍼포먼스에 더해 건전한 메시지를 겸비한 BTS는 그들이 원한 젊은 팝 뮤지션의 모범으로 보였을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간과돼온 진리</font></font>

BTS의 미국 진출을 무려 전설적인 비틀스에 빗대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활약을 실시간 보도하며 ‘아시안’이 아닌 ‘글로벌’ 스타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상업적이고 냉정한 미국 언론이지만 이런 태도가 단순한 호들갑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용광로가 언제든 그들 안에 BTS를 녹여낼 준비가 됐다고 본다면 너무 성급한 판단일까.

다들 방탄소년단의 성공 요인을 찾기 바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본질을 외면한다면 공허한 분석이 될 뿐이다. 방탄소년단의 성공은 트렌드와 감성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들만의 느낌으로 재해석하려고 한 노력과 아울러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성장의 내러티브를 껴안아 쉽게 모방하기 어려운 진정성 있는 음악 세계를 쌓음으로써 가능했다. 그리고 이는 그간 ‘시스템’과 ‘통제’를 미덕으로 삼고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정교한 ‘전략’에 골몰해온 케이팝 산업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톱다운 방식이 아닌 밑바닥에서 끈끈히 다져 올라간 인기, 부족함을 억지로 숨기지 않고 팬과 함께 성장해나가는 솔직함, 서로 다른 국적과 인종의 팬들을 묶을 수 있는 젊음의 서사는 어찌 보면 당연하면서도 종종 간과되어온 대중음악의 보편적 성공 비결이 아니던가. 재능은 발견할 수 있고 기교는 훈련할 수 있지만, 아티스트의 진정성은 제작되지 않는다는 것, 이 단순한 진리를 새삼 되새기게 하는 방탄소년단과 그들의 음악은 어느새 그 누구라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똑같이 재현할 수는 없는 새로운 케이팝의 모델이 되고 있다.

김영대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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