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한다. 또한 새로운 것을 만들기도 한다. 전쟁통에 여러 ‘길’이 차단되고 파괴된다.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고 열리기도 한다. 강을 건너는 길인 다리는 이것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전쟁 때 다리는 군이 공격과 방어를 위해 통제 관리하는 핵심 시설이다. 군은 적의 공격과 침투를 방어하는 방벽으로 삼기 위해 다리를 폭파하거나, 아군의 병력 투입과 보급을 위해 다리를 만들기도 한다. 이 때문에 민간인, 특히 피란민이 다리에 접근하는 것을 막거나 통제한다. 그러나 전란이 있기 전에는 지역주민이 일상적으로 오갔던 다리다. 급격하게 전선이 밀리고 정부와 군의 피란 통제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폭파나 폭격으로 인한 다리의 파괴는 엄청난 비극을 만들어낸다.
다리 못 넘고 잔류한 국민은 ‘부역자’한국전쟁이 시작되고 한강, 금강, 낙동강의 큰 다리들이 파괴됐다. 적의 주공로와 침투로를 파괴해 차단하고 적의 전진을 ‘지연’하는 군사작전의 하나로 이루어졌다. 이 작전은 사람들의 피란길을 차단하는 것이기도 했다. 심지어 어처구니없게도 아군 후퇴로를 끊어서 아군 병력과 군수 장비를 고스란히 적에게 갖다 바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군 최고수뇌부(육군총참모장)의 잘못된 판단과 지시로 이루어진 한강 다리 폭파(1950년 6월28일 새벽 2시30분)가 단적인 예다. 서울 창동·미아리 방어선에 투입된 한국군 9만8천 명의 퇴로가 차단됐고, 2만4천 명만이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 것으로 집계됐다.(김동춘, , 91쪽, 2000년) 다리 위에서는 수백 명의 경찰과 피란민이 폭사당했다.
다리 파괴의 피해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서울에 돌아와서 이승만 정부가 긴급히 한 일은 다리가 끊겨서 피란 가지 못해 서울에 ‘잔류’했던 국민을 ‘부역자’(“역도에게 협력한 자”)로 낙인찍는 것이었다. 국민을 버리고 ‘도강’한 국가가 그 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거꾸로 ‘잔류’한 국민에게 “너 적과 역도들에게 협력했지? 왜 서울에서 도망쳐 나오지 않았어?”라며 처벌하고 죽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말한 “부역하지 않은 개, 해피” 일화는 잔류하게 된 국민을 ‘개만도 못한 부역자’로 바라보는 것이었다.(이임하 외, , 144~146쪽) 이러한 피해를 겪고도 살아남은 국민이 1·4 후퇴 때 어떻게 됐는지는 너무 분명하다. 한겨울 피란길에 얼어 죽더라도 선택지는 하나였다. 개전 초 여름과 달리 1951년으로 넘어가는 엄동설한의 ‘반공 엑소더스’ 신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한국을 공산화로부터 구하고 자유 진영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참전한 미군(유엔군)은 그래도 이승만 정부의 행태와 다르지 않았을까? ‘전후’ 세계 질서를 주조한 헤게모니 국가이자 자유 진영의 리더인 미국을 어찌 자국민의 안전에는 국가부재 상태를 여실히 드러냈고 정권의 안전에는 국가폭력을 자행했던 신생 이승만 정부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상과 달리 미군도 개전 초기 이승만 정부의 실패를 답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군은 적에게 급격하게 밀리면서 ‘지연전’ 차원에서 다리는 물론 마을과 도시를 파괴했다. 거듭되는 패배로 인한 패닉(혼란) 상태가 인종주의적 멸시와 맞물리면서 피란민을 적대시하는 통제 관리 정책을 시행했고, 여기저기서 피란민을 포로로 포획하거나 발포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다리에서 벌어진 참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군은 낙동강 방어전을 준비하기 위해 8월3일까지 모든 부대에 낙동강을 건너 철수하도록 하고, 왜관교와 득성교 폭파를 지시했다. 14공병대대가 득성교 폭파 임무를 맡았다. 미 25사단 24연대와 한국군 17연대가 다리를 건너 철수를 완료했지만, 피란민이 뒤이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그래도 다리를 폭파했고, 피란민 수백 명이 죽었다. 북한군은 아직 득성교 강가에 이르지 않았던 때다.
득성교 40㎞ 상류에 있던 왜관교는 8공병대대가 폭파를 준비했다. 8월3일 해가 저물 때까지도 미 1기병사단의 도강이 진행되고 있었다. 철수가 완료되자 사단장 호바트 게이 장군은 부대의 후위를 쫓아 다리로 밀려드는 수천 명의 피란민을 저지하고 다리 폭파를 지시했다. 피란민들도 필사적이었고, 결국 수백 명의 피란민이 폭사당했다. 왜관교도 득성교처럼 폭파 시기가 너무 빨랐다. 북한군 주력 부대가 적어도 24㎞는 떨어져 있었을 때다.
사진❶은 8월2일 미군이 득성교 폭파를 준비하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사진에는 ‘RESTRICTED’ ‘SECURITY INFORMATION’ 스탬프가 찍혔고, 그 위로 줄이 그어져 있다. 자체 검열에서 기밀로 묶였고, 이후 해제된 것이다. 미군 사진병이 찍은 수많은 교량 폭파 사진 대부분 기밀이 아니었는데, 득성교와 왜관교 폭파 준비 사진은 기밀로 취급된 이유가 무엇일까? 단지 작전상 이유일까? 아니면 다리 폭파로 피란민 폭사 사건이 불거져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까?
폭파된 다리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복구되거나 새로 건설됐다. 적의 남하를 막던 방벽 구실을 하는 다리가 이제는 병력과 보급에서 북진 통로가 되었다. 큰 강의 다리가 복구되거나 부교가 가설되면 어김없이 한국 정부와 미군의 요인이 개통식에 참여해서 ‘기념’했다.
서울 ‘수복’ 직후인 1950년 10월19일 미 62공병대대는 한강철교를 복구했다. 첫 철도 개통 행사에 이승만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신성모 국방부 장관, 김석명 교통부 차관 등이 참석했다. 1951년 4월18일 낙동강 다리 개통식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리는 복구됐지만 주로 군사 목적으로 활용된 다리는 전쟁 전처럼 지역주민의 일상에서 멀어졌다. 대신 미군이 민사 원조 차원에서 작은 다리를 새로 만들어주는 일이 많았다.
개성과 서울 사이에 있는 임진강에서도 다리의 파괴와 복구 건설이 반복됐다. 1951~52년 임진강에는 11개 다리가 있었다. 전쟁이 끊어놓은 ‘자유의 다리’(임진강 철교)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기러기(Honker) 다리, 저어새(Spoonbill) 다리, 엑스레이(Libby) 다리, 홍머리오리(Widgeon) 다리는 지역민이 아니면 잘 모를 거다. 이 다리들은 현재 경기도 파주를 만들어온 ‘길’이다.(파주시·성공회대 냉전평화센터, , 275쪽, 2020년)
기러기 다리 자리는 원래 아군이 개성 부근에서 적의 탱크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부교(뜬다리)를 만들었던 곳이다. 이 군사 목적의 부교는 ‘6·25전쟁’ 1주년에 철거됐다. 대신 개성 내봉장에서 열린 정전협상에 참석하기 위해 파주 선유리에 설치한 유엔군임시사령부에서 출발해 임진강을 건너갈 다리가 필요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게 기러기 다리다. 이 다리로 협상 대표단과 기자단이 오갔으니 정전, 종전, 평화로 가는 가교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다리가 한 달여 만에 파괴됐다.(앞의 책, 276~277쪽) 폭파나 폭격이 아닌 홍수였다. 임진강은 여름철엔 장마로 급류가 형성되고 홍수가 발생했다. 겨울철엔 유빙이 교각을 파괴하기도 했다. 대안은 그나마 튼튼하고 안전하게 건설된 임진강 철교, 즉 자유의 다리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파주를 거쳐 개성을 연결해주던 이 다리는 폭파와 폭격으로 철교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1950년 11월 한 번 복구됐지만 다시 파손돼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였다. 임진강 철교는 1952년 2~3월 세 차례 상행선 복구 작업을 했고, 협상 대표단과 기자단은 나룻배와 헬기 대신 자유의 다리를 건너 회담장으로 갈 수 있었다.(277쪽)
임진강에는 저어새 다리와 엑스레이 다리도 있다. 각각 ‘전진교’와 ‘북진교’라는 군사 용도를 물씬 풍기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명명은 대상의 성격을 규정하고 그에 따른 효과를 유발한다. 다리 이름‘들’은 하나의 다리를 바라보는 여러 기억과 욕망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새 이름으로, 누군가는 작전 지역으로, 또 누군가는 어떤 열망으로 이 다리들을 부를 것이다.(284쪽)
전쟁이 남긴 다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다리 위에 무엇이 오가게 할 것인가? 바로 지금은 평화의 이름으로 다가오고 있다. 군사적 평화만이 아니라 금지됐던 땅을 열고 끊어진 마을과 마을을 이어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흐르는 평화여야 한다. 전쟁통에 복구되거나 새로 만들어진 임진강의 많은 다리가 조만간 평화가 건너오는 길목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연구센터장*연재를 마치며: ‘사진 속 역사, 역사 속 사진’ 연재를 시작한 게 2017년 12월 겨울이니 2년3개월 정도 글을 썼습니다. 전쟁이 여전히 한국의 현재를 규정하는 만큼, 전쟁 사진이 찍힌 맥락과 사진이 담지 못한 ‘사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서 현재의 한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글을 쓰려고 애썼습니다. 2018년 판문점에서 열린 ‘4·27 남북 정상회담’을 뜨겁게 바라보고 난 뒤에는 전쟁과 병영, 동원을 회로로 장착한 한국 사회가 어떻게 하면 이를 불식하고 탈분단, 반전, 평화의 구체적인 상‘들’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징검다리를 만드는 심정으로 썼습니다. 그동안 뜨거운 응답과 차가운 질책으로 격려하고 생각을 교류해준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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