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제1260호 ‘빨갱이 공포는 어떻게 시작됐나’)에서는 1951년 ‘1·4 후퇴’ 직전 서울을 방문한 미국 석학들이 어떤 목적으로 심리전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그 결과로 나온 란 소책자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했다. 서울 ‘잔류파’ 각계각층 엘리트의 입을 통해 자기 고백과 증명의 형식으로 터져나왔던 “빨갱이가 판치는 세상”에 대한 체험과 공포가 이승만 정부에 의한 빨갱이 ‘부역자’ 낙인과 ‘처리’(처형)에 대한 공포와도 뒤범벅됐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그럼에도 ‘관제 빨갱이’ 낙인 공포는 사회과학 외양의 냉전적 지식 커튼 뒤로 가려진 채 ‘진짜 빨갱이’의 악행·만행 공포만 부각돼 전쟁터인 한국에서 ‘자유세계’로 확산됐다는 것도 확인했다.
이번 연재에서는 전 지구적으로 수출된 이 이야기가 만화라는 대중매체 형식으로 냉전 아시아, 종국에는 한국으로 ‘귀환’해서 ‘빨갱이 적’에 대한 공포의 원체험에 또 어떻게 작용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라는 단편 만화책이 있다. 2016년 4월19일 냉전 아시아의 사상심리전을 나와 함께 연구했던 옥창준·김민환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The Reds takes a City’로 검색된 자료를 확인하다가 이 만화책을 우연하게,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적으로 마주쳤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한국어 반공 이야기→영어→한국어 만화로</font></font>
만화책 앞표지를 보고 참 낯설었다. 컬러풀한 표지에 ‘동순이와 순최’라는 빨간색 글씨가 도드라져 보여 ‘이게 뭐지’ 싶었다. 설마 사람 이름? 주인공 이름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근데 뒤표지를 보니 영문 제목이 ‘The Reds takes a City’ 아닌가. 만화를 보니 실제 주인공은 한강교 폭파로 피란 가지 못한 기자 ‘김융상’이다.
윌버 슈람·존 라일리 교수가 쓴 에 ‘신문기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나’(What happened to a Newspaperman)란 글이 실려 있다. 이것은 1950년 12월1일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한 중 ‘김영상’이 쓴 ‘사선 200미터’를 각색한 글이다. 흥미로운 건 가 이 ‘신문기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나’를 만화로 재각색했다는 거다. 그러니까 한국어로 서울에서 출판한 ‘적화삼삭’(공산 치하 3개월)의 신문기자 버전 이야기가 영어로 번역돼 전세계에 확산됐고, 이것이 다시 한국어 만화로 ‘문화번역’돼 한국에 돌아왔다는 말이다.
뒤표지를 보면, 1953년 7월27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5만150부가 제작됐고, 그중 5만 부가 주한미공보원 부산지부로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한국전쟁 휴전협정 체결일이다. 만화작가는 미상이다. 옥창준·김민환은 “만화가의 작화 방식이나 만화에 기록되어 있는 작가 서명 등을 고려할 때 마닐라 소재 극동지역제작센터(마닐라센터)에서 근무하는 미국인이나 필리핀인으로 추정”한다.(백원담·강성현 편, , 153~154쪽, 2017년, 이하 쪽수만 표기) 마닐라센터는 미 공보원 상하이지부가 1949년 ‘중국 공산화’ 이후 홍콩을 거쳐 마닐라로 옮겨온 것이다. 주로 필리핀과 홍콩, 대만을 중심으로 동남아 지역인 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인도차이나·타이·버마 등의 화교를 대상으로 제작했는데, 그런 곳에서 한국전쟁기 ‘적화삼삭’이 배경인 한국어 만화가 만들어진 것은 참 흥미롭다. 연구가 밝힌 바에 따르면, 영어로 작성된 (만화) 텍스트 초본이 여러 국가의 미 공보원 지부에 배분되면, 각 지부에서는 해당 지역 언어로 그 초본을 번역한 것을 덧붙여 오프셋(평판인쇄) 틀을 마닐라센터로 보내고, 센터는 이를 통해 대량 인쇄해 다시 각국의 미 공보원 지부로 발송했다는 거다.(158쪽)
<font size="4"><font color="#008ABD">‘가족 위협’ 빨갱이 서사, 만화로 ‘실감 나게’</font></font>
만화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기자로 피란을 가지 못해 숨어 지내던 융상을 대신해 그의 딸 순최는 먹을 것을 사러 시장에 갔다 오는 길에 인민군에게 붙들려 성희롱을 당한 뒤 도망치다가 약혼자 동순이를 만나 안전하게 귀가한다. 그 뒤 동순이는 서울을 탈출하다가 붙들려 의용군에 끌려가고, 민청원(빨갱이) 근호는 순최에게 구애하며 접근한다. 순최는 약혼자 동순이의 존재를 언급하며 거절하지만,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근호는 순최의 아버지 융상을 ‘반동’으로 끌고 간다. 폭력적인 취조 끝에 융상은 기회를 잡기 위해 거짓 협력하기로 서약하지만, 구금됐다가 평양으로 끌려간다. 그 길에 남한 유격대에 구출되는데, 유격대에는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동순이 있었고, 융상과 동순은 유엔군의 서울 ‘수복’ 작전이 전개되는 즈음 집으로 ‘귀환’해, 순최가 근호에게 몹쓸 짓을 당하려는 순간 근호를 사살하고 순최를 구해낸다는 이야기다.
이런 서사는 한국뿐 아니라 냉전 시기 동아시아에서 제작된 반공만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공산당이 혁명적 가치를 앞세워 가족을 해체한다는 것은 냉전의 초창기부터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단골 소재”였고, 만화가 이를 실제 이야기처럼 각색하면서 현실성이 더해졌다는 거다. 이 만화에서도 아버지(융상)와 딸(순최)의 관계로 표상되는 가족을 위협하는 존재가 빨갱이 근호다. 마지막에 근호를 죽이고 가족의 위기를 해결해주는 자식 세대의 남성도 반공주의자인 약혼자(예비 가부장) 동순이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 서사의 ‘토착성’을 두고 옥창준·김민환은 동아시아의 토착적 맥락에서 나온 거라고 논의한다. 마닐라센터가 반공 심리전에 활용했던 중국 공산화 이후 중국인 가족이 겪는 참상 이야기도 그랬다는 거다.(159쪽)
그렇더라도 이 만화가 한국적 맥락을 강하게 투영하는 건 부동의 사실 아닐까. 융상의 말만 봐도 그렇다. “내 자신이 목도한 바에 의하면 서울시에 ‘살도’(쇄도의 오기)해온 것은 북조선 인민군이었소!”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굶어 죽으면 죽었지 이북 공산주의자들을 위하여 일하면 안 된다.” 전쟁의 기원으로서 북한 공산주의의 ‘남침’ 야욕과 만행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강교 폭파로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남게 돼 숨어 살았고, 공산주의자 ‘역도’에게 협력하면 절대 안 되지만, 기회를 엿보기 위해 거짓 협력하고 유엔군의 서울 ‘수복’을 열렬히 환영하고 이에 기여했다는, “부역자 색출” 광풍에서 살아남으려는 필사적인 자기 증명의 서사가 반영돼 있다. 빨갱이 ‘부역자’ 낙인에 대한 공포 서사만큼은 ‘자유세계’를 돌고 돌아도 변형되지 않은 채 한국에 도착했다.
란 만화도 미 공보원이 14쪽짜리 소책자로 만들었다. 가 1953년 7월27일 ‘휴전일’에 제작됐다면, 이 만화는 한국전쟁 개전 1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만평’(한 칸 만화) 형식으로 각 만화에 설명글이 달렸다. 소련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 정권의 ‘남침’을 분명히 고발하고 그로 인한 학살과 파괴, 약탈, 강제 동원 등 공산주의 만행을 밝힌다. 대조적으로 유엔군의 세계 평화를 위한 성전과 영웅적 면모, 압도적 군사력을 부각한다. 해골이 된 ‘북한 괴뢰정권과 군’의 모습과 스탈린이 마오의 ‘중공의용군’을 해골로 가득한 전쟁터로 몰아넣는 모습, 그리고 무기체계의 우수함과는 거리가 먼 ‘인해전술’ 재현 방식이 흥미롭다. 이 만화를 출판한 때는 유엔군이 중국의 춘계 공세를 거듭 막아내면서 전선이 교착된 시기다. 그래서 분명한 결과를 보여주지 않지만, 유엔군이 적을 단지 막아낸 것이 아니라 “섬멸”시켰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의 사기를 고양하기 위한 대내 심리전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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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는 부산 삼미당에서 오프셋 방식으로 인쇄됐는데 몇 부가 제작됐는지 알 수 없다. 만화작가도, 설명글을 쓴 사람도 미상이다. 다만 백정숙 연구(‘전쟁 속의 만화, 만화 속의 냉전: 한국전쟁기 만화와 심리전’)에 따르면, 박광현이 부산 피란 시절 미 공보원 홍보요원으로 만화를 그렸다고 한다.(174쪽)
당시 부산에는 이름깨나 날린 만화가들이 피란해 있었다. 중앙동에 있던 다방 밀다원(소설가 김동리의 가 유명하다)은 문인뿐 아니라 만화가 등 많은 문화인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코주부’ 김용환, 웅초 김규택 등도 그랬다. 이들은 해방 후부터 탁월한 만화 그림과 제작으로 명성이 높았다. 다만 그 재능과 능력, 명성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삶을 겪어야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만화가들, 부역·반공 ‘반전의 반전’ 활동</font></font>
이들은 전쟁 전에는 국민보도연맹원으로 반공만화를 그렸다. 전쟁 직후에는 피란의 때를 놓쳐 북한군에 붙들렸고, 보도연맹원이기에 ‘반동’으로 몰릴 수도 있었지만, 가진 재능 덕분에 북한 선전물 화보와 포스터를 만드는 데 동원됐다. 이 때문에 서울 ‘수복’ 후에는 부역자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혔고, 또 ‘골’로 갈 수도 있었지만 살아남았고, 또 가진 재능 덕분에 유엔군과 국군의 심리전 문관으로 선발됐다.
김용환은 “보도연맹 때의 안면으로” 중앙동 합동수사본부의 오제도 검사에게 인사하러 갔다가 육군본부 작전국 심리전과 이기건 대령에게 ‘픽업’됐고, 김규택도 일본 도쿄 연합군최고사령부 심리전과의 요청으로 부산에 와서 만화가를 구하던 김을한 특파원을 만나 발탁됐다. 김규택은 1959년까지 잡지 만화작가로 일했는데, 그 후임 작가로 김용환이 가게 되었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 그들의 삶을 보면, 자연스레 ‘인간사 새옹지마’란 말이 떠오른다.
김용환은 특무대 수사실에서 취조받으며 경찰서 유치장과 형무소에서 미결 상태로 구금됐고, 문화인 동료들의 죽음까지 목도한다. 특히 유명 만화가인 임동은의 죽음은 김용환에게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 대목을 회고하고 김규택 등의 예도 들어가며 공산 치하에서 역도에게 자발적으로 협력한 ‘부역자’(附逆者)와 공산당이 강제노역에 동원해 마지못해 협력한 ‘부역자’(賦役者)를 구분해야 한다고 구구절절 설명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만화, ‘자유세계 반공시민’ 상상 공동체 일조</font></font>
김용환 등 만화가들은 한국의 사상심리전 전장에서, 미군이 아시아·태평양을 무대로 하는 심리전의 전장에서, 미 공보원이 자유·공산 세계를 무대로 하는 글로벌 심리전의 전장에서 만화 활동을 했다. 만화는 의미뿐 아니라 감정의 전달이 탁월한 커뮤니케이션 도구였고, 삐라(전단) 제작에도 적합해서 반공 사상심리전 활동에 유용한 미디어였다. 이들이 그려내는 빨갱이 적의 이미지화와 공포의 재현은 공산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자유시민’에게 마치 체험한 것처럼 생각과 감정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자유세계의 반공시민이라는 상상공동체 형성에 일조했다.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font color="#008ABD">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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