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한반도 남쪽에서 두 개의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4월 제주도에서, 10월엔 여수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조선경비대 제14연대는 제주도 항쟁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진압 명령을 받은 제14연대 군인들은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제주도 파병을 거부하고 10월19일 봉기했다. 여순사건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시작된 것이 아니었고, 남로당 중앙조직과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여순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은 제14연대 일부 하사관이었다. 이 사건은 단지 제14연대 군인들의 반란으로 끝나지 않았다. 여수·순천 등 전남 동부 지역 여러 군의 지역민들이 참여하면서, 이 사건은 일부 군인의 반란에서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바뀌었다. 지역민이 봉기에 호응하면서 여순사건은 전남 동부 지역으로 급속히 번져갔다. 정부가 수립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일어난 여순사건이 이승만 정권에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1989년에야 비로소 공개된 사진집적게 잡아도 최소 1만 명이 넘는 지역민이 목숨을 잃는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었음에도, 여순사건은 60여 년 동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사건이었다. 군인과 경찰에게 이유도 모른 채 억울한 죽임을 당했어도, ‘빨갱이’ 딱지가 무서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권도 그랬지만, 수십 년 동안 여수와 순천은 빨갱이 마을로 매도돼, 여순사건은 빨갱이를 척결하고 대한민국을 반석에 세운 사건으로만 역사책에 기록되고 기억됐다.
70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바뀌었을까? 국방부는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보상에 관한 특별법안 검토 보고서’에서 진압 작전 중에 벌어진 민간인 피해는 “반군 및 부역혐의자 색출과 처형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고 가담자를 선별했기에 무고한 민간인 피해는 없다고 주장한다.
사진❶은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이 여수 시민을 여수서국민학교에 집합시킨 모습을 찍은 것이다. 이 사진은 기자로 순천에 제일 먼저 도착했고, 여수에서도 많은 사진을 찍은 이경모의 사진집에 실렸다. 사진집에 실린 사진들은 당시 신문에 전혀 보도되지 못했고, 1989년에야 사진집으로 공개됐다. 이경모는 불타는 여수 시가지, 반란군에 협조했다고 붙잡힌 여학생들 등 당시 상황을 그대로 말해주는 귀중한 사진을 남겼는데, 이는 여순사건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진은 왜 여순사건을 대표할 수 있을까? 이것이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가? 운동장에는 양쪽으로 나뉘어 앉은 수백 명의 남자들이 보인다. 오른쪽에는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받는 사람들이 앉았는데 이들 중 89명이 처형됐다. 학교 운동장은 삶과 죽음을 가른 공포의 장소였다. 하지만 당시 는 이 장면을 반란 지역에서 빠져나와 안전한 보금자리(‘여수 피난민 수용소’)를 찾은 것으로 보도했다. 군대가 여수 시민을 학교 운동장에 집합시킨 것은 피난처를 제공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누가 반란군에 협조했는지 가려내기 위한 것이었다. 진압군은 시내를 점령하자마자, 모든 시민에게 집 밖으로 나와 집합하라고 명령했다. 진압군은 순천에서도 순천북국민학교 운동장에 순천 시민들을 모아 ‘반군 잔당과 폭도, 부역자’를 가려냈다. 숨어서 나오지 않으면 반란군으로 간주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학교 운동장에서 이루어진 것은 누가 적이고 누가 우리 편인지를 나누는 죽음의 선별이었다. 하지만 당시 언론은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던 혐의자 색출 광경을 반란군을 피해 국군의 품에 안긴 평온한 삶의 장소로 소개했다. 이렇게 거꾸로 된 인식이 수십 년간 유지되고 교육됐다.
흰 고무신을 신은 봉기군국방부는 여순 지역에서 죽은 사람들은 모두 ‘폭도’였기에 그들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순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생존 경찰관을 선두로 우익 진영 요인들과 진압군 병사로 이루어진 심사요원 5~6명이 시민들을 줄줄이 앉혀놓고 사람들의 얼굴을 쑥 훑고 다니다가 ‘저 사람’ 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교사 뒤에 파놓은 구덩이 앞으로 끌려가 불문곡직하고(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즉결처분(총살)해버렸다. 그 자리에는 일절 말이 필요 없었다. 모든 것이 무언(無言)인 가운데 이루어졌다. 사람을 잘못 봤더라도 한번 찍혀버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여수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던 김계유의 이야기다.
다른 증언도 있다. “거기는 아주 지옥이었어. 갔더니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어요. 칼빈으로 막 쏴 죽이더라고. 끌려온 사람한테 앉아 있는 사람 중 반란군 협조자를 골라내라고 그러더니 지목당한 사람을 옆으로 끌고 가서 쏴 죽였어요. 손가락질 지목을 당한 사람은 가차 없이 사람들 있는 앞에서 칼빈 총으로 쏴버렸어요. 내 눈으로 그걸 봤어요. 군인도 있고 경찰도 있었어요.”(당시 순천사범학교 4학년이던 정영호가 본 순천북국민학교 상황)
당시 심사 기준이 된 것은 교전 중인 자, 총을 가진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흰색 ‘지까다비’(일할 때 신는 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미군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였다. 주민들 가운데 흰 고무신을 신은 사람도 봉기군으로 간주됐다. 흰 고무신은 지방 좌익세력에게 처형당한 우익 인사 김영준이 운영하는 천일고무공장에서 만든 것인데, 봉기 기간에 인민위원회가 이를 배급했기 때문이었다. 국군이 입던 군용 표시가 있는 속옷을 입은 사람도 혐의 대상이었다. 진압된 뒤 겉옷은 버릴 수 있지만 속옷은 갈아입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다. 이는 원래 제14연대 군인을 색출하기 위한 기준이었지만, 진압군은 이런 외모의 사람들을 협력자로 간주했다.
심사는 외모나 다른 사람의 고발, 개인적 감정에 의한 중상모략, 강요된 자백 등에 따라 이루어졌기에 사람들이 억울하게 처벌받는 일이 많았다. 우익 인사라고 모두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여수여중학교 교장 송욱은 김구를 추종한다는 혐의로, 순천의 박찬길 검사는 경찰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부역 혐의자로 찍혔다. 박찬길 검사는 순천이 진압된 직후, 즉결처형됐다. 국회의원 황두연도 인민재판 판사를 지냈다는 우익 신문의 날조 허위 보도로 국회에 출석해 자신의 결백을 눈물로 호소해야 했다.
자세한 조사는 없었고, 즉결처분을 했다. 진압군이 이렇게 마구잡이로 시민을 처형할 수 있었던 것은 계엄 발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계엄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계엄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계엄은 지역 군 사령관이 마음대로 공포하더니, 10월25일에는 국무회의에서 계엄이 발포됐다. 국방부는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 계엄법이 없었다 하더라도 일제강점기에 계엄령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정부가 이 법을 의용(依用)했다고 기이한 주장을 한다. 국방부의 ‘검토 보고서’에는 ‘儀容’이라고 잘못 표기돼 있기조차 한데, 이런 실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제강점기 계엄령을 의용했다고 할 경우 대한민국의 민주적 정통성이 완전히 부정된다는 것을 국방부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일제 계엄은 ‘법’이 아니라 일왕의 ‘명령’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일왕의 존재를 기초로 만들어진 계엄령에 의거해 움직이는 나라였다는 것인가?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맨 처음 한 일 중 하나는 조선 인민을 정치적으로 억압했던 치안유지법 같은 일제 법령을 철폐한 것이었다. 이 기초 위에서만 민주국가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이 치안을 책임지는 계엄은 군이 행정권과 사법권을 일시에 장악하는 초헌법적 조치다. 계엄이 헌법에 명시됐더라도 그것은 헌법을 뛰어넘는다. 경찰로 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울 때, 평상의 수단으로 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운 ‘예외 상태’에 돌입할 때 국가의 가장 강한 물리적 조직이 전면에 나서 ‘국민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계엄의 본질이다. 결국 계엄을 선포한다는 것은 물리력 행사 외에 다른 수단으로도 국민을 통치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승만 정권이 법에도 없는 계엄을 국무회의에서 선포한 것은 통치 능력이 바닥에 닿았음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녀노소 안 가린 혐의자 색출혐의자 색출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불안감은 어린이에게까지 미쳤다. 이승만은 “각 학교의 각 정부기관에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이승만은 이것을 진짜로 그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승만은 4·19 때 여순사건을 꺼내들면서 그때는 아이들도 난동을 부렸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계엄이 무엇인지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만주군에서 일했던 군인들은 계엄령 선포를 시민들에 대한 마구잡이 처리, 즉결처분을 가능케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사용했다. 혐의가 있다고 간주되면 그 자리에서 민간인을 즉결처형했다. 이제 권력은 경찰에서 군대로 넘어갔고, 군대는 독립군 토벌 경험이 있는 만주군 출신이 장악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국민 자격증 ‘반공’여순사건은 여수가 완전히 진압된 10월27일에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정부군이 순천·여수를 장악한 뒤에도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작전은 계속돼 구례, 광양 등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여순사건의 유산은 지역에 한정되지도 않았다. 여순사건 이후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한국 사회가 본격적인 반공사회로 접어드는 법제적 기초가 되었다. 그때부터 반공은 생존의 기본 조건이 되었고,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증이 되었다. 여순사건의 진실 규명과 해원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 사회가 형성되는 근원적 사건인 여순사건은 아직도 한국 현대사의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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