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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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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부두에 버려진 피란민을 아는가

피의 보복과 무차별 북폭…

피란민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등록 2018-12-15 13:11 수정 2020-05-03 04:29
❶ 1950년 10월19일 함경남도 함흥 지역 굴속에서 학살된 ‘정치범’ 주검 300여 구의 신원을 친지와 친구들이 확인하고 있다. 강성현 제공

❶ 1950년 10월19일 함경남도 함흥 지역 굴속에서 학살된 ‘정치범’ 주검 300여 구의 신원을 친지와 친구들이 확인하고 있다. 강성현 제공

황석영의 소설 은 황해도 신천 지역에서 벌어진 ‘피의 보복’ 학살을 배경으로 한다. 이에 대한 남쪽과 북쪽의 기억은 엇갈린다. 한국에서는 ‘10·13 반공의거’, 북한에서는 ‘신천 대학살’이다. 황석영이야 소설가니 ‘기독교’와 ‘사회주의’라는 두 ‘손님마마’에 걸린 동족 학살의 비극 이야기로 풀어갈 수 있었다. 그는 북쪽에선 선전으로, 남쪽에선 신화로 점철된 ‘황해도 신천 사건’의 진실을 재조명하기 위해 ‘픽션’(허구)이란 형식을 빌렸지만, 논픽션(사실) 다큐를 넘나드는 것 같았다. 과연 이 사건은 선전이나 신화가 아닌 역사가 될 수 있을까.

연구가 없는 건 아니다. 이 사건에 대한 남북한의 통설을 실증적으로 검토하고 이 지역을 점령한 미군 자료를 검토한 결과, ‘10·13 반공의거’와 ‘신천 대학살’이 연속되는 사건이었음을 논의하는 한모니까의 연구(‘봉기와 학살의 간극’, 2014)가 특히 인상에 남는다.

국군과 유엔군의 38선 ‘돌파’ 뒤 북쪽 지역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북진 소식이 전해지자 북쪽의 반공 인사, 청년, 학생, 기독교인 사이에는 “강한 설렘이 일었다” 한다. 해방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그냥 앉아서 맞이하지 않고 만세시위와 ‘봉기’를 준비했다.

남북 정부가 돌아가며 민간인 학살

북한 당국이 어떻게 대응했을지 충분히 예상된다. 전쟁 초기 남쪽에서 한국 군경이 그랬듯이, 북쪽에선 북한 정치보위부와 내무서 등이 반공 우익 인사와 기독교인을 분류해 예비검속했다. 목사와 신부, 수녀도 포함됐다. 만세시위나 봉기가 벌어지기 전 북한 당국은 예비검속자를 ‘반동분자’로 처리해 학살했다. 황해도 신천에서는 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반공 봉기가 성공했다. 반공 치안대가 북한 당국 관계자들, 심지어 그 가족을 선제적으로 학살하거나 구금했다. 이후 쌍방에서 ‘피의 보복’이 대량으로 벌어졌다. 반공 치안대에만 맡겨진 채 점령지 행정과 치안의 공백이 두드러졌던 일부 북쪽 지역은 총이 법이 되었고, 공포와 보복이 반복됐다.

중국인민지원군(이하 중공군)이 참전해 전세가 변하자 사태가 극단으로 치달았다. 후퇴 전 반공 치안대에 의한 ‘빨갱이’ 학살 광풍이 몰아치더니 곧이어 북한의 ‘반동분자’ 학살이 대량으로 벌어졌다. 한국전쟁 연구로 세계적 석학이 된 브루스 커밍스는 “김일성조차 남한과 협력했다고 의심받은 자들을 겨냥한 보복이 과도했다고 비난”(, 257쪽, 2017)했다는 문서를 확인했다. 실제 1950년 11월23일 하달된 북한 내무성의 명령, 적 앞에서 그들을 환영하는 반동분자는 즉결 처분할 수 있다는 명령은 불난 곳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황해도에서만 그랬을까? 동북쪽 함경도라고 다를 리 없다. 미군의 전쟁범죄조사단 자료를 보면, 함경남도에선 10월에만 538명, 함경북도에선 10월과 12월에 434명이 학살됐다. 미군이 조사한, 북한 지역에서 북한 당국이 저지른 북한 주민 학살에 대한 조사로 국한해도 그렇다. 이건 최소치다. 쌍방의 보복 학살이 꼬리를 물면서 대량 참극으로 귀결된 만큼 실제 대량학살 수치는 한참 상회한다. 같은 시기(9월 말부터 12월까지) 이승만 정부의 서울 ‘환도’ 뒤 대부분의 남한 ‘수복’지에도 부역(혐의)자 학살 광풍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1950년 가을과 겨울 남북 정부에 의해 한반도 전체가 피로 물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❶은 10월19일 윈즐로 중위가 함흥 지역 굴속에서 학살된 ‘정치범’ 주검 300여 구를 포착한 여러 사진 중 하나다. 인민군이 굴 입구를 막아 그들을 질식시켰다 한다. 사진❶은 원경 구도로 찍었지만, 다른 사진들은 점차 클로즈업하는 방식으로 포착한다. 늘어놓은 주검들과 이를 확인하며 비통해하는 친지들의 표정 사이를 응시하는 촬영자의 공감 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한국에 여러 해 체류한 주한미군사고문단 사진장교 윈즐로는 전쟁 초기부터 전쟁의 폐허와 참혹한 광경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한국인을 휴머니즘적 시선으로 응시하는 사진을 남겼다.)

인민군과 함께 북한 당국은 후퇴하고, 함흥에는 주검과 함께 주민들이 남겨졌다. 주민들은 국군과 미군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반공 기독교 인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반공 기독교와 거리가 먼 주민들도 살아남기 위해 시민환영대회에서 만세를 선창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춤추고 노래했다. 그렇게 자신을 입증해야 했다. “아낙네들, 여학생, 노인과 아이들”이 왜 없었겠나? 11월22일 이승만 대통령의 함흥 방문 때 만세 소리는 절정에 이르렀다. 주민들도 그렇게 국군과 미군이 두만강,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 전쟁이 끝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전세가 완전히 뒤바뀌자 대다수 주민은 고향 땅에 남을 수 없게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한 만세 행동은 북한 당국에 반동분자로 즉결 처형되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반공도 철수도 생존이었다
❷ 미군이 촬영 편집한 ‘흥남 소개’의 한 장면. 111-ADC-8611. (영상을 제공한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갑생 연구원에게 감사드린다.) 강성현 제공

❷ 미군이 촬영 편집한 ‘흥남 소개’의 한 장면. 111-ADC-8611. (영상을 제공한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갑생 연구원에게 감사드린다.) 강성현 제공

반공 기독교 인사들이 “자유의 땅”으로 피란하기 위해 흥남부두로 몰려들었다. 또한 보복(학살)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존을 위해 1950년 끝자락의 혹한을 감내한 피란민 가족도 많았다. 사진❷는 철로를 따라 흥남부두로 서둘러 달려가는 피란민 가족들을 포착했다. 머리에 봇짐을 이고 손에 가재도구를 들고 달리는 여성을 따라 아이가 아이를 업거나 손잡고 뒤를 따라 달리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근처 미군들은 한가롭게 이를 지켜보고 있다. (이 영상이 언제 촬영됐는지 날짜 기록이 없는데, 승선을 기다리는 피란민 3만 명을 찍은 12월18일 이후가 아닐까 추정한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피란하지 않고 고향 땅에 남아 “공산통치” 아래 북한 주민으로 살게 되면 생존을 위협받는 또 다른 결정적 요소가 있었다. 바로 미군의 폭격이었다.

“눈밭 위에 쏟아지는 불의 비.” 당시 ‘북폭’이 얼마나 파괴적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하늘에서 소이탄과 네이팜탄이 퍼부어졌다. 북한의 전쟁 피해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국제민주여성연맹 조사단(유럽·미국·아시아·아프리카 18개국을 대표하는 20명과 참관인 1명으로 구성, 단장은 캐나다 국적의 노라 로드)이 본 것은 그 결과로 펼쳐진 광경이었다.

의 저자 김태우에 따르면, 1950년 11월5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모든 도시와 농촌 마을을 군사 목표로 간주하는 ‘초토화 정책’을 지시했다. 극동공군 제5공군 소속 경폭기와 전폭기는 “은신처를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건물을 포함한 여타 목표물들을 파괴”하기 위해 소이탄과 네이팜탄을 지상으로 쏟아부었다. 인화성이 강한 소이탄을 쏟아부은 뒤 불을 끄기 위해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저공비행 기총소사로 조직적으로 사살했다(김태우, , 306~307쪽, 2013)는 대목에선 침이 삼켜지지 않았다. 기밀 해제된 방대한 미 공군 자료로 꼼꼼하고 신중하게 실증적으로 사실의 조각들을 맞춰가며 구성한 논의였다. 믿기지 않았지만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초토화 작전은 미군 후퇴와 함께 점차 북한 전역으로 확대됐다. 농촌 지역 소규모 마을과 산간 지역의 고립된 집들까지 소이탄 폭격의 대상으로 간주됐다. 전폭기 편대는 적절한 목표물을 발견하지 못하면 해당 구역 내 마을과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탑재한 무기를 모두 소진할 수 있는 좋은 목표물로 인식됐다. 김태우는 미 공군 문서에는 ‘공격하다’(attack)나 ‘폭격하다’(bomb) 같은 단어보다 ‘소진하다’(expend, use up) 같은 표현이 자주 쓰였다고 말한다.( 312쪽)

미군 북폭, 민간인도 교회당도 가리지 않아
❸ 미군이 촬영 편집한 ‘흥남 소개’에서 흥남부두가 폭파되는 장면. ❹ 흥남 철수에 대한 작전 평가보고서 표지. 1951년 1월21일. 강성현 제공/ 강성현 제공

❸ 미군이 촬영 편집한 ‘흥남 소개’에서 흥남부두가 폭파되는 장면. ❹ 흥남 철수에 대한 작전 평가보고서 표지. 1951년 1월21일. 강성현 제공/ 강성현 제공

기독교인들은 폭격이 시작됐을 때 교회당 가까운 곳으로 대피했다고 한다. 미국인들이 교회당은 파괴하지 않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이탄은 교회당을 피해가지 않았다. “높은 고공에서 투하된 소이탄은 가공할 만한 불의 바다를 지상에 만들어냈고 그 불의 바다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거나 다쳤다. 북한 주민들은 자신의 머리 위를 비행하는 폭격기를 바라보며 ‘생존’이라는 문제에 절실하게 매달려야만 했다. 살아남는 것만이 최대 목표가 되었다. 전쟁 동안 북한에서 전선 ‘후방 지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323쪽)

1950년 겨울 북한 주민들의 가장 적극적인 생존 방책 중 하나는 피란이었다. 북한 전역에서 피란민이 대량 남하했다. 적잖은 국내외 연구자들이 그 배경으로 미 공군의 무차별 폭격을 든다. “민간인들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폭격을 하는 쪽의 뒤편뿐”이라는 말은 참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심지어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소문이 퍼지면서 피란길에 올랐다는 증언도 여럿 있다. 11월30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공식 기자회견에서 원폭 사용 가능성을 언급했고, 12월9일 맥아더 장군도 핵무기 사용의 자유재량권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반공 우익 청년단 등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거의 실시간으로 원폭 투하 소문이 돌았다. 이렇게 볼 때, 미군과 국군의 흥남 철수 때 부두로 몰려들었던 피란민 20만 명 속에는 “공산마굴”을 피해 “자유의 땅”으로 가는 반공 기독교 성향의 주민이나 ‘자유 피란민’뿐 아니라 남북의 보복 학살 틈바구니에서, 처참한 불의 바다를 만드는 쪽 뒤편에 가려 했던 생존 피란민 다수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북폭의 책임자 극동공군 사령관 G. E. 스트레이트마이어와 제5공군 사령관 E. E. 패트리지 장군은 12월20일 평양을 포함해 원산, 함흥, 흥남을 완전히 소각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평양, 원산, 함흥은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갔고, 흥남에서는 국군 철수가 완료됐으며, 미군 제10군단·7사단·3사단이 철수하고 있었다. 부두와 그 인근에는 민간 피란민이 가득했다. 12월23일에만 수송선 LST 2척과 상선 3척으로 약 5만 명의 피란민이 승선했다는 추정이 있다. 다음날까지 피란 승선이 계속됐는데, 9만1천~9만8천 명이 배에 올랐고 나머지 10만여 명은 부두에 남겨졌다.

12월24일 오후 2시10분 흥남부두 폭파 명령이 내려졌다. 미리 설치된 폭탄들이 터지고 항공·함포 사격이 이어지면서 부두와 그 인근은 엄청난 화염에 휩싸였다. 사진❸은 그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국군과 미군의 공식 전사는 거기에서 끝난다. 흥남 철수 직후에 작성된 미군의 철수 작전 평가보고서에서도 마찬가지다.(사진❹) 피란민들을 태우기 위해 싣지 못했던, 또는 내려졌던 탄약, 얼어붙은 다이너마이트, 투하용 폭탄, 유류의 수치가 나열되며, 이것들도 폭파와 함께 파괴됐다로 끝난다. 정말 그런가?

난 부두에 남겨졌던 피란민 10만여 명의 상황이 궁금했다. 당시 흥남 철수 때 종군했던 프랑스인 기자의 기록은 공식 전사의 사각에 가려진 그들의 존재를 다음과 같이 포착한다.

20만 명 중 10만 명이 북한에 남았다

“그곳을 떠나려 했던 사람들, 버림받았다는 감정만이 아니라 군대가 칠 수밖에 없던 장벽에 막혀 붉은 군대에 넘겨졌다는 감정을 갖게 될 사람들이 그 체제에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세르주 브롱베르제 엮음, 290쪽, 2012)

엄청난 폭파와 불기둥의 소용돌이에서도 생존한, 그러나 버려진 피란민들은 “자유 진영”에 대해 어떤 감정과 태도를 갖게 되었을까?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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