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립’(金立)이라는 이름은 좀 낯설다. 한국식 작명으로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이름이 외자인데다가, ‘설 립(立)’이라는 글자가 이름에는 좀체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행적을 추적하던 일본 고등경찰들도 종종 오류를 범했다. 일본 측 정보 문서에는 ‘삿갓 립(笠)’ 자를 써서 ‘金笠’이라고 표기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조선시대 말기 방랑 시인으로 유명한 김삿갓을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여러 가명 중 ‘김립’에 애착쉬이 예측할 수 있듯이 그 이름은 가명이었다. 비밀결사에 가담하거나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통상 그랬던 것처럼 그는 가명을 썼다. 본명은 김익용(金翼容)으로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다. 나이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략 짐작할 수 있다. 1880년에 출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①, 그보다는 몇 년 뒤에 태어났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가 어려서부터 평생 교유했던 허헌(許憲, 1885년생)이나 이종호(李鍾浩, 1885년생) 등과 나이가 같거나 비슷한 연령층에 속한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혁명운동에 참가하다보니 그에게는 가명이 많았다. 왕진덕(王鎭德), 이세민(李世民), 양춘산(楊春山) 등을 사용했다. ‘일세’(一洗)라는 아호도 갖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는 김립이라는 이름에 큰 애착을 가졌다. 그렇게 불리기를 희망했던 것 같다. 가까운 동료들은 물론이고 독립운동계의 온갖 다양한 인사가 그를 김립이라고 지칭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립이라는 이름은 혁명에 헌신을 결단하는, 마음속 깃발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청년기에 중대한 결심을 했다. 망국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원하는 데 한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동향인 맘 맞는 동료 허헌과 함께였다. 두 사람은 ‘입헌(立憲)’이라는 글자를 하나씩 나눠 갖기로 합의했다. 김익용은 ‘설 립’ 자를 취하고, 허헌은 자신의 본명에 포함된 ‘법 헌(憲)’ 자에 그 의미를 부여했다. 대한제국 시절이었다. 위기에 처한 공동체의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전제군주제를 혁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전제군주가 갖고 있는 국가주권을 국민의 품으로 옮겨오는 시민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김립의 막역한 친구 허헌은 뒷날 인권변호사가 된다. 일제시대에 3·1혁명 피고인들과 조선공산당 사건 피고인들을 변호했으며, 민족통일전선 단체 신간회의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른 이였다.
김립은 20대 초반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전제군주제에 반대하고 일본의 식민지 침략에 맞서는 혁명이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애국계몽운동이라 이르는 이 운동 속에서 김립은 두각을 나타냈다. 공개 사회단체로서 큰 영향력이 있던 서북학회의 주요 활동가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서북학회는 재야에 있는 일종의 정당 같은 존재였는데, 김립은 이갑, 안창호 등과 더불어 그 단체 내에서 “말 잘하고 지략이 종횡하는 청년 논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②.
달변에 지략 뛰어난 청년공개 단체뿐만 아니었다. 그는 비공개 비밀결사 영역에도 깊이 참여했다. 그는 전국 규모의 강력한 비밀결사 신민회의 회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회원일 뿐만 아니라 중견 간부였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그가 신민회가 지향하는 사업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신민회 간부급 구성원들이 망국 전후에 했던 전형적인 행동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국운이 거의 기울어가던 1910년 4월 그는 망명했다. 망국 4개월 전이었다. 일제 침략에 맞서 타오르던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불길이 점차 잦아들던 때였다. 신민회 간부들이 집단 망명을 단행한 시점이 바로 이때였다. 독일 조차지였던 중국 칭다오에서 전략 회의를 열었던 게 1910년 4월이었다. 이갑, 안창호 등을 비롯한 십수 명의 독립지사들이 동참했다. 김립이 이 회의에 참석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김립이 신민회 간부들의 집단 망명 대열에 일원으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최초의 잡지로 이름 높은 1910년 4월호 첫머리에 ‘나라를 떠나는 슬픔’ ‘태백의 님을 이별함’이라는 권두시가 실려 있다. 바로 신민회 간부들의 망명을 읊은 노래였다③. 김립은 바로 ‘태백의 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립이 선택한 망명지는 ‘해도’였다. 연해주와 북간도를 합쳐 일컫는 말이었다. 두만강을 경계로 조국과 잇닿아 있는 곳이자, 수십만 명의 한인 이주민 사회가 형성돼 동포들의 후원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말 널리 유행했던 에서 이르기를, 해도에서 진인이 출현하여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원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연해주와 북간도는 그 음가만으로도 국권을 상실한 민중에게 희망을 주는 곳이었다.
그는 해도를 기반으로 독립혁명의 주체 역량을 양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두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나는 수십만 한인 이주민들을 결속해 반일운동의 기지로 삼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북간도에서는 간민교육회(1910년)와 간민회(1913년)를, 연해주에서는 권업회(1911년) 결성을 이끌어냈다. 어느 것이나 다 이주민 자치단체였다. 1913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춘원 이광수는 권업회의 임원들을 관찰한 기록을 남겼다. 그중에 김립이 거론된다. 김립은 책사로서 권업회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독립혁명의 신진 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특별한 학교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그가 역점을 기울인 학교는 길동(吉東)학당과 나자구사관학교였다. 길동학당은 북간도의 가장 큰 도회지 국자가(局子街) 근교 소영자(小營子)에 설립한 중등 과정의 사범학교였다. 길동기독학당, 광성중학 등으로도 알려진 이 학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지도자 양성기관으로써 기능했다. 이 학교는 장재촌의 명동(明東)학교, 와룡동의 창동(昌東)학원과 더불어 1910년대 북간도 한인 사회의 3대 명문 교육기관 중 하나로 지목받았다.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독립혁명에 헌신하는 청년들이 줄지어 배출됐기 때문에 그러한 명성을 얻었다. 1920년 1월에 일어난 유명한 15만원 사건 주인공들도 바로 이 세 학교 졸업생들로 이뤄진 비밀결사 철혈광복단의 구성원이었다. 어느 학교나 다 교명이 ‘동’(東) 자로 끝나는 점이 눈에 띈다.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그것은 ‘해동’, 즉 한국을 가리키는 은유였다. 한국에 빛을 가져오고, 한국을 융성시키며, 한국을 이롭게 하는 것이 이 학교들의 교육 목표였다.
신·구학 겸비한 행동하는 지식인나자구사관학교도 김립과 그 동료들이 심혈을 기울여 설립한 교육기관이었다. 국자가 북쪽 150km 지점 깊은 산속에 넓은 분지가 있는데, 그곳에 자리한 이 학교는 무장부대의 지휘관을 양성하는 사관학교였다. 길동학당이 정치 간부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면, 나자구사관학교는 군사 간부를 기르는 교육기관이었다. 이 두 학교는 망명객 김립이 구상한 독립운동 전략의 중요 소산이었다. 그의 오랜 동지였던 김규면이 뒷날 남긴 수기에 따르면, 김립은 ‘광성중학과 나자구사관학교의 창립자’라고 지목받았다.
그는 지식인이었다. 일본 첩보 문서의 평가에 따르면 “반일 조선인 가운데 재주와 학식이 제일류의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한문과 법률에 능했다고 한다. 전통적인 유교 교양은 물론이고 법학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 학문의 소양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신학과 구학을 겸비한 이였다.
학식이 뛰어났다고 해서 그저 공론만 일삼는 책상물림은 아니었다. 그는 유능한 행동인이었다. 김립의 가까운 동료이자 역사가인 계봉우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정치 수완이 민활”해 “상하이 망명자 사회에서 그를 능가할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
김립은 주·객관 정세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에 입각해 독립운동의 장래를 구상했다. 강대한 일본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본을 포위할 수 있는 국제적 연대를 추구할 필요가 있었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터지자, 김립은 독일과의 국제적 연대가 한국 독립의 필요조건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 때문에 김립과 그 동료들은 러시아 정부에 위험인물로 지목됐다. 급기야 김립은 러시아 정부에 의해 적성국가 독일의 스파이 혐의로 체포됐다. 1916년 4월 우수리스크에서 체포된 그는 러시아혁명이 터진 뒤인 이듬해 5월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④.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김립과 그 동료들은 러시아 혁명파가 한국 독립의 국제적 지원 역량이 된다고 판단했다. 김립은 그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해나갔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고, ‘한인사회당’이라는 명칭의 사회주의 정당을 창설하는 데 앞장섰다. 김규면의 수기를 보면, 김립은 ‘한인사회당 창립자의 한 사람’ ‘한인 적위군 조직자의 한 사람’ ‘한국공산주의 선전사업의 첫 사람’이라고 지목된다⑤.
내부의 적에게 빼앗긴 목숨김립에게는 적이 많았다. 일본 제국주의와 그 협력자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인 사회 내에서 혹은 독립운동계 내부에 그에 맞서는 반대파가 항상 있었다는 의미다. 왜 그에게는 내부의 적이 많았는가? 교만했다거나 야심을 품었기 때문이 아니다. 전적으로 그가 견지했던 독립운동의 전략과 전술에 관련되어 있었다.
해도에서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할 때도 그랬다. 북간도에서는 전통 유학자들이 이끄는 보수적인 한인 농민단체 ‘농무계’로부터 배척당했고, 연해주에서는 러시아 국적을 가진 부유한 한인 이주민들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왜냐하면 그는 전제군주 제도를 폐지하고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혁명적 민주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간도 이주민 내부에 존재하는 보수적인 유생들, 농민들과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연해주에서 알력을 빚은 이유는 그가 연해주 한인 이주민들의 공통 이익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 국적을 갖지 못한, 가난한 비귀화 한인들의 이익과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점에 섰다. 부유한 이주민 상층부와 알력을 빚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상하이에서도 내부의 적과 맞섰다. 임시정부에서는 미국과의 연대를 중시하는 두 세력, 이승만 집단과 안창호 집단과 자주 충돌했으며, 사회주의 운동권에서는 이시파(이르쿠츠크파) 공산당과 갈등을 겪었다. 왜냐하면 김립은 미국과 연계한 외교독립론으로는 한국의 독립을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신생 혁명국가 소비에트러시아와 연계한 무장독립투쟁 노선만이 임시정부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 집단과 심각한 불화를 빚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시파 공산당과는 왜 싸웠나? 김립은 한국 혁명이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당면 목표로 삼는 민족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세력이라면 설혹 부르주아적 성격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연대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시파 공산당 세력은 달랐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수행하는 것과 동일한 성격의 혁명을 한국에서도 실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김립은 내부의 적에게 목숨을 빼앗겼다. 그의 죽음은 독립운동계에 커다란 손실을 가져왔다. 상하이 망명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동지적 유대감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정견과 조직이 다르면 한때 동료였던 사람의 손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위구심을 만연케 했다. 아주 좁은 범위의 동료들 외에는 누구도 신뢰하지 않게 됐다. 상하이 한국 독립운동자들 사이에 냉담한 기운이 휘돌았다.
그뿐인가. 한국 독립운동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김립의 죽음은 모스크바 자금의 추가 수령을 불가능하게 했다. 김립 암살 사건을 계기로 모스크바 자금 집행에 관한 의혹이 제기됐고, 이 의혹을 중시한 코민테른은 자체 감찰을 실시했다. 그 결과 약속된 총 지원금 가운데 잔여액 지급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도합 금화 200만루블이 한국 독립운동계에 제공될 예정이었다. 그중에서 실제 지급된 금액은 2회에 걸쳐서 60만루블이었다. 잔여 자금 140만루블이 남아 있었지만, 그 지급이 취소되고 말았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한다면 2085억원에 이르는 거액의 혁명 자금이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그즈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은밀히 거래되던 무기시장 시세에 따르면, 소총 500정과 기관총 3문으로 무장한 북로군정서 규모의 비정규 무장부대를 무려 107개나 조직할 수 있는 자금이었다. 그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김립 암살 사건은 일종의 국가 폭력이었다. 임시정부 내각 결정에 의거해 경무국이 집행한 이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에 큰 위해를 가져온 불행이었다. 임시정부는 두 가지 점에서 명백히 과오를 범했다. 첫째, 잘못된 정보와 판단을 따랐다. 모스크바 자금 금화 40만루블의 집행권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한인사회당에 속해 있었다. 둘째, 설혹 유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 형벌의 집행 과정이 적법하거나 적절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계의 폭넓은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졌어야 했다.
번번이 기각된 독립유공자 상신지금이라도 과오가 교정돼야 한다. 마땅히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하며, 망자에게 국가적 차원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 또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기념사업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을 자임하는 한국 정부의 마땅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김립은 오늘날에도 ‘공금횡령범’이라는 불명예 속에 갇혀 있다. 사후 근 백 년이 지나가는데도 여전히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범한 정책적 과오의 그늘 속에 있다. 오늘날에도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심의 과정에서는 임시정부 공금횡령자라는 낙인 때문에 그의 서훈 상신이 번번이 기각되고 있다 한다. 가슴 아픈 일이다. 그를 억누르고 있는 허위의 낙인을 지우고, 그 자리에 그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는 꽃 한 다발을 놓아야 할 때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① 반병률, ‘김립과 항일민족운동’, 32집, 2005, 65쪽.
② 許憲, ‘交友錄’, 제7권 제7호, 1935. 8, 72쪽.
③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하)’, 9, 1977, 178쪽.
④ 반병률, 위의 글, 74쪽.
⑤ 김규면, ‘老兵 金規勉의 備忘錄’, 윤병석 편,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8, 121-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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