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사법’이란 말이 있다. 형사사법 전반에서 검찰이 가진 막강한 권한과 주도적 영향력을 표현한 것이다. 즉, 수사·기소·공판·행형이라는 형사사법의 입구부터 출구까지 주도적인 검찰권 행사를 의미한다. 여기에 법무행정 전반에 검찰이 행사하는 권한과 영향력까지 생각하면 검찰권력은 무소불위, 막강함 그 자체다.
‘검새’ 같은 짓이 가능한 이유한국에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칼끝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전쟁과 독재정권 시절에는 군, 경찰, 정보기관(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등) 등 물리적 폭력에서 권력이 창출되고 유지됐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형사사법 전반에 개입하는 ‘검사’의 칼끝에서 나온다는 거다.(최강욱, , 37~38쪽)
검찰은 정권 초기에 전 정권을 대상으로 칼을 휘두르면서 현 정권에 검찰의 쓸모를 유혹한다. 그렇게 검찰은 ‘권력의 시녀’로서 정권에 충실하고 보위하다 집권 중·후반에 여론을 봐가며 집권세력의 일부 부정부패에 칼을 휘두르고 그다음 정권으로 가서 전 정권을 칼끝에 올리는 행태를 반복해왔다.
‘검찰개혁’이란 말도 오랫동안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다. 검찰 수사(지휘)권을 경찰과 나누는 방식으로 조정하는 시도가 있어왔고, 검찰의 기소 독점과 기소/불기소 재량을 견제하려는 흐름이 있었다. 그때마다 검찰은 저항했다. 저항은 다양한 방법의 ‘검란’으로 나타났다. 때때로 검찰 조직은 검찰총장 사직을 희생양으로 삼으면서까지 외부 검찰개혁 시도에 맞섰다. ‘총장’에게 상명하복하는 규정과 문화가 강력한 검찰에서 사람보다 조직이 우선함을 잘 보여준다. 법무행정에서 검찰의 지휘 감독자인 법무부 장관은 검찰의 그런 저항에 속수무책일 때도 있었다. 심지어 검찰의 정치적 독립성과 검사의 직무적 독립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검찰개혁을 추진했던 대통령에 대해서도 검찰은 ‘검새’(오만한 검찰 조직을 비난하는 말)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한 ‘검사와의 대화’는 이를 전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검찰사법의 핵심 기반인 공안의 인적·제도적·조직적 개혁을 꾀했지만, 용두사미로 끝났다.
어떻게 이런 막강한 권한이 검찰권에 용해돼 들어갔을까.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면, 역사적으로 그렇게 형성된 상황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 검찰사법의 역사적 형성 과정이 있을 것이다.
요즘 부쩍 “무소불위 한국 검찰의 탄생기”에 관심이 많아졌다. 특히 ‘조국 사태’를 계기로 국내 언론은 물론 국외 유수 언론(프랑스 , 일본 등)에서도 학술논문 쓰듯 일제와 식민지 검찰사법 계보를 탐사하는 기획기사를 내고 있다. 형사소송법(이하 형소법)에 한정해 말한다면, 식민지 조선형사령은 물론 동시대 일본 다이쇼 형소법과 여타 식민지(대만, 부분적으로 만주국까지) 형사사법제도가 어떻게 착종돼 그물망을 이루었고, 이후 대한민국 검찰사법을 구성하게 되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반쪽짜리 설명이다.
수사권을 경찰에 돌려준 미군정일제 패망, 조선 해방, 미군 점령이라는 조건에서 “과거의 것이 새로운 것의 외피 아래 강고하게 유지되었다”고 말하려면 단절 속 연속의 과정 자체로 설명해야 한다. 미군정기에 검찰이 미군정 당국, (군정)경찰, 법원과 경합하는 과정에서 식민지 검찰사법의 옛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어떻게 ‘사상검찰’(공안)을 부활시켰고 검찰청법을 제정했는지, 정부 수립과 국가보안법 성립 뒤에는 어떻게 사상검찰 재조직화가 성공했고, 경쟁적 위치에 있던 경찰, 헌병대, 육군 방첩대(군사안보지원사령부)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사상검찰이 어떻게 상대적 우위를 확보했는지, 그 과정에서 오제도 검사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규명해야 한국 검찰사법 탄생기가 완전하게 된다.
미군정이 해방 뒤 붕괴된 식민지 사법제도와 기구를 재건했지만, 검찰과 법원의 위상은 초라했다. 점령과 군정 통치 상황이라 한국인 검찰과 법원의 관할권은 미군점령재판소에 넘겨지지 않은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했다. 점령 상태가 준전시였기에 한국 민간인이 군법으로 군재판을 받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29일 검사 직무를 조정하면서 검찰권을 기소 기능에 한정했다(검사에 대한 훈령 제3호 ‘검사의 선결 직무’). 이것을 검찰은 “대륙법에 입각한 형사수속 실무에 무지한 미군 장교들이 단순하게 영미법적 시각에서 검찰권을 제약”한다고 인식했다. “조선의 형사제도에서 검찰이 모든 범죄 수사와 치안 확보의 중추기관이며, 검사는 수사의 주재자이고 사법경찰관은 보조자”라는 의견을 이인 검사총장이 미군정 수뇌부에 전달한 건 그런 인식에서였다.(대검찰청, ‘검찰제요’, 1948)
미군정 조처의 의도가 무엇인지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영미법적 시각에서 식민지 ‘검찰 파쇼’를 해체하고 수사권을 경찰에 돌려줘서 검찰과 경찰의 관계를 상명하복이 아닌 상호협력으로 만들려는 조처라는 해석이 있다. 또한 미군정이 점령 통치와 치안 질서 유지에 방해되는 세력(대개 좌익, 통제 안 되는 우익도 포함)을 진압하는 데 강한 물리력이 필요했고, 따라서 검찰보다 경찰에 힘을 실어준 조처라는 해석도 있다.
검찰은 검찰사법의 옛 영화를 되찾으려면 미군정 수뇌부와 경찰(경무부) 사이를 파고들어야 했다. 사상 문제와 좌익 사건에서 검찰 주도의 수사 일원화가 어떤 강점이 있는지 보여줘야 했다. 사상검찰 부활이 검찰 조직의 사활적 과제가 된 것이다.
1946년 5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한 계기가 되었다. 사건 진위를 떠나 “좌익 사냥의 ‘전범’이 만들어진 사건”이었다.(김두식, , 301쪽, 2018) 그해 5월23일부터 조재천, 김홍섭 검사가 경찰 수사를 지휘했다. 7월9일 이 사건은 검찰로 송치됐고, 7월19일 박낙종·송언필·김창선 등 13명을, 8월22일 이관술을 통화 위조와 동 행사죄로 구속 기소했다. 7월29일 1차 공판을 시작으로 약 4개월간 30차례 공판이 열렸다. 이관술·박낙종·송언필·김창선은 무기징역, 나머지는 징역 15년, 3년이 선고됐다.(오제도, , 29~31쪽, 1969) 재판 입회 검사였던 선우종원에게 이 사건은 사상범죄 처리에 동기부여와 실습의 장이 되었다. 그는 “공산당과 나의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표현했다.(선우종원, , 94쪽, 1992)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을 거치면서 좌익 탄압이 더 본격화됐다. 미군정 수뇌부는 경찰 물리력에 더 의존해갔지만, 그럴수록 사태 진정이 아니라 악화라는 걸 알고 있었다. ‘덮어놓고 경찰’이라는 비난 여론을 불식하고, 경찰이 아닌 사상 문제와 좌익 사건에 효과적으로 강력히 대응하는 새로운 기관이 요청됐다. 검찰이 그 역할을 자임하면서 사상검찰 조직이 본격 부활됐다. 검찰은 1947년부터 조재천 정보부장이 지휘하는 서울지검 정보부를 신설해 좌익 관계 소요, 파업, 테러 사건 등의 수사(지휘)와 기소를 전담시키려 했다. 그러나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1947년 8·15 폭동 음모 사건을 비롯해 굵직한 좌익 사건에서 정보부 역할은 기소에 국한됐다. 정보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자체 정보 수집 능력이 빈약해 경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법원의 소장 판사들을 중심으로 영미사법제도를 모델로 한 민주적 사법개혁과 검찰개혁 논의도 영향을 줬다. 판사들은 영장주의, 사인소추주의, 배심재판 등 미국식 제도 도입에 대해 토론했다. 1946년 11월9일 한미법률교류협회가 설립된 이래 미군정기 말까지 한국과 미국의 법률가들이 사법제도 개혁 등 포럼을 매달 조직하고 논의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검찰은 영미 사법제도의 “섣부른 선택”이나 “법원 판사의 위상 강화를 의미하는 개혁안”을 강하게 비판하되, 독자적 개혁안을 제시했다. 검찰은 경찰 수사권에 대해서도 경찰의 검거와 취조 과정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에 반감이 있는 여론을 자극하면서 검찰 수사 지휘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검찰권 강화라는 본의는 숨기고 억압적인 경찰권에 대한 견제와 수사 민주화라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꽤 효과적이었다. 동시에 이건 검찰에 양날의 칼이었다. 당시 형사사법 제도의 개혁 논의는 검찰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판사와 변호사 일부가 식민지 검찰사법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제기하면서 검찰의 기소독점권과 불기소처분권, 기소유예 남용에 제동을 걸었다.
검찰 숙원을 한번에 처리검찰은 경찰과 법원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상황이었다. 경찰은 미군정 수뇌부를 업고 파워게임을 벌였고, 개혁적 판사와 변호사들은 법조계와 일반 여론의 지지를 받아 명분게임을 벌였다. 수사·공판 절차뿐 아니라 기소 절차에서 검찰권 약화를 시도했던 이 논의에 검찰이 강력히 반발한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온 게 정부 수립 직전 1948년 8월2일 조용하게 제정된 검찰청법(군정법령 제213호)이다.
이 법령 제2조는 법원과 검찰청의 분리를 전제로 검찰청의 종류를 규정해서 검찰의 오랜 숙원을 반영하고 있다. 법원에서 검찰의 완전 분리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제6조는 검찰관(검사)의 직무와 권한으로 공소 제기와 그 유지는 물론 수사(지휘)권도 규정하고 있다. 제12조는 검사동일체 원칙을 규정하는데, 이를 상명하복과 일사불란한 행동 통일 원칙으로 동일시한다. 제14조는 사법부장(법무부 장관)을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로 명시하고, 개별 사건에 대해서도 검찰총장을 경유해 지휘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제25조와 제26조는 검찰 직속 사법경찰기구 설치와 함께 대검에 정보과를, 지검에 수사과를 설치하는 것을 규정한다. ‘검사 직수 사건’이 아니어도 “사회의 이목을 끄는 사건, 기타 중요 사건 및 일반 경찰관이 취급함에 불편 부적당한 사안”을 수사하고, “사회 각 부분의 동향과 인심의 추세 등을 사찰 보고”할 수 있게 한 것이다.(이인 검찰총장 훈시 요지) 수사(지휘)권을 둘러싼 경찰과의 갈등에 너무 고생한 검찰이 형소법에 담아야 할 사항을 검찰청법에서 ‘스스로’ 규정해 확실히 해결하려 한 것이며, 검찰이 수사 주재자임을 재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 연재글에 이어집니다.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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