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이 거울을 바라보며 입술연지를 바르고 있다. 주변에 보이는 물건들이 예사롭지 않다. 여인은 군복 같은 옷을 입고, 좁은 공간 왼쪽에 폭탄 여러 개가 세워져 있다. 좀더 세심히 들여다보면, 들고 있는 거울도 여성들이 일상에서 쓰는 것이 아니다. 비행사가 조난당할 때 연락하기 위해 쓰는 ‘비상신호 거울’이다. 화장하는 여인과 폭탄들이 나란히 있는 모습은 상당히 어색해 보인다. 여러분은 이 사진이 어떤 장면을 찍은 건지 상상이 되시는지?
이 사진은 수송기 내부를 찍은 것인데 ‘심리전의 목소리’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낮게 비행하는 수송기 안에서, 여성은 확성기로 인민군에게 항복을 권유하거나 전황이 적군에게 불리하다고 선전하는 임무를 맡았다. 확성기를 통한 직접 방송은 심리전의 하나였다. 아군의 승승장구를 적에게 알리고 부질없는 죽음을 피해 자유세계로 넘어오라는 목소리 방송은 군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궁극적으로 전쟁에 승리하려는 유엔군 심리전이었다. 목소리 선전은 비행기를 이용한 확성기 방송도 있었고, 라디오로 방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심리전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은 삐라(전단)를 통한 광범위한 선전이었다.
전쟁이 총과 대포가 불을 뿜는 전투만으로 이루어지던 시대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으로 종말을 고했다. 총력전과 심리전의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독일의 군사사상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일찍이 에서 이야기했듯이 전쟁에서는 사기와 정신력이 중요했다. 대의명분은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해 전투에 참가하는 병사와 인민에게 큰 힘을 불어넣는다. 이를테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은 1만㎞나 떨어진 한국 땅에서 미군이 작전을 펼칠 수 있게 한 에너지가 되었고, 미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은 인민군이 헌신적으로 전투에 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나치와 일제가 미군에 남긴 교훈, 심리전 </font></font>한국전쟁이 터지자, 일본 도쿄사령부 정보참모부(G-2) 산하 심리전반은 바로 심리전 활동을 개시했다. 미군은 나치 군대로부터 심리전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일본군이라는 황인종과 전투하면서 정신력의 위력을 실감했다. 세계대전 때 미군이 가지고 있던 심리전 부대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곧바로 재건돼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태평양전쟁 때 활약했던 일본인 미군(니세이)이 한국전쟁에 다시 투입됐고, 여기에 영어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한국인이 대거 모집됐다. 북한군을 상대하는 포로 심문, 선전 내용 작성에서 한국인들의 활동은 필수였기 때문에, 도쿄의 극동사령부와 한국의 미8군은 영어를 하는 한국인 엘리트를 대거 등용했다.
극동사령부 정보부에는 오천석(미군정 때 문교부장, 후에 문교부 장관), 장이욱(서울대 총장, 후에 주미 대사), 김종협(서울대 철학과), 황진남(의과대 교수·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류의상(류영모의 아들), 김영수(방송작가), 박형규(목사), 장상문(서예가), 그리고 한국 만화계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던 김규택, 영어에 능숙했던 문익환, 정경모 등이 일했다.
이들이 소속된 부서는 조금씩 달라 누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박형규는 이 시절을 회고하면서 “자기가 맡은 분야 외에 일이건 사람이건 일절 알 수 없었다. 알려주지도 않고 만나게 해주지도 않고, 그저 각자가 하나의 기계 부품처럼 쓰일 뿐이었다”고 했다. 한국인 대부분은 정보 분야에서 일했기에 활동이 비밀에 부쳐졌다. 한국인은 영어 방송 대본을 한국어로 번역하거나, 인민군 포로 심문과 교육을 맡거나, 미군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거나 삐라 작성에 관여했다. 당시 영어를 할 수 있는 한국인은 극소수였고, 그들은 나중에 한국 사회의 지도층이 되었다.
사진❶에서 보이는 폭탄은 M105인데, 폭탄 안에 삐라 2만2500장을 꽉 차게 넣을 수 있었다. 사진❷와 같이, 폭탄은 몇 칸으로 나뉘었는데 모든 칸에 삐라를 빼곡히 넣었다. B29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면 공중 1천 피트 상공에서 폭탄이 열려 삐라가 뿌려졌다. 사진❶에서 보이는 삐라만 따져도 20만 장이 넘는데, 이렇게 많은 양이 북한의 특정 지역에 한꺼번에 살포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한반도 너비 20배가 넘는 삐라 </font></font>‘삐라’라는 말은 영어의 ‘bill’에서 나왔는데, 미군은 ‘leaflet’(리플릿)이라고 했다. 극동사령부 보고서에 따르면, 전쟁 때 뿌린 삐라의 양은 1953년 7월까지 약 2억4천만 장이었다. 면적으로 따지면, 한반도 전부를 20번 덮고도 남고 북한 사람이 전쟁 기간 날마다 삐라 한 장을 받을 만큼의 거대한 양이었다.
사진❸은 삐라가 북한에 뿌려지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프랭크 페이스 미 국방장관이 “적을 삐라로 묻어버려라”고 할 정도로, 한국과 일본에서 삐라가 무진장 생산돼 북한 지역에 뿌려졌다. 삐라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상징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표현이자 국제적 합작품이었다. 삐라는 한국과 도쿄(요코하마)에서 한·미·일 세 나라 합작으로 발행됐고, 한국 김포와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 등에서 발진한 수송기에 실려 북한 지역에 투하됐다. 심리전은 거의 모든 군조직이 수행했다. 미 극동사령부(도쿄), 미8군(한국 주둔), 주한미군사고문단, 대한민국 육군 등이 심리전 부대를 운영하며 삐라를 만들었다.
한반도는 심리전의 전장이었다. 미군에게 한국전쟁은 심리전의 이전 방식을 복습하고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키는 실험장이었다. 삐라는 받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확히 예상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다. 미군은 전쟁이 나자마자 심리전의 하나로 일단 삐라를 만들어 뿌린 뒤 그 효과를 체크했다.
한국전쟁 때 뿌려진 삐라의 내용은 다양했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정치, 이데올로기, 군사와 군인 신상 내용이었다. 사진❹는 북한에 뿌려진 삐라인데, 북한 인민군이 소련과 중공(중국)에 떠밀려 전쟁을 하고 있다는 만화가 그려졌다. ‘냉전’이라는 안경으로 세계를 바라보았던 미국은 북한을 자율성을 가진 국가로 생각한 적이 없었고 소비에트의 지휘를 받는 위성국가라고 여겼다. 이 전단은 인민군에게 강대국의 꼭두각시가 되지 말아야 하고, 당신들(인민군)이 수행하는 전쟁에 어떤 가치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❺는 ‘생명의 길’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귀순한 인민군들이 유엔군에게 좋은 음식과 의복을 제공받으며 치료도 받고 휴양하고 있다는 것을 사진으로 보여준다. 삐라는 “후방에 있는 가족이 생각나지 않는가” “최전선에서의 생활이 힘들지 않는가” “고향 부모님이 그립지 않은가” “귀순하면 많은 혜택이 주어진다”고 선전하며 유엔군으로 귀순과 항복을 권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휴전 뒤에도 지속된 심리전 </font></font>이런 삐라 내용이 인민군의 사기를 얼마나 떨어뜨렸는지는 알 수 없다. 심리전은 서로 치열한 전투가 일어날 때는 별 효과가 없었지만, 적이 후퇴하는 상황에선 효과가 크게 나타났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데이터가 심리전의 효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적어도 전단을 통한 심리전은 유엔군 쪽이 훨씬 더 복리에 힘쓰고 안락한 생활을 보장한다는 선전에는 보탬이 되었다.
미군은 인민군과 중국군에게도 삐라를 뿌렸지만, 민간인을 대상으로도 많은 삐라를 뿌렸다. 총력전이 전 국민을 동원하는 전쟁이라면, 심리전은 전쟁 동원뿐만 아니라 세계관과 가치관을 바꿈으로써 전후 세계의 재편까지 확장된다. 삐라를 통한 심리전의 문제는 단지 휴전으로 끝나지 않았다. 삐라 살포는 선전 활동을 중지하기로 한 남북한 합의로 2004년 6월 중단됐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십 년간 뿌려졌고, 삐라 발견과 수거는 국민의 의무였다.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대한민국 국민은 삐라를 발견 즉시 신고함으로써 사상의 결백을 증명했다.
이제 삐라는 보기 힘들어져 박물관에 전시될 만한 역사의 유물로 남았다. 하지만 인민군과 중공군에게 널리 선전했던 심리전 내용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반공교육으로 전환돼 수십 년간 가르쳤다. 심리전은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작전 방식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를 바꾸는 도구였기에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영향을 미쳤다(, 이임하, 철수와영희 펴냄, 2012). 삐라는 정신에 충격을 가한 ‘종이 폭탄’이었다.
한국전쟁은 자본주의-공산주의 간에 벌어진 이념 전쟁이라고 흔히 말한다. 전면 전쟁이던 한국전쟁은 냉전이 시작된 뒤 일어난 최초의 체제 전쟁이었는데, 38선이 휴전선으로 마무리되자 승자도 패자도 없게 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이념에서의 승리가 중요했다. 국제법에 규정된 포로 일괄 송환을 무시하고, 반공 포로를 석방한 것도 이념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알리려는 노력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내 머릿속에 남은 삐라</font></font>이념 전쟁은 저절로 벌어지지 않았다. 이념 전쟁은 심리전을 통해 하나둘 만들어졌다. 남북한 모두 동일하게 심리전을 전개해 자신의 정치적, 도덕적 우월성을 입증하려 했다. 남북한에 상대방은 없어져야 할 존재고, 우리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였다. 심리전의 결과는 남북한은 물론이거니와 미국 군부와 사회과학계에도 되먹임됐다. 군부는 북한을 소비에트의 위성국가로 간주하는 경향을 더욱 고착화했고, 북한을 주체성 없는 국가로 간주해 소련의 하위 범주에 두었다. 냉전 지정학의 완성이었다. 사회과학계는 심리전 경험을 통해, 적의 이념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개인의 상황을 적절히 통제하고 강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행동심리학’을 강조했다. 심리전은 냉전 시대의 특정 이미지로 적을 고정화해 반복해서 전달했다. 한반도를 심리전 전장으로 만들었던 삐라는 사라졌지만, 그 내용은 머릿속에 남아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지. 전쟁의 흔적은 오래 지속된다.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font size="2"><font color="#00847C">20세기 들어 한반도는 여러 번의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사진 속 역사, 역사 속 사진’ 연재로 크고 작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간 무명의 삶들을 다루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되새기며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제 연재는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마련해주신 류이근 편집장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더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font>*김득중 연구관의 연재 참여를 마칩니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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