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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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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주검으로 쌓은 ‘영웅신화’

주한미군 사령관이 취임하면 찾는다는 백선엽 두 번째 이야기
등록 2019-08-09 10:59 수정 2020-05-03 04:29
1950년 8월16일 실시된 왜관 지역의 B29기 대량 폭격 현장. 강성현 제공

1950년 8월16일 실시된 왜관 지역의 B29기 대량 폭격 현장. 강성현 제공

“의문의 여지 없이 그는 한국군 최고의 작전사령관이었다.” 백선엽, “그는 작전교리, 애국심, 개인 명예, 도덕적 용기, 부하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견지했다.” 한국전쟁 때 유엔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장군과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영문판 백선엽 회고록 서문에서 쓴 평가다. ‘주례사 서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군에게 이만큼 찬사를 받은 한국군 인사가 있을까? 백선엽은 미군에게도 신화화한 영웅이고, 그의 회고록은 미 육군 교재로 쓰인다. 지금까지도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국에 취임하면 백선엽을 찾아가 ‘전입신고’를 하는 게 관례라고 할 정도로 그는 한-미 군사동맹의 상징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백선엽 영웅 서사의 시작 ‘다부동전투’

백선엽 스스로 자신의 “군생활 전 기간을 통해 뗄 수 없는 부분이 미군”(백선엽, , 329쪽, 1989)이라고 회고할 정도로 모든 미군에 우호적이고 긍정적 견해를 가졌다. 일각에선 그가 미군에 고분고분한 태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고 미 고문관들을 잘 모시고 다녔다는 비판이 제기되지만, 또 다른 쪽에선 미군에 겸손하고 항상 배우는 자세(백선엽은 스스로 ‘지도 구걸’이라고 표현했다)로 일관한 것이 뭐가 문제냐고 반문한다. 분명 백선엽은 한국전쟁 때 한-미 ‘연합작전’에서 신뢰를 쌓았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했으며 성공적 결과를 냈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하나같이 낙동강 방어작전 때 다부동전투 이야기에서 백선엽의 영웅적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반인은 낙동강 방어선은 알아도 다부동전투는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한국군 공식 전사는 실패의 연속이던 한국전쟁 초기 국면에서 성공한 낙동강 방어전 사례로 다부동전투를 내세운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81년에 별도로 다부동전투를 공간사로 발간했을 정도다. 다부동전투는 한-미 연합작전의 효시로 평가된다. 이 전투 기간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폭격작전인 ‘왜관 융단폭격’이 있었고, 다부동계곡(천평동)에서 ‘6·25전쟁’의 첫 ‘전차전’이 전개됐다. ‘최초’ ‘최대’ 수식어가 화려하게 따라붙는 전투였다.

이 시기 중동부 지역과 동부 지역을 방어한 한국군 부대와 지휘관들의 작전 성공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중서부 지역 제1사단 백선엽의 역할과 다부동전투의 성공이 주로 조명되고 높이 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 적 3개 주력 사단과 맞붙어 싸운 3 대 1의 신화. 그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3 대 1 신화가 지운 희생들

다부동은 대구에서 20㎞ 정도 북쪽에 있다. 바로 위로는 수암산과 유학산, 가산으로 이어지는 천혜의 방어선이 형성돼 있다. 백선엽은 이 저지선이 뚫린다면 부산을 내주고 바다로 내몰리면서 조국의 운명이 여기에 걸렸다고 인식했다.( 60~61쪽) 그러나 다부동만 절대 중요했겠는가? 낙동강 방어선은 왜관을 축으로 동서 95㎞, 남북 140㎞에 이르는 ‘얇은 방어선’이었고, 뚫리면 바로 부산이 위태로워지는 요충지가 대구 말고도 여럿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겠다. 북한군은 이 지점들을 한 달 반 가까이 줄기차게 두들겼고, 한국군과 미군은 “지키지 못하면 죽음뿐(Stand or Die)”이라는 워커 장군의 명령대로 방어선을 끝까지 지켜냈다.

8월13일부터 8월 말까지 제1사단 13연대(이후 15연대로 개칭)가 치른 수암산과 왜관 사이 328고지 전투, 12연대가 반격전 양상으로 방어에 나선 유학산과 수암산 전투는 주검이 쌓여 산이 되고 피가 흘러 하천이 되는 혈전진퇴의 연속이었다. 11연대가 맡은 다부동 전면 계곡의 직선로는 적 전차의 공격에 아주 취약했다. 이 방어선은 존 마이켈리스 대령이 지휘하는 미 제25사단 27연대의 지원을 받았다. 그 뒤를 미 제2사단 23연대가 받쳤다. 미 27연대는 적의 전차연대와 보병사단을 상대할 수 있는 전차중대와 중포병 전력을 갖춘 최정예 부대였다.

8월21일까지 숨가쁜 일진일퇴 공방이 계속됐고, 양쪽 병력은 말 그대로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21일 마지막 위기를 언급하면서 전쟁영화의 한 장면 같은 에피소드를 상세히 들려준다. 마이켈리스의 27연대 왼쪽을 엄호하던 한국군 11연대 1대대가 후퇴하면서 미군 퇴로 차단 가능성이 높아졌고, 이에 미군의 힐책을 받고 미 27연대 후퇴를 통보받은 백선엽이 전방으로 나가 권총을 들고 후퇴하는 한국군 11연대 병사들을 설득해 돌격, 고지를 재탈환했다는 이야기다. 백선엽은 마이켈리스 대령이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사단장이 직접 돌격에 나서는 걸 보니 한국군은 신병(神兵)”이라고 감탄했다는 말을 강조한다.( 70쪽)

미 27연대가 백선엽의 1사단에 배속되거나 작전통제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최초로 미군이 한국군 방어 지역에서 연합작전으로 이룬 것이기에(군사편찬연구소, , 166쪽, 2008), 무엇보다 방어에 성공했고 미군의 신뢰도 얻었기에 백선엽의 자부심은 컸을 것이다. 위기 때 사단장이 솔선수범한 권총 돌격은 작전 측면에선 무모하지만, 미군이 참 좋아할 만한 영웅 이야기 소재다. 그래서 백선엽 자신도, 군사가(軍史家)들도 이 에피소드를 유독 ‘만능양념장’처럼 활용한다.

한-미 양군의 다부동전투 관련 공식 전사, 한-미 지휘관급 회고록과 노병들의 증언 조각들을 들여다보고, 시기별 여러 작전 상황도를 보면서 다부동‘전투들’을 그려나가면 마치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전투 중심 장면들 사이사이에 ‘사각’(blind side)으로 처리된 장면의 조각보들도 흐릿하지만 눈에 들어온다. 백선엽과 공간사의 시선에서 외면됐지만, 내가 응시한 것은 8월16일 다부동 방어의 하나로 이루어진 ‘성공적 왜관 폭격’의 이면과 전투에 동원된 노무자와 인근 마을 주민, 피란민, 즉 민간인 ‘희생’의 이면이다.

‘융단폭격’ 당한 흰옷 입은 피란민들

사진(맨 위)은 8월16일 B29 98대가 26분간 960t 폭탄을 쏟아부은 모습을 찍은 것이다. “8·15 부산 해방” 대신 대구 점령이라는 김일성의 독전으로 북한군은 15일 전후로 총공세를 펼쳤다. 그전부터 미8군은 왜관 부근에 적의 증강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관련 보고를 받은 맥아더 장군은 ‘융단폭격’을 지시했다. 전황이 급박하더라도 지상군 근접지원작전으로 B29 중폭격기들을 동원해서 얻는 효과에 미 공군 수뇌부는 다소 회의적이었지만, 가로 5.6㎞·세로 12㎞ 직사각형 구역에 3084발을 쏟아내는 고공 ‘맹목 폭격’이 강행됐다. 백선엽의 표현을 빌리면 “그 지역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됐다. 미군 폭격 뒤 10년 동안 풀이 제대로 자라지 않”을 정도였다.(백선엽, , 257쪽, 2010)

그런데 폭격이 이루어진 장소는 시무실과 사창마을(현 경북 구미 형곡동)로 각각 70가구, 60가구로 구성된 촌락이었다. 인근에 피란민도 많았다. 마을 주민 131명과 그 이상의 피란민들이 불바다에 휩싸인 채 사라졌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8권, 178쪽) 이게 도시와 농촌, 주요 역과 조차장, 작전지역에 대한 융단폭격 신화의 실체다. 꼭 융단폭격이 아니더라도 미 공군의 근접지원작전에는 오폭 사례가 매우 많았다. 오폭은 “흰옷을 입은” 수많은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해 쓰러뜨렸으며, 심지어 아군도 비켜가지 않았다.

문제는 이 피해와 ‘희생’이 우연하거나 예외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미군은 계속된 연전연패의 원인으로 흰옷을 입고 변장한 적(게릴라)을 들었고, 이들이 피란민 무리에 숨었다고 확신했다. 7월25일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어떤 피란민도 전선을 통과시키지 말라”고 지시했고, 이 지시는 전선 지휘관들에게 확대해석돼 피란민에게 ‘치명적 무력’으로 사용됐다. 이것이 미 제1기병사단 7기병연대가 저지른 ‘노근리 사건’의 배경이며, 낙동강 방어작전 때 미 지상군이 전선 인근 마을 주민과 피란민들에게 저지른 초토화작전과 학살의 배경이다.

‘노근리 사건’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은 기자들은 “미군이 지나간 곳은 민간인들의 주검과 초토화된 마을만 남아 있었다. 미군 폭격기들의 로켓과 네이팜탄으로 수많은 마을이 불탔다”는 사실을 미군의 공식 기록들을 발굴해 입증했다.(최상훈 외, , 204쪽, 2003) 노무현 정부 때 특별법에 근거해 조사를 진행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보고서들도 이와 관련한 사례들의 진실을 규명했다.

다부동에서 팔공산 지역으로 이동해 미 제1군단의 지휘를 받아 반격작전을 준비 중인 백선엽 준장. 1950년 9월18일. 강성현 제공

다부동에서 팔공산 지역으로 이동해 미 제1군단의 지휘를 받아 반격작전을 준비 중인 백선엽 준장. 1950년 9월18일. 강성현 제공


애국·용사·영웅으로만 기억하는 역사

그럼에도 1989년 백선엽 회고는 물론 2010년 회고에도, 2013년 공적으로 간행된 에도 이런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진화위 조사팀장을 지낸 한성훈의 논의에 따르면, 국방부와 군은 이런 내용을 부정하거나 수정하는 지침을 세워 적극 대응했다. “전시 긴박한 군사작전 과정의 불가피한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대응하도록 세부 실무 지침을 세웠다. 국방부와 군은 진화위 보고서들에 대해서도 “현재에도 남과 북이 대치 중인 상태에서 친북 적대세력의 선동에 부합할 수 있는 편향된 보고서”이고 “오도된 시각을 갖게 해줄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안 그래도 전쟁사나 회고는 일반적으로 군 전투사 중심 ‘외눈박이’ 기록과 서술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 한국에서는 ‘과거사 정리’에 대해 국방부와 군의 역사수정주의적 반동이 시도됐다.
마지막으로 다부동전투에 동원된 노무자들의 ‘희생’ 기록을 보자. 1989년 백선엽 회고록에는 “인근 주민들은 지게를 메고 나와 전방고지의 포화를 무릅쓰고 탄약, 식량, 물과 보급품을 져 올렸다”는 한 문장이 할애됐다. 2010년 회고록에서 이 서술은 짧은 한 단락으로 늘어났다. “조국과 민족, 가족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쟁의 또 다른 주역”이고 “희생 또한 아주 컸다”고 했지만 노무 동원 과정의 불법성이나 강압성, 노무자와 그 가족이 겪은 고통이나 피해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당시 다부동 지역을 가득 메웠던 시산혈해는 한국군과 북한군의 병사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노무자도 날마다 50~60명씩 죽어나갔다 한다. 그런데도 국가와 군은 전선에서 죽음으로 동원된 노무자들을 조국과 민족, 가족을 위해 희생한 애국적 무명용사로 소환하고 기억할 뿐, 그 밑에 가려진 진실을 대면하려는 노력은 방기하고 있다.
백선엽이라는 영웅 신화는 전사한 병사들과 군적 없이 죽음으로 동원된 학도병뿐 아니라 죄 없는 주민과 피란민, 그리고 보급품과 부상병을 지게로 날라야 했던 노무자들의 주검으로 쌓인 것이다. 애국 명명 뒤에 가려진, 산더미를 이룬 주검들의 사연과 진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적지만, 한국전쟁 영웅이 필요한 사람은 많다. 여전히 우리는 전쟁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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